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찾아온 김종필, 손잡으며 "형님"

[발굴 9] '이후락 가신' 이동휘의 증언, 김종필에 얽힌 비화

등록 2016.01.15 10:50수정 2016.01.1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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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정권의 몸통 중 한 명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만나 숨은 비화를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비화를 연재한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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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이 극비리에 평양을 다녀온 뒤 2개월 뒤인 1972년 7월 4일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날의 신문을 경향신문에서 동판으로 제작해 후일 이후락측에 전달했다. ⓒ 이동휘


필자는 2015년 11월 마지막 날, 울산 중구 반구동에서 이후락(아래 HR·존칭 생략)의 조카 이동휘를 10여 년 만에 만났다. 그가 운영하는 막걸리집 '청사초롱'에는 이후락과 김일성이 악수하는 사진이 걸렸는데, 사진이 걸린 이유 중 하나는, 작고한 지 6년이 넘은 이후락을 이동휘가 여전히 가슴에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연히 그가 운영하는 막걸리집을 방문한 필자가 그와의 대화 속에서 HR과 얽힌 비화를 연재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바로 그 사진이었지만, 그 당시 언론에 연재되던 김종필(JP·아래 존칭 생략)의 증언록을 읽은 것도 한 이유가 됐다.

2015년 여름에 보았던 <중앙일보>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에서는 HR에 대한 부정적인 면이 주로 묘사됐다. 그 한 부분은 이렇다.

"머리 회전이 빨랐던 이후락은 독특한 책사(策士)형 인물이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되는 문제를 꾸며서 존재를 과시하고, 그것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을 제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박 대통령도 이후락의 이런 재간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이 필요한 때가 많았기에 알면서도 중용했다."

필자는 <중앙일보>에 연재된 내용을 이동휘에게 전해주면서 그에 대한 답을 들으려 했다. 하지만 이동휘는 "JP로서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지 않겠느냐"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증언록을 모두 읽어 본 이동휘는 며칠 뒤 필자에게 전화를 해와 만나자고 했다. 그는 "JP의 증언 중에는 나로서는 이해가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고 했다. 이동휘는 JP의 증언록 중 HR의 1972년 평양 방문과 그 다음해인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부분에 유독 서운함을 드러냈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한 JP의 증언록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박 대통령은 '아 글쎄, 이후락 그자가 서울에 김대중을 데려다 놓은 후에 나한테 보고를 하잖아. 나한테 한마디도 않고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라며 화를 감추지 못했다. 그제야 나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박 대통령이 지시했거나 개입하지 않았음을 알고 안도했다. 김대중씨 납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이동휘는 이 부분에 대해 "내가 HR에게 들은 것과 다르다"면서도 그 진실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 하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한 증언을 반드시 받으려고 한다) 단지 그는 HR과 JP에 얽힌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신군부에 쫓겨난 HR과 JP, 해금된 후 행보는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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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전두환 신군부로부터 부정축재자로 몰려 축출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도평요'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 이동휘


HR과 JP가 한 때 박정희의 2인자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여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12·12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나란히 축출됐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군 선배인 유신 세력들을 부정축재자로 규정해 재산을 몰수하고 축출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HR과 JP였다.

JP는 1979년 공화당 총재를 맡았으나 이 때문에 정계를 은퇴한 후 미국으로 떠났다. HR 역시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칩거를 하다 1978년 1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울주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재기하는 듯했지만 신군부에 의해 역시 1980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전두환은 집권 말기인 1987년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국민적 저항을 불렀고, 결국 6월 민주화운동으로 6.29 항복을 한다. 이에 따라 유신세력은 정치활동 규제가 해금됐고 김종필은 신당 창당을 하게 된다.

이 무렵 JP는 HR을 찾아와 함께 신당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만일 두 사람이 이때 손을 잡았다면 이후 벌어진 3당합당 등 정치역사도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다음은 이동휘의 증언이다.

"6월 민주화운동으로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에게 손을 들자 유신인사들도 꿈틀거렸다. HR도 고무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중 JP측에서 내게 연락이 왔다. HR을 만나고 싶다며 경기도 광주 도평요 도자기 공장의 위치를 묻는 것이었다. 당시 HR은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단절한 상태라 JP라 해도 칩거 장소를 쉬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HR에게 승낙을 얻어 JP측에 주소를 알려주고 약속한 날 도자기 공장 앞에서 대기했다.

JP가 도자기 공장에 도착했다. HR를 마주한 JP는 일본말로 '아니끼'(あにき, 형님이라는 뜻)라고 외치며 HR과 손을 잡았다. 둘은 2~3시간 바둑을 두며 밀담을 나눴다. (HR은 1924년 2월 23일생  JP는 1926년 1월 7일 생이다 - 기자 말)

JP가 도평요를 떠나자 HR이 내게 'JP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는데 내게 참여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내가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라고 물으니 HR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HR의 표정은 밝았다. 아마 신민주공화당에 참여할 뜻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HR가 JP의 요청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전두환 정권의 정호용 국방부 장관의 강 보좌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호용이 HR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JP가 HR에게 신민주공화당에 참여하자고 요청한 사실을 신군부가 들었구나'하고 생각했다. 당시 체제에서는 정호용이 전두환 재가 없이 단독으로 HR을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두환은 이즈음 HR에게 자신의 퇴임 후 노태우의 상왕 노릇을 하기 위한 국가원로자문회의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 바 있다. (관련기사 : "임기말 전두환, 이후락에 국가원로회의 동참 요청")

얼마 후 나는 HR과 함께 서울 남산에 있는 하얏트호텔의 한 룸에서 정호용을 만났다. 정호용은 HR에게 '신민주공화당으로 울산에 출마하는 것을 보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HR은 1988년 4월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군부 측 민정당의 김태호와 울산에서 맞붙어 명예회복을 하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결국 정호용의 권유가 강력해 JP의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 HR은 여전히 고향인 울산 울주에서 인기가 있었고, 만일 JP와 손잡고 출마해 당선됐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다."

HR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칩거하다 1978년 12월 10대 국회의원 선거 때 무소속으로 울산 울주군에 출마해 YS의 오른팔인 최형우와 함께 당선된 이력이 있다(당시는 중선거구제).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1978년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력 등으로 고향인 울산 울주군에서 HR의 인기와 지지는 여전했다. 하지만 신군부의 권력 장악으로 김태호가 울산의 맹주노릇을 하자 HR은 내심 오기가 생긴 듯하다.

김태호는 울산 울주에서 1985년 치러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후 13·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노태우 정권 때는 내무부 장관을, 3당 합당 후 YS 정권 때인 1997년 집권여당인 신한국당 사무총장을 지내며 울산의 맹주로 자리 굳혔으나 2002년 돌연 작고했다.

이후 JP는 신군부 계열인 민정당계, YS와 3당 합당으로 권력에 재진입하는데 성공했지만 HR은 2009년 85세로 작고하기까지 세상과 담을 쌓은 채 도자기 공장에서 지냈다.
#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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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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