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 만에 울린 진혼곡
'박정희 장군, 날 꼭 죽여야했소?'

'황태성 간첩사건' 전모 다룬 책 출판기념회 현장

등록 2015.10.31 10:36수정 2015.10.3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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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식당에서 52년 전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다룬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출판 기념회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홀연히도 오셨다가 홀연히도 가시오니 오신 길은 어디이며 가실 길은 어디메뇨
까마득한 저승길을 다시 돌아 못 올진대 오시기는 왜 왔으며 가시기는 왜 가시오"

29일 저녁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 전통 시가(時歌) 고혼(告魂)의 창이 울려 퍼졌다. 52년 전 간첩으로 낙인찍혀 사형당한 황태성(아래 경칭 생략)의 영혼에 고하는 노래였다.

식당 안 테이블을 가득 채운 100여 명의 민주화·통일 운동 인사들은 구슬프게 이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백발이 성성한 몇몇 노인들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새정치민주연합 유인태, 유승희 의원도 보였다.     

이 자리는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인 이른바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다룬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김학민·이창훈 공저/푸른역사 간행)의 출판 기념회.

공저자인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에 대한 책을 써놓고 이를 기념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아 보여 일반적인 출판기념회를 할 수 없었다"면서 "고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굿 형식으로 진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출판기념회에는 황태성의 친손녀 황유경씨와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황태성의 조카사위 권상능씨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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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식당에서 52년 전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다룬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출판 기념회에 친손녀 황유경씨(왼쪽)와 조카사위 권상능씨가 참석해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 이희훈


경북 상주 출신으로 1946년 11월 월북해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무역성 부상(우리의 차관급)을 지낸 황태성은 1961년 8월 김일성 수상의 밀명을 받고 남파됐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남북협상을 시도했던 그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63년 12월 간첩죄로 처형당했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남북을 통틀어 상대방에 의해 처형당한 최고위급 인사다.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는 황태성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단행본일 뿐 아니라, 인간 황태성의 총체적 일생을 복원한 최초의 평전이다. 그가 남한에 내려온 후 쿠데타 세력과의 접촉 과정과 그 이후의 연행, 재판, 처형 등이 이 책의 중심 얼개이지만, 같은 비중으로 그가 월북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남으로 내려오기로 결심했던 그의 사상의 근저를 살펴보려고 노력했다. 

황태성이 누구였던가. 일제강점기 고향 상주를 근거지로 항일운동을 펼쳤고, 해방 직후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 건준 김천군 인민위원장 임종업과 더불어 '경북지역 사회주의 3인방'으로 불렸던 그다.

일제하 황태성의 행적과 해방공간에서의 활동상은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자료실장이, 이른바 간첩사건의 전모에 대한 면밀한 취재는 김 이사장이 맡았다. 자료수집에서 책이 나오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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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식당에서 52년 전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다룬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출판 기념회에서 진혼굿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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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식당에서 52년 전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다룬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출판 기념회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방대한 재판기록을 꼼꼼히 검토한 공저자들은 황태성이 북한 무역성 부상 등을 지내고 1961년 남파된 이후 박 전 대통령을 만나고자 백방으로 노력한 사실만 밝혀졌을 뿐, 간첩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중앙정보부가 1963년 발표한 담화문에서도 황태성이 '정부 고위층'과 접촉하려고 했다는 내용만 있을 뿐 간첩 활동을 했다는 말은 없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취재과정에서 확보한 황태성의 조카 임미정씨와 그 남편 권상능씨, 친손녀 황유경씨의 증언도 '밀사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권씨는 "황태성이 처음부터 나는 간첩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다, 내 임무는 김일성 수상과 노동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사항이다"라며 자신이 북한 정부의 밀사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어린 손녀의 눈에 비친 황태성의 모습도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황유경씨는 검거 직후 중앙정보부(아래 중정) 안가에 연금돼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생생히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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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전 간첩으로 낙인찍혀 사형당한 황태성 선생의 친손녀 황유경씨가 2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식당에서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고 있다. ⓒ 이희훈


"할아버지 면회를 가면 안가에 있던 중정사람들이 '서울에서 같이 살자고 졸라라'고 시키기도 했다, 어린 나는 당연히 할아버지에게 같이 살자고 졸랐는데 빙그레 웃으시면서 '얘야, 그런데 북에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식구와 손자 둘이 있단다'하시며 손가락으로 꼽던 기억이 선하다, 지금 생각하면 중정사람들이 자기들의 설득으로는 불가능하자 나를 이용해 할아버지를 전향시키려 했던 것 같고, 그때까지 할아버지는 자신이 북으로 되돌아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 황유경씨의 증언

저자들은 황태성이 남파된 뒤 스스로 자신의 신분과 거처를 알렸고, 당국도 처음에는 그를 밀사로 대접한 정황들이 담긴 여러 자료와 증언들을 발굴했다. 당시 정부가 황태성을 체포한 후 2년 동안 5차례나 재판을 진행하면서도 검거 사실조차 비밀에 붙였다는 점도 이 사건이 다른 간첩사건과는 맥을 달리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김 이사장은 황태성 사건이 1961년 6월 중앙정보부가 창설되고 나서 만든 첫 '작품'으로 정보기관에 의한 공안 조작사건의 '원조'라고 지적했다. 1962년의 1차 인혁당 사건, 1967년의 동백림사건, 1973년의 김대중 납치사건과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사건, 1974년의 문인간첩단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최근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으로 이어진 숱한 공안 조작사건의 시작점이었다는 것.

그렇다면 '밀사 황태성'은 왜 '간첩 황태성'이 되어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

공저자들은 1963년 가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의 좌익전력을 문제 삼은 야당 후보 윤보선의 이념공세를 그 원인으로 꼽고 있다.

쿠데타 이후 미국으로부터 사상을 의심받고 있던 차에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자 다급해진 박정희가 황태성을 남파간첩으로 몰아 형식적 재판을 거쳐 처형해 버렸다는 추론이다. 이로써 박정희는 윤보선에 16만 표 차로 가까스로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황태성의 죽음은 1960년대 남북 관계를 극심한 대결구도로 만들어 버렸고, 양측에서 또 다른 무수한 죽음들을 불러왔다. 

김 이사장은 "부디 이번 책 출간을 계기로 사람들의 관심이 모여서 '황태성 간첩사건'에 대한 재심도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황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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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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