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가 부끄럽다"는 아들이 어머니께 바치는 시집

박지극 시인 <피라미는 하늘을 날고> 출간, 10월 30일 출판 기념 모임

등록 2015.10.27 14:20수정 2015.10.2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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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극 시집 <피라미는 하늘을 날고> 표지 ⓒ 박지극

시인은 시를 쓴다. 한 편 한 편 공들여 시를 쓴다. 시가 모이면 시집도 낸다. 박지극 시인도 지난 20일<피라미는 하늘을 날고>라는 시집을 펴냈다. 도서출판 나무에서 펴낸 이 시집은 70편에 이르는 신작을 4부로 나누어 실었고, 발문은 고희림 시인이 썼다. 출간을 기념하는 작은 모임이 10월 30일 오후 6시에 대구 수성못 입구 파동로 48길 5-30 '착한전복'에서 열릴 예정이다.

시인이 시집을 내는 것은 자식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과 같다.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실상 이산가족처럼 살아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부모는 그저 자식들이 언제든지 서로 만날 수 있고, 삶의 애환을 정겹게 나누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행복하다.


하지만 그런 부모가 늙어서는 오히려 자식처럼 되어버린다. 언제나 앞에 서서 자식을 이끌어주고, 뒤에 서서 밀어주고, 곁에 서서 보살펴줄 것만 같던 부모가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나머지 어린 아이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박지극 시인은 병상에 누운 모친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어머니의 일생을 돌이켜본다.

발 톱
― 어머니 1

병상에 누운
어머니 발톱을 깎는다
발톱에서 소리가 난다

봄날 소녀 적
팔랑거리는 붉은 댕기 소리
끝도 없이 한적한 소쩍새 소리

현해탄 건너오는 연락선 고동 소리


B-29 비행기 소리
피난 가라는 사이렌 소리
멀리서 포탄 터지는 소리
아이들 울음소리
덜거덕 덜거덕 쫓겨 가는 달구지 소리

아이들 학교 가는 소리   
설거지 하는 소리
빨래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
이웃 아낙이 엄마 부르는 소리.

해설이 별도로 필요하지 아니한 깔끔한 수작이다. 발톱을 깎을 때 나는 소리에서 시인은 어머니의 소녀 시절을 떠올린다. 봄날 소녀 때 어머니는 팔랑거리는 붉은 댕기를 휘날리며 들판을 뛰어다녔다. 끝도 없이 한적한 소쩍새 소리가 들리는 그런 전원이 소녀의 놀이터였다.

해방이 되고, 연락선이 현해탄을 건너왔다. 시만 읽고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짐작으로는 소녀의 남편이 될 청년이 그 연락선을 타고 왔을 듯하다. 이내 전쟁이 터졌고, B-29가 하늘을 어지럽게 날고, 멀리서는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이들은 울고(그 아이들 중에 갓난 아기인 박지극 시인도 있었다), 쫓겨 가는 달구지는 덜거덕 덜거덕 소리를 내었다.

전쟁은 끝나고, 아이들은 학교를 다녔다. 시인은 학교를 오갈 때 어머니의 설거지 하는 소리, 빨래 방망이를 두들기는 소리도 들었다. 이웃 아낙이 엄마를 부르는 소리도 들었다. 이제 어머니는 소녀가 아니지만 이웃아낙의 부르는 소리에 마실을 나가기도 했다. 붉은 댕기를 휘날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뒤, 시인은 더 이상 시를 잇지 않는다. 까닭은, 어머니가 더 이상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어머니는 지난 5월 돌아가셨다. "내 시가 부끄럽다"는 시인은 "부끄러운 시를 지난 5월 영면하신 나의 어머니께 바친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을 살다 가신 어머니의 생애가 시만큼이나 함축적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시집 <피라미는 하늘을 날고>에는 어머니를 노래한 시들이 많이 실려 있다. <발톱>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쓰여진 <외가 동네>도 그런 시편 중의 하나이다. 이 무렵은 어머니가 아직 말을 잃은 것은 아니었고 '말수가 줄어든' 경지였다. 어느날 시인은 어머니를 모시고 외가 동네를 방문했다.

외가 동네

지금은 없어진
저녁밥 짓는 굴뚝 연기
쇠정지*에 걸린 붉고 푸른 천 조각들
장독대에 얹어둔 냉수 사발
외사촌 누이와 공기놀이 하던 회나무 그늘
외삼촌이 한 줌 쥐어주던 노란 찐쌀
닫힌 외갓집 녹슨 대문
말수가 줄어든 어머니

아,
동구 밖 냇가
드문드문 선 키 큰 미루나무들 보이지 않고
강가의 눈부셨던 하얀 몽돌들 검은 이끼가 끼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초가지붕들
군데군데 빈 집으로 버려져 있다.

