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차별의 문제점을 깨닫게 해주는 울진 대풍헌

[방학맞이 대구경북 역사여행 29] 고려의 행정구역과 무신 차별

등록 2015.12.21 15:31수정 2015.12.21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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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서(蔭敍) 제도와 공음전(功蔭田)

음서제 : 고려 시대는, 관리가 되려면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음서를 통해서도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음서는 공신과 종실(宗室)의 자손, 5품 이상 고위 관리의 아들, 손자, 사위, 동생, 조카 등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조상의 덕[蔭]에 힘입어 대를 이어[敍] 벼슬을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음서제는 관리의 지위를 세습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공음전 : 전시과의 토지 과전은 당사자가 죽으면 국가에 반납했다. 하지만 높은 벼슬아치[功]에게 주어진 토지[田] 공음전은 자식에게 대물림[蔭]되었다. 음서제와 공음전은 고려의 관료 체제가 귀족 사회의 특성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고려 성종 때에 들면 신라 출신의 6두품 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게 된다(그 이전까지는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을 이룬 호족들과 공신들이 주도했다). 성종은 과거 출신 우대, 국자감 설치, 그리고 지방에 향교를 두고 교육 담당 관리를 파견하는 등의 방법으로 유학 교육을 강화한다.

물론 중앙 통치 기구도 개편된다. 특히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입법 문제를 담당하는 식목도감(式目都監)의 설치는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관청이었다.

성종은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누었다. 5도는 관청 설치 없이 안찰사가 돌며 행정을 살폈고, 그 아래 주, 군, 현에만 지방관을 두었다. 양계는 서경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북계와 대략 옥저 지역에서 지금의 경북 북부까지 이르는 동계 두 곳에 두었다. 양계는 문관 출신의 병마사가 관할했다.

외적과 다투는 국경의 책임자를 문관으로 임명


양계의 수령을 문관에게 맡긴 것은 요즘 상식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양계는 국경 지대였다. 언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데다, 수시로 외적들이 준동을 했다. 사시사철 바람결에 피비린내가 묻어 있는 곳인 까닭에 애당초 붓놀음만 해온 문관이 감당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고려는 양계를 지킬 책임자를 문관으로 임명했다. 상시로 현지 근무를 하는 책임자 없이 안찰사가 순회를 하면서 행정을 살핀 다른 5주와 달리 양계에는 군사 권한을 가진 병마사가 머물렀다는 점에서 차별화 되지만, 그래도 병마사 자리는 군인에게 돌아가지 않고 문관 출신이 차지했다. 이는 무신에 대한 차별이 당시에 이미 일반화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고려의 행정구역 '실감 맛보기'는 울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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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행정 구역. 지도를 보면 현재 경북의 동해안 북부 지역이 고려 때 양계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 정만진

동계는 동해로 들어오는 왜구들과 싸우고, 그들을 물리쳐야 하는 바닷가 국경 지대였다. 동계의 남쪽 끝은 지금의 경상북도 최북단인 울진이었다. 본래 강원도 소속이었던 울진이 경상북도의 한 군으로 편입된 것은 1963년의 일이다.

이에 비해 강원도 소속이던 울릉도가 경상도로 넘어온 것은 그에 견주면 훨씬 빨라 1963년보다 57년이나 전인 1906년의 일이다. 하지만 울진에는 현재에도 울릉도 관리 책임을 맡은 조선 시대 관원들이 배를 준비한 채 섬으로 떠날 시점이 될 때까지 머물렀던 집이 훌륭하게 남아 있다. 울진은 양계 이래 줄곧 동해를 지켜온 고장인 것이다.

