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교장... 이 두 단어가 불편했던 이유

바꾸고 싶은 초등학교 1학년 한자 교재

등록 2016.10.24 10:38수정 2016.10.2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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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나에게 복사를 부탁한다. 딸아이가 한자 연습을 해야 한다면서 딸아이 학교에서 내준 자료를 나에게 건넨다. ⓒ pixabay


아내가 나에게 복사를 부탁한다. 딸아이가 한자 연습을 해야 한다면서 딸아이 학교에서 내준 자료를 나에게 건넨다. 큼지막하게 가로로 여덟 글자, 세로로 일곱 글자 총 쉰여섯 자의 한자가 적힌 종이다. 종이의 위쪽에는 '1학년 권장한자(읽기)'라는 제목과 학교의 이름이 한자로 적혀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어떤 글자를 배우는 걸까, 호기심이 일었다. 한 자, 한 자 눈으로 읽어 나갔다. 수(數), 요일, 방향, 크기, 가족관계, 학교 생활, 나라와 관련된 한자가 때로는 낱글자로 때로는 단어로 쓰여 있었다. 읽다 보니 두 개의 단어가 내 마음에 걸렸다. 학교, 교실, 교문, 교장, 선생, 군인, 대한민국... 이 중, 두 단어 '교장'과 '군인'이란 단어가 불편했다. 권위주의와 과거 군사정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시기, '대통령'이 장래의 꿈으로 당연시되던 나이, 나도 대통령을 꿈꿨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육군사관학교를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 당시에는 육군사관학교를 가야만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혹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와야만 대통령의 자격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런 믿음이, 군사정권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왜곡된 논리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아침에 그렇게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87년부터 진행된 몇 번의 대통령 선거를 겪으면서,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굳이 군인이 될 필요는 없구나 깨닫게 되었다. 이런 경험에서 나는 군인이란 이미지를 군사정권의 핵심으로 여기며, 군인이란 단어를 부정적인 표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나는 '교장'이란 단어에 권위주의를 느끼는 것일까? 내가 권위주의적인 교장을 접한 기억이 있나?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풍경화 같은 존재였다. 존재하지만 나와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없는 존재. 그런 기억뿐인데, 딸아이의 교재에 등장한 '교장'이란 단어에 왜 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조금 더 살펴봤다.

매주 한 번씩 돌아오는 운동장 조회가 떠올랐다. 교장 선생님 입장에서는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시간이었겠지만, 우리들 입장에서는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 이야기를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들어야 했던 시간이었다. 한 반에 약 60명, 한 학년에 열 개의 학급, 이들에게 인내와 질서를 각인시키는 시간. 효율이 중시되고, 개인은 잘 드러내지 못했던 시기의 풍경. 그 풍경의 중심에 교장 선생님이 있었다. 이런 연유로 나는 그 단어에서 권위주의를 읽었다.

이런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는 아내의 부탁에 따라 복사를 하고는 담임 선생님에게 보낼 편지를 준비했다. 내용은 그 두 단어가 1학년 아이들에게 가르칠 만큼 중요하거나 가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권장한자에서 권위주의적인 단어는 배제하고 민주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단어로 대체될 수 있도록 점검을 해주십사 하는 부탁이었다. 편지를 아내에게 보였다. 아내는 옳은 일이라면서도 하나의 걱정을 말했다.


아내가 말하는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30여 년 한 초등학교에서 평교사로 근무하면서 스스로를 교육자의 한 전형이라고 여기는 듯한 분이라고 했다. 아내는 선생님에게 이슈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것이 딸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된다고 했다. 괘씸하게 보여서 딸아이가 학교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내가 벌이는 일을 내가 감당하면 되지만, 그 일로 하여금 내 딸아이가 불편과 부당함을 겪을지 모른다는 의견에 나는 주춤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러한 나의 주장을 담임 선생님께 전달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의문을 가져봤다. 배워야 하는 한자 혹은 단어가 상부에서 하달된 것이라면, 담임 선생님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데까지 생각하게 되자, 상황을 좀 더 살펴봐야 했다.

다음 날,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어떤 한자를 배우는지 알기 위해 대형 서점의 어린이 교육 코너로 가서 한자 관련 책들을 뒤졌다. 참고 서적을 보니 한국어문회에서 50자, 대한검정회에서 30자, 한자교육진흥회에서 30자를 선정했고, 중복되는 한자를 제외한 총 55자를 알면 8급을 딸 수 있었다. 이 한자들을 활용하여 단어를 구성해 엮은 책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딸아이 학교에서 배포한 권장한자도 이런 식으로 구성한 것 같았다.

서점에서 본 한 책에서는 韓, 國, 王, 民, 軍 다섯 글자를 나라와 사회를 구성하는 한자로 분류해 놓았다. 그리고, 책 중간에 옛날 갑옷을 입은 병사가 창을 들고 서 있는 모습에 '軍人'이라고 적어놓고 옆에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이 설명을 보니, 학교에서도 그와 유사하게 설명하면서 가르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이들에게는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지,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찬탈하고 사람들을 옭아맨 이들이 아닌 것이다. 내가 '군인'이란 단어에서 느꼈던 불편함은 내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의 예민함은 급격히 무뎌졌다.

'교장'이란 단어와 관련해 내가 품고 있는 문제를 학교 입장에서 봤다. 55자의 기본 한자로 구성할 수 있는 단어중 長자와 더불어 쉽게 초등학생이 접할 수 있는 단어는 어떤 것이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장단(長短), 성장(成長), 장거리(長距離), 장검(長劍), 장구(長久)... 초등학생에게 일러주기에는 어려운 한자들의 조합이며, 55자에 포함되지 않는 글자들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아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가 교장선생님이라서 선택한 것인가?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하면 장녀(長女), 장남(長男)도 있다. 결국, 상상력의 문제다.

이제 나에게 현실적인 선택이 남는다. 두 단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불편하게 여기는 그 이미지를 학교에 전달해서 바꿔달라는 요청을 할 것인지, 아니면 내가 두 단어를 받아들이고 그냥 넘어갈 것인지. 변경 검토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명분, 설명이 필요하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왜 불편하며, 그래도 교장 선생님이 존재하고 자주 접하는 단어가 왜 불편한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자칫 너무 큰 이야기로 번질 수 있어 시작하기가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그냥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받아들이기에는 '교장'이란 단어는 여전히 불편하다. 선생님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방법을 찾는 것이 내게 남겨진 과제다.
#초등학교 #한자 #교장 #군인 #권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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