시 속의 쇠정지는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의 산자락과 마을이 만나는 지점이다. 마을사람들은 계곡물이 모이는 이 곳을 쇠정지라 불러 왔다. 물론 시인이 고향을 노래하는 것은 어머니를 자작시 안으로 모실 때와 같은 심정이다. 어머니는 시인에게 있어 곧 고향이고, 고향 산천은 어머니의 소녀 때 붉은 댕기머리, 전쟁 때 아이들을 안고 피난가던 모습, 이웃 아낙들과 담소를 나누던 정경까지 모두 담고 있는 커다란 자연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박지극 시인이 노래한 경북 청도 동창천의 일부 ⓒ 정만진


시인의 고향은 경상북도 청도군이다. 청도군에는 화랑의 세속오계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지는 운문사가 있다. 운문사에서 발원한 물은 청도군의 금천면과 매전면을 두루 흘러 경상남도 밀양강으로 들어간다.

이 물길을 동창천이라 한다. 동창천에는 미꾸라지 비슷한 민물고기로 몸에 범무늬가 있는 노지람쟁이(기름종개의 청도 사투리)와 먹지(피라미 수컷의 청도 사투리)들이 많이 서식한다. 시인은 유년 시절 삼촌들을 따라 동창천에서 천렵을 하던 때를 잊지 못한다.

동창천(東倉川)

누천년을 흐르고도 쉼 없음이여
노지람쟁이 범무늬가 무서워
내에 발 담그는 것이 두려웠던 유년
발을 담그며 얼마나 가슴은 콩닥거렸는지 

삼촌들의 천렵에 따라나섰다가
조금씩 조금씩
급기야는 옷이 다 젖어버려도그저 좋기만 하던 유년 

은빛으로 눈부신 피라미가 물살을 차고 오르면
뒤이어 먹지가 뛰어 오르고
피라미가 다시 물속으로 숨는다

어스름이 밀려들면 숨바꼭질은 잦아들고,
은빛 피라미와
몸에 붉푸른 줄무늬를 가진 먹지가
암수 짝이라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던
하동(河童)들도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간다

해질녘  짐을 부리듯 하루 노동을 마감하며
허리를 펴는 농부는 조용한 동창천을 바라보고
동창천은 농부에게 내일 또 보자며 자잘자잘 속삭인다

사람들은 종종 잊고 살지만
누천 년을 이어온 운문사
그 아래로 흐르는
맑은 동창천은
새로운 천 년을 보태느라 자잘한 몸살을 앓는다

<동창천>에 이르면 시인의 목소리는 자연을 완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현실적 음영을 짙게 거느린다. '사람들은 종종 잊고 살지만' 운문사에서 발원하여 그 아래로 누천 년 동안 쉼없이 흘러온 맑은 동창천이 '새로운 천 년을 보태느라 자잘한 몸살을 앓는' 현상을 시인은 증언한다. 이러다가는 노지람쟁이도 먹지도 없는 동창천이 되고 말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동창천이 '농부에게 "내일 또 보자"며 자잘자잘' 속삭이는 세월이 계속되기를 간구한다.

시인은 그런 마음을 <피라미는 하늘을 날고 배추흰나비는 물속을 헤엄친다>는 긴 제목의 시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시를 읽어보면, 제목과는 달리, 피라미는 하늘을 날지 못하고, 배추흰나비 역시 물 속을 헤엄치는 수준이 되지 못한다. 기껏 날아오른다는 것이 쇠백로의 먹이가 되고, 버터플라이 흉내를 내지만 물총새의 밥이 되고 만다. 시인은 '종종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피라미와 배추흰나비 꼴에 머물지 말자고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피라미는 하늘을 날고 배추흰나비는 물속을 헤엄친다

쇠백로
처녀의 흰 손이 잘 익은 딸기를 따듯이
검은 부리로 허공에 뜬 피라미를
똑 따먹다
피라미 제 딴에는
필사적으로 날지만  긴 다리로 보를 건너는 쇠백로는
그냥 하늘에 매달린 피라미를 따 먹은 것이다

물속에 몸을 담그고 유유히 헤엄치는
저 배추흰나비를 보라
영법은 버터플라이
하지만 위도는 항상 그 근처
물총새 한 마리
물속에 부리를 꽂더니
배추흰나비를 낚아채고는
찰랑 물을 박차고 오른다.

박지극 시인은 <나는 고만한 풍경이면 좋겠네>를 통해 자연친화적 삶의 절창을 보여준다. 시인은 '(전략) 돌아온 고향집 / 창문으로 보이는 산기슭 소나무가 옛 모습 그대로인 / 감 두엇 달린 나무에 서리가 내리고 / 까치가 감을 쪼는 / 옹기종기 모여 앉은 초가 굴뚝에서 / 하나 둘 저녁연기 피어오르고 / 밥 냄새 나는 저녁이면 / 소치는 아이들이 들판에 놀던 소를 몰고 / 워낭 소리 울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 고만한 풍경'이 되고 싶다. 그래서 시인은 '나는 좋겠네 / 밤이 되면 / 손닿을 듯 가까이 있는 별들을 / 한 아름 따서 시렁에 걸어두고 / 밤새도록 볼 수 있었으면' 하고 소망한다.

이미 시인의 어머니는 별이 되셨고, 시인은 밤새도록 그 별을 손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어머니가 한평생 사셨던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어머니를 그리는 시를 쓰고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박지극 시집 <피라미는 하늘을 날고>(도서출판 나무), 2015년 10월 20일 발간, 118쪽, 1만 원
#박지극 #동창천 #운문사 #피라미는 하늘을 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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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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