'마약' 같던 그 빙수, 마법처럼 사라진 빵집

[단짠단짠 그림요리] 박하 빙수

등록 2017.08.05 12:11수정 2017.08.05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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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 등록금을 모으기 위해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빵집은 중고등학교가 몰려 있는 번화가 중심에 있었다. 사장을 포함해 제빵사, 배달과 주방 담당 직원, 아르바이트 등 모두 여섯 명이 일하는 규모가 꽤 큰 프랜차이즈 빵집이었다. 큰 시내버스 회사와 주변 여러 점포에 빵과 케이크를 납품하는 걸 보니 아마 그 번화가의 제과점 중에선 가장 유명한 듯했다.


당시 환갑이었던 사장은 빵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본사에서 보내주는, 그냥 굽기만 하면 되는 반죽 상태의 빵에도 그는 정성을 들였다. 땅콩가루를 얹든, 시럽을 바르든, 계핏가루를 뿌리든, 맛과 향을 끌어올릴 재료를 더해 오븐에 넣었다. 직원들에겐 엄격했지만 박하게 굴지는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인 내게도 고용보험을 들어주고 손님이 많아 바빴던 날엔 퇴근길에 큼지막한 빵을 챙겨주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두세 달에 한 번씩 급여도 올랐다.

직원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권위를 지키고, 열심히 일한 만큼 대우해주는 사장이 나는 좋았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3년에 걸쳐 틈이 날 때마다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두둑한 보너스와 커다란 빵 봉지

박하빙수 ⓒ 심혜진


여름이 되면 빵집엔 손님이 더 넘쳐났다. 이곳에서만 판매하는 독특한 빙수를 맛보기 위해서다. 빙수를 개시하기 전날, 사장이 시식할 겸 직원들 앞에 빙수를 내왔다. 보통 얼음 위에 팥이 올라가는 것과 달리, 팥이 아래에 있고 얼음이 소복하게 위에 얹혀 있었다. 얼음 한가운데엔 빨간 통조림 체리가 올라갔다.

특이한 점은 또 있었다. 빙수를 떠 넣자 입안에서 낯선 향이 느껴졌다. 박하향 같기도 하고 상큼한 과일향 같기도 했다. 오래된 직원 이야기론, 이 빙수엔 사장이 직접 만든 독특한 시럽이 들어간단다. 하지만 아무도 성분과 비법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중독성이 있는 뭔가를 넣은 것이 분명한데 어쩌면 마약일지도 모른다며 목소리를 낮췄다. 곧이곧대로 믿어도 좋을 만큼 독특하고 오묘한 것이 무척 끌리는 맛이었다.


드디어 빙수 개시 날, 빵집은 도떼기시장이 되었다. 아침부터 빙수 배달 주문 전화가 쉴 새 없이 걸려왔다. 빙수를 먹고 가려는 사람들이 빵집으로 밀려 들어왔다. 대부분 오래된 단골인 듯했다. 밤새 커다란 제빙기 가득 얼음을 얼려도 오후가 되면 동이 났다. 얼음을 사다가 제빙기에 쏟아부었지만 얼음은 계속 부족했다. 나는 정신없이 빙수를 나르고 탁자를 치웠다. 에어컨이 돌아가도 직원들은 땀을 뻘뻘 흘렸다. 그달 말, 사장님이 봉투를 두 개 내밀었다. 한 개는 월급, 다른 한 개에는 특별 보너스가 담겨 있었다.

그해 11월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빵집에 손님이 확 줄었다. 여름에 미리 주문을 넣어 두었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절반도 팔지 못했다. 케이크는 썩어 나갔고 사장은 어두운 얼굴로 담배를 자주 피웠다.

IMF만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예전만큼 빵을 먹지 않았다. 빵집 건너편 넓은 매장엔 몇 해 전 유명한 햄버거 가게와 국내 최대 피자집이 들어서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엔 도넛 가게도 새로 문을 열었다. 사장은 타개책을 찾기 위해 근처 가게를 얻어 케이크와 커피를 함께 판매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피자 뷔페가 개장을 앞두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큰 케이크를 잘라 조각으로 나눠 팔았지만 반응은 시원찮았다. 사람들은 조각 케이크를 영 낯설어했다. 아직 케이크는 기호식품이라기보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행사용에 가까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빵집에서 한참 떨어진 대규모 아파트단지 근처로 학교들이 이전하기 시작했다. 빵집이 있는 곳은 이제 '구도심'이라 불리게 되었다.

사장님이 꿈꾸던 세상은 뒤늦게 찾아왔다

빵집은 그곳에서 십 년을 더 버텼다. 가끔 그 근처에 가게 될 때면 빵집에 들러 빵을 샀다. 어느새 백발이 된 할아버지 사장은 환하게 웃으며, 마진도 남기지 않는 가격으로 빵을 내줬다. 하지만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친 또 다른 프랜차이즈 빵집에 밀려, 얼마 후 문을 닫았다.

언제부턴가 거의 모든 카페에서 조각 케이크와 빵을 커피와 함께 팔기 시작했다. 빙수 맛집도 곳곳에 생겨났다. 작은 사치를 당당히 누리고 싶은 이들은 밥 한 끼 가격을 훌쩍 뛰어넘는 빙수와 조각 케이크에 거리낌 없이 지갑을 연다. 빵집 사장이 꿈꾸던 세상이 이제야 도래했다.

박하향 나는 빙수를 먹기 위해 사람들이 핸드폰 지도앱으로 빵집 주소를 검색하고, 땀을 흘리며 빙수 그릇을 나르는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월급 날 특별 보너스와 함께 커다란 빵 봉지를 들고 퇴근하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빵집은 사라졌고, 마약이 들었다는 달콤하고 알싸하던 빙수 맛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팥빙수 #박하빙수 #빵집 #프랜차이즈 빵집 #요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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