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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장애인·세월호 향했던 카메라, 그의 시선을 기억하며

[추모] 지난 28일 타계한 독립다큐멘터리 집단 '다큐인'의 고 박종필 감독

17.07.31 16:29최종업데이트17.07.3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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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독립영화인들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종필 감독. ⓒ 성하훈


빈곤과 장애인, 세월호 등 가난한 자와 약한 사람, 차별과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짓밟히던 사람들. 박종필 감독의 카메라는 늘 이들의 편이었다. 낮은 곳을 지향하고 있었고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삶 속에 녹아드는 방식으로 약자들의 삶을 보듬었다. 박종필 감독은 최근까지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목포항에서 인양된 세월호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간암 말기의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으나 일어나지 못하고 지난 28일 끝내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났다.

독립다큐멘터리활동가들이 잇따라 쓰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박종필 감독의 운명 하면서 독립영화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모두가 한결같이 권력과 자본 등 힘 있는 자들의 전횡에 맞서 약자들의 편에서 함께 카메라를 들고 싸워왔던 사람들이었다. 현장에서 연대했던 활동가들과 도움을 받았던 이들은 약자의 편에서 싸워왔던 사람들이 일찍 떠난 것에 대한 상실감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모습이다. (관련 기사: 잇따라 쓰러진 영상 활동가들... 고생만 하고 이게 뭐예요?)

이들 대부분은 여유 있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생활고는 기본이고 넉넉하지 못한 제작비나 활동비를 감수하면서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크게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어려운 사람들 옆에 섰던 것은 사명감 때문이었다. 도움을 기다리는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 놓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언제나 약자들 곁에

고 박종필 감독이 생전에 작업하던 모습. ⓒ 다큐인


박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낮은 곳에서 어려운 사람을 보듬었던 박 감독은 자신의 몸이 많이 아프다는 사실도 감췄고, 도리어 아픈 것을 미안했다.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자신들로 인해 아픈 것으로 생각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더 어려운 사람들을 챙기고 배려했을 만큼, 그는 이 시대의 귀중한 영상 활동가이자 민중 운동가였다.

남긴 작품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1999년에 만든 < IMF한국, 그 1년의 기록 >은 경제난 속에 빈곤으로 빠져든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기록이었다. 최근에 만든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의 비리와 인권 침해를 고발한 단편 다큐멘터리 <침묵을 깨고>나 416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 <인양>'과 '[망각과 기억2: 돌아 봄] <잠수사>' 등은 그가 장애인과 세월호 가족 옆에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잠수사>는 바닷속 아이들을 꺼내오던 기억이 트라우마가 돼 스스로 세상과 작별한 고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 영상이었다.

박 감독은 감독이면서 제작자로 좋은 작품들이 나오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16년 인디다큐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상영됐다가 관객상 수상으로 폐막작까지 차지한 <사람이 산다>는 대표적이다. 감독이 쪽방촌 사람들의 곁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빈곤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수작으로 송윤혁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박종필 감독이 제작을 맡은 영화였다. 시설에서 나와 독립생활을 하던 중증 장애인을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두 번째 계절>은 박종필 감독은 제작자로서 촬영까지 담당한 작품이었다. 빈곤과 장애인 문제를 다룬 많은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쳤다는 것은 그가 살아왔던 삶을 전해주고 있다.

인권운동가인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은 30일 페이스북을 통해 그와 숨지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날 유언으로 남긴 대화를 전했다.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했었다는 박종필 감독은 그림을 그리다가 아버지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 그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그림을 때려치웠다고 한다. 이후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미술을 했고, 빈곤한 사람을 그리고 싶어 민중미술을 택했다.

1998년 IMF 사태가 일어나면서 노숙인들 찾아간 그는 1년 동안 같이 살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20대에서 30대로 접어들며 흔들리기도 했지만, 장애 인권운동가인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을 만나면서 장애인 운동이 감독의 삶에 소중하게 자리매김한다.

박 감독은 이후 사회복지법인의 비리를 고발하는 투쟁에 카메라를 들고 긴 시간 함께했다. 그의 작품이 주로 장애와 빈곤 문제에 집중하게 된 바탕이었다. 최근에는 4.16연대 미디어위원회를 책임지고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세월호에 집중해 왔다.

박 소장에 따르면 박 감독은 아픈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에 대해 "세월호 가족들이 모르길 바랐다"며 "세월호 일하다가 과로해 그랬다면 안 되지 않냐. 내가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시 병문안을 가려 하자"'챙겨야 할 사람도 많고 바쁘니까 안 오셔도 된다'는 말을 전해왔다"며 "마지막까지 나를 챙겨주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독립다큐 감독으로서의 명예, 늘 살펴

31일 오전 인권사회장으로 치러진 박종필 감독의 장례식에서 장례위원장인 노들야학 교장 박경석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 감독의 투병 소식에 마음 졸였던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은 갑작스러운 이별에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깊은 슬픔을 토로했다.

류미례 감독은 "박 감독은 자기든 타인이든 자기 몫이 아닌 걸 갖는 걸 싫어했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밥을 사든 비용을 지급하든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을 쓰든 꼭 사례했다. 세상이 선호하는 요소 중에 독립다큐멘터리감독인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단 하나가 바로 명예이다. 그것을 알기에 그 명예가 온당하게 주어진 건지 늘 살피고 또 살폈다"고 회상했다.

태준식 감독은 "416 미디어연대의 영상작업의 절반 이상을 박 감독이 담당했다"며 "적은 제작비에도 정 안 되면 자신이 다 짊어지고 일 한 분이었다"고 평가했다.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은 장례식 추도사에서 "박 감독은 나에게 금관 예수"라며 "우리가 절규하는 그 자리에 주님은 없었고 박종필 감독의 카메라가 있었다. 박종필의 카메라는 가볍게 스치는 영상이 아니라 얼굴 여윈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되어주었다. 절규가 되어주었고, 웃음이 되어주었고, 이야기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함께 있었다"고 추모했다.

박 감독의 장례는 장애 빈민운동가들과 독립영화진영, 416미디어연대 등이 함께하는 인권사회장으로 거행됐다. 31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의 영결식 후 화장을 거쳐 이날 오후 마석모란공원에 안치됐다.

한편 그를 추모하는 독립영화인들은 그간 남긴 주요 작품들을 공개한다. 지난 30일부터 오는 8월 8일까지 열흘간이며, 그의 초기작과 최근작 등을 볼 수 있다. (관련 기사: 세상 모든 차별에 저항한 삶, 고 박종필 감독을 기억하며)

박종필 독립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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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주요 영화제, 정책 등등)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각종 제보 환영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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