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중독? 늦어도, 느려도, 틀려도 괜찮아

[공부중독사회④] 발전에 최적화된 사람 양산하는 교육 아닌, '들길 같은' 교육을 꿈꾼다

등록 2016.01.14 12:44수정 2016.01.14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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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공부중독사회'다. 공부는 유일한 신분 상승 또는 유지의 길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높은 학벌이 좋은 직장을 보장해주는 시대는 지나갔고, 젊은이들은 재수, 편입, 대학원, 취업준비 등 더 나은 스펙을 쌓기 위해 공부한다는 이유로 사회 진출을 계속 유예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공부하기 위해' 막대한 돈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회가 불안정하고 경쟁이 심화할 때 우리 사회가 알고 있는 가장 '안전한 길'은 공부다. 또다시 아이들은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 2016년에는 이러한 공부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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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 Docuprime_시험 3부- 나는 대한민국 고3입니다'의 한 장면 ⓒ EBS 다큐프라임 캡처


중학교 3년 내내 반장을 했고 비평준화 지역에서 가장 공부를 잘한다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니 돌이켜보면 분명히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항상 따라잡아야 하는 대상은 존재했고 따라잡고 따라잡히는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이 대학이라는 목표로 귀결되었다.

고3 때는 아침 7시 40분까지 등교해서 밤 12시에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는 집에 가 새벽 2~3시까지 공부하는 일상을 이어갔다. 대한민국의 여느 고등학교 3학년들과 다를 바 없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대학은 졸업 이후를 위한 시험 준비가 한창이었다. 대학교 1학년 말,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더랬다.

"정신없이 수능 공부해서 대학에 왔더니 대학은 임용고사 준비에 한창이다. 이렇게 시험만 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대체 내 삶은 언제 사는 것일까?"

임용고사를 보지 않기로 결정했던 대학교 3학년 가을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내가 평생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기 전까지 방황은 불가피하다. 방황하자."

방황하는 시간은 이력서에 어떻게 적힐까? 대학 5학년이 늘어가는 지금의 추세는 한국사회가 '방황'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사례다. 한병철의 책 <시간의 향기>의 한 구절을 빌리자면 한국사회는 '들길을 걷는 경험'을 허용하지 않는다. '길'이라고 하는 것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 위한 도구이며 그 길 위에서의 경험들은 목적지로 가기 위한 과정이 될 뿐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다.


한국의 공부중독은 성공중독이자 발전중독이다. 커지고 많아지고 높아지는 발전에만 집중할 뿐, 머무르고, 깊어지고, 짙어진다는 의미에서의 발전은 고려하지 않는다.

발전에 최적화된 사람 양산하는 게 교육의 목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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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육포럼 둘째날인 지난해 5월 20일, '한국 교육 특별 발표회'가 끝난 뒤인 오후 6시 25분께 문아영 평화교육 '모모' 대표가 인사를 나누기 위해 찾아온 외국 대표들을 상대로 발언하고 있다. 앞서 문 대표는 90분간 한국교육을 '자화자찬'한 한국정부의 발표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하려다가 행사 진행 쪽에 의해 제지당했다. 행사 진행쪽은 한국어 동시통역을 중단하고 마이크도 껐다. 하지만 700여 명의 참석자 가운데 상당수가 문 대표를 향해 박수를 쳤다. 그리고 이들 중 100여 명은 30여분 간에 걸쳐 문 대표 얘기를 듣고 서로 얼싸안았다. 문 대표는 이번 행사에 한국정부와 국제NGO단체의 초대를 받아 정식 대표로 참여한 인사다. ⓒ 윤근혁/오마이tv


지난 2015년 5월 인천 송도에서 세계교육포럼이 열렸고 나는 한국 NGO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포럼 둘째 날 오후에는 "교육이 발전을 이끈다"는 제목의 한국 특별 세션이 진행되었는데, 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교육의 '성공'만을 깨알같이 조명함으로써 성과주의에 포섭당한 한국교육의 결과 집착증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교육이 발전을 이끈다"라는 제목부터 벌써 교육이 발전을 위한 도구임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양적 발전에 집착하는 것이 한국 정부만은 아니다. 송도 세계교육포럼은 2030년까지 추진될 세계교육의 목표를 수립하는 자리였다. UN이 새천년개발목표(MDGs, Millenium Developmet Goals)이후 새로이 합의해 낸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의 17가지 목표 중 4번 목표인 교육은 모두 7가지의 세부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중 목표 '4.7'은 아래와 같이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 인권과 성평등, 비폭력과 평화, 세계시민의식 등 교육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4.7 2030년까지 모든 학습자들이, 지속가능발전교육(ESD)과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교육, 인권과 성 평등 교육, 평화의 비폭력 문화의 증진교육, 세계시민성과 문화적 다양성 교육,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문화적 기여 교육 등을 통하여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보장한다.

