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하는 인생에 필요한 두 가지

[서평] 이원석의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고

등록 2017.05.15 11:50수정 2017.06.12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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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그 시절부터 머릿속에 자기만의 세계를 가득 담고 살았던 나는 재미 없는 수업 시간이면 나만의 세계에 빠져 공상을 했다.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은 나를 '천사표'라고 부르셨다. 다른 친구랑 떠들어 수업을 방해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수업을 안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멍하니 앉아만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 물리 선생님은 일부러 내게 질문을 많이 하셨다. 그런데도 내 증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나도 참 한결같은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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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책 표지 ⓒ 책담

공상의 기초는 모두 책에 있었다. 대체로 책에서 읽은 이야기 속에 빠져 그 안을 헤매고 다녔다. 궁금한 게 생기면 나는 또 다른 책을 읽었다.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나는 '스스로 생긴 질문을 끝까지 해결하는 법(내 방식대로의 답을 얻는 법)'을 배웠다. 그런 과정을 통해 <공부란 무엇인가> 저자 이원석씨처럼 나도 "내가 미친 게 아니라 학교(와 나아가 사회 전체)가 미쳤다는 것(10쪽)"을 알았다.

누구도 나에게 '사회가 미쳤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사람'은 나였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그런 쓸데없는 질문과 생각을 하는지 물었다. 그럴 때마다 책으로 돌아갔다. 책은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이자 물음에 항상 대답해주는 스승이었다.

이 책의 서문에 담긴 작가의 삶과 내가 비슷한 과정을 거쳤기에 나 역시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작가와 동일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공부'의 정의를 다시 내리는 작가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시작을 '공부'의 어원으로 잡는다. 어원을 밝히고 동아시아, 고대 그리스, 중세 가톨릭에서의 공부 방식과 역사를 들려준다.


"工夫를 원래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다들 아실 게다. 바로 쿵푸다. 우리가 중국 무술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그것이다. 단순한 음원론적 유사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 어원상으로 그 단어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론적으로도 깊은 상관성이 있다. 몸의 수련법으로서의 쿵푸와 지적 노동으로서의 공부가 하나 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33쪽)

"심오한 가르침일수록 더욱 오랜 시간을 들여 몸과 마음을 바르게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단기간에 고수가 되는 것은 천박한 대중문화에서나 볼 수 있는 허상이다."(34쪽)

"주자에게 독서는 취미의 하나가 아니라 생존의 방도이다. 짐승처럼 살지 않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서는 절박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읽고 배운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보다 질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여러 책을 아울러 속독하며 지식을 쌓기보다는 좋은 책을 골라서 차분하게 정독하며 지식을 곰삭혀야 한다. 주자의 권유에 따르면, 하루에 한 단락을 읽는 것이 적당하다. 완독한 책의 권수로 자랑하는 것은 진실로 헛되다."(53-54쪽)

저자는 공부의 의미를 전통에서 찾아낸 후 그러한 전통을 근거로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논한다. 이어 '독서를 토대로 한 암송', '사유를 토대로 한 묵상', '우정을 토대로 한 대화'를 거쳐 공부하기를 권한다.

"이제라도 공부와 독서가 다시 합일되어야 한다. 공부는 무엇보다도 독서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독서는 공부의 시작이며, 공부의 핵심이다. 독서 없는 공부는 더 이상 공부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무것이나 읽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바른 공부를 위해서는 얼마나 읽는지보다 무엇을 읽는지가 중요하다. 많은 책을 방대하게 섭렵하기보다 범위를 좁혀 잡아 좋은 책을 정밀하게 읽어야 한다."(107-108쪽)

"마음 관리의 기본에 해당하는 독서 또한 일주일에 한 권이 기본이다. 한 주라는 리듬 안에서 새로운 정보와 그에 기반한 깊은 성찰이 한 주기를 이루며 진행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최소에 해당한다. 시험이나 전쟁과 같은 위급 상황이 아니라면 한 주에 적어도 두 권 정도는 읽어야 한다.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어디 가서 독서가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다른 분야의 고수와 마찬가지로 독서가가 되기 위해서도 다른 것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독서 역시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126쪽)

"다른 북소리를 듣고 그것을 따라 늠연하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책과 우정'이 필요하다. 책을 통해 바르게 공부하고, 이를 위해 좋은 벗들과 함께할 수 있을 때에만, 오직 그때에만, 여러분은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181쪽)

모두 공감 되는 이야기이다. 나에게도 독서는 사유를 불러 일으켰고 사유는 오랜 '묵상'을 끝으로 해답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12년간 혼자 읽다가 스무 살 이후 10년 이상 책을 중심으로 교류하는 다양한 모임을 접했던 나는 작가가 이야기하듯 책으로 나누는 우정의 가치 역시 배웠다.

그러나 이 순간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여전히 남는다. '그 길고 어려운 과정'에 누가 동참할 것인가. '다른 북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며(또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는)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단절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길고 어려운데 외롭기까지 한 이 과정을 누구와 함께 갈 것인가. 설사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도 그 자유는 독야청청할 자유인데 누가 과연 이 길을 함께 갈 것인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백석의 <선우사>나 읊으며 살아야 하는 삶이 아닐까. "쓸쓸한 저녁"에 "낡은 나조반"에 담긴 "흰 밥"과 "가재미"와 대화하는 삶을 권하는 것은 아닌지.
   
낡은 나조반에 흰 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먹는다.


흰 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아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 밑 해정한 모래 틈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 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 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 이슬 먹고 나이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 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백석의 <膳友辭(선우사) -함주시초 4>
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 중복 게재했습니다.

공부란 무엇인가 - 우리 시대 공부의 일그러진 초상

이원석 지음,
책담, 2014


#공부란 무엇인가 #이원석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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