경북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202(도로명 주소 : 구산봉산로 105-2)에 있는 대풍헌(待風軒), 이름 그대로 바람[風]을 기다리는[待] 집[軒]이다. 조선의 관리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이 목조 집에 머물면서 바람이 좋은 날을 기다렸다가 이윽고 배를 띄워 동해를 들어갔고, 망망대해를 노 저어 울릉도에 닿았다. 건축 연도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지만 1851년(조선 철종 2)에 중수된 것만은 분명한 대풍헌은 경상북도 기념물 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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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대풍헌, 조선 시대 당시 울릉도를 관리하기 위해 관원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관리들은 배를 타고 동해에 들어가야 하므로 이 집[軒]에서 바람[風]이 좋은 날을 기다렸다[待].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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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풍헌 안내판이 이상하다. 명칭 아래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165호로 명기되어 있고, 본문에는 문화재자료 511호로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하지만 "어떻게 문화재를 관리하기에 현지 안내판이 이 모양일까?" 하고 탄식할 것까지는 없다. 대풍헌은 기념물이고, 대풍헌 소장문서는 문화재자료이기 때문이다. ⓒ 정만진


문신과 무신 차별로 임진왜란 때도 곤욕

임진왜란 발발 당시의 기록 중에는 무신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는 사실을 잘 알게 해주는 생생한 사례들이 많다. 선조는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2주 밖에 안 된 4월 30일, 일찌감치 서울을 버리고 명나라를 향해 도망을 치면서 도원수(지금의 육군, 공군, 해군을 총괄 지휘하는 합참의장에 해당)에 김명원을 임명한다. 김명원은 칼을 쓰고 전술 전략을 수립하는 데 능한 군인 출신이 아니라 붓만 들고 살아온 문관이었다.

선조는 도원수만이 아니라 각 지방의 군사권을 가진 감사(지금의 도지사, 광역시장)도 모두 문관으로 임명한다. 지금은 광역단체장이 군사권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당시는 감사가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도 잡고 있었는데, 선조는 전라감사에 이광, 충청감사에 윤선각, 경상감사에 김수를 앉혔다. 그들은 모두 문신이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나자 그들은 싸울 생각은 않고 요리조리 도망다닐 궁리만 한 것으로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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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구 망우공원의 곽재우 동상 ⓒ 정만진

그래서 심지어 홍의장군 곽재우는 "김수는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큰 반역자다. 의분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김수의 목을 베어야 한다. 그의 목을 벤다면 풍신수길의 목을 자르는 것보다 공적이 몇 배나 크다"는 격문까지 사방으로 날렸다.

왕이 임명한 감사를 벼슬도 없던 곽재우가 죽이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었으니 그 이후 선조가 곽재우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이야 뻔한 일이었다. 

김명원 역시 도원수로 임명된 지 불과 이틀 뒤인 5월 2일, 한강 북쪽 강둑에 진을 치고 있던 중 가등청정의 왜군이 강남에 밀려오자 그냥 도망쳐버린다.

김명원은 "연(왕의 가마)을 옆에서 지켜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무기를 모두 한강에 버려라" 하고 명령한 후 혼자 달아난다. 군인 출신인 부원수 신각 등이 울부짖으며 만류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신각은 일부 잔병들을 거느리고 해유령(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일대에 머물던 중 왜군 70여 명이 노략질을 마친 뒤 돌아가는 것을 발견, 기습하여 전멸시킨다. 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 최초의 승리였다. 하지만 김명원은 평양으로 돌아가 선조에게 "신각이 명령을 듣지 않아 패전했다"고 허위보고, 신각이 처형되도록 만든다.

경북 울진의 대풍헌 마루에 앉아, 고려 시대 양계의 행정구역을 실감으로 느껴보고, 타당한 이유도 없이 사람을 차별하는 잘못이 나라에 얼마나 큰 해로움으로 작용하는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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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망양정, 봉평 신라비, 월송정 ⓒ 정만진


성류굴 / 고생대를 보여주는 천연기념물(155호), 근남면 구산리 산30
망양정 / 정철 가사 '관동별곡'에 등장하는 관동8경 중 한 곳, 근남면 산포리 710-1
월송정 / 역시 관동8경 중 한 곳, 의병장 신돌석이 올라 시를 남긴 곳, 평해읍 월송리 362-2
불영계곡 / 국가 명승 6호
봉평 신라비 / 국보 242호, 죽변면 봉평리 521

덧붙이는 글 2014.7.23.-8.18.까지, 그리고 2015.7.17.-7.27.까지 모두 28회에 걸쳐 '방학맞이 대구경북 역사여행'을 연재했습니다. 이제 다시 방학을 맞아 대구경북 역사여행을 재개합니다. 방학을 맞아 대구경북 역사여행을 실행하려는 학부모와 학생 여러분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양계 #선조 #대풍헌 #울릉도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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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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