그런데 정말 어이없는 것은 지금까지 유엔(UN)에서 논의되고 있는 4.7번 목표의 가장 유력한 평가 기준은 전 세계 '15세 청소년들의 환경과학과 지구과학 지식 숙련도'라는 것이다. 지구과학과 환경과학 성적을 지표로 삼아 4.7번 목표의 도달 여부를 측정하겠다는 이야기인데, 환경과학과 지구과학 성적이 어떻게 인권과 평화, 비폭력과 세계시민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 대체 알 수가 없다.

이 교육목표 수립과 관련한 유엔의 기술자문그룹 역시 현재 채택하고자 하는 지표인 27항보다는 세계시민교육과 지속가능발전교육이 교육에서 얼마만큼 주류화되고 있는지를 측정하는 25항을 채택할 것을 권고했으며 지표를 확정하기 위한 논의는 현재 진행형이다.

25항. (i) 세계시민교육과 (ii) 지속가능발전교육이 (a)국가교육정책, (b)교육과정, (c)교원교육과 (d) 학생평가에서 주류화되는 정도.

27항. 환경과학과 지구과학 지식에 있어 숙련도를 보이는 15세 학생의 비율

숫자로 환산되는 교육은 숫자 뒤의 사람을 삭제한다. 따뜻한 체온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존재들을 지워버리고 등수와 점수로 그 존재를 대체하는 것이다. 발전을 위한 교육은 사람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한다. 발전에 최적화된 사람들을 양산하는 것이 교육이 목적이 되어버리므로.

얼마 전 캐나다 앨버타대학이 진행한 닭의 크기에 대한 연구를 접하게 되었다. 닭의 몸집이 50년 전에 비해 무려 4배가 커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를 들여다보면서 점점 커지고 있다는 한국 청소년의 평균 신장과 PISA 테스트 결과를 떠올렸다.

닭의 몸집을 급격하게 불리기 위해서 얼마나 다양한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었을까? 닭의 몸에 어떤 영양제와 화학물질들이 주입되었을까? 닭들은 먹이 호스를 식도에 꽂기 위해 부리를 잘렸을 것이며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감금됐을 것이다.

양돈장 돼지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좁은 우리 바깥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다가 도살장을 향하는 길에서야 바깥으로의 첫걸음을 떼는 경우가 많은데 처음 느껴보는 제 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발목이 부러지는 일이 빈번하단다.

감당할 수도 없고 배워봐야 소용도 없는 지식들을 잔뜩 짊어지고 책상머리에만 갇혀있던 우리에게 근성이 없고 무책임하다는 질타가 쏟아질 때, 공부 열심히 하래서 열심히 했는데 열심히 한 공부의 결과는 "공부만 열심히 했다는 비난"일 때, 우리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출근길 신도림역처럼, 누군가 등을 떠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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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신도림역 ⓒ 연합뉴스


공부중독은 이러한 현상을 잘 포착한 말이다. 그러나 닭을 비정상으로 살찌운 닭장과 닭장을 관리하는 시스템은 중독된 현상을 훨씬 넘어서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몸에 대한 책임을 닭들에게 떠넘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부중독의 책임을 개개인에게 묻고 있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교육이, 공부가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하늘빛에 감동하며 살아갈 수 없는가? 왜 부족한 비타민을 약으로 채워야 하는가? 곁에서 시들어가는 친구들의 마음을 돌보기는커녕, 아픈 제 마음을 돌아볼 시간조차 없는 아이들을 학원버스에 잔뜩 밀어 넣는다. 물론 그 버스가 어디를 향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공부를 둘러싼 한국의 이 상황은 출근 시간 신도림역의 풍경과 닮았다. 출근길 전철에 몸을 싣고 신도림역에 도착하면 내가 굳이 걷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앞으로 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잘 보이지 않지만 모두의 등을 떠밀고 있는 강력한 힘, 내가 선택한 적 없는 중독에 모두의 몸이 병들어 간다.

이제 곧 2월이 될 것이고 사람들은 또 한 번의 졸업을 할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대학교에서 또 사회로 자꾸만 떠밀려가는 아이들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쉬어가도 괜찮고, 때로는 흐트러져도 괜찮고, 못하겠다고 말해도 괜찮으며, 뛰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괜찮은 배움의 공동체를 꿈꾼다. 나는 우리 교육이 방랑자의 시간을 듬뿍 담고 있으면 좋겠다. 늦어도 괜찮고 느려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 그 향기 있는 시간을 품은 들길 같은 교육이라면 참 좋겠다. 눈부시게 번쩍이는 거대한 표지판보다는 작고 다정한 이정표들이 멀리서 반짝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관련 기사]

① '공부가 답'이라는 486 판타지, 안 되는 걸 알면서
② 오늘은 몇 명이나 쓰러질까, 아이들도 내가 측은하대
③ 20년 동안 공부, 또 공부만... 근데 왜 이리 불안할까
덧붙이는 글 글쓴이 문아영은 평화교육프로젝트 모모의 대표입니다.
#공부중독 #문아영 #평화교육 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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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모모 대표, 평화와 교육에 관련한 활동을 하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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