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천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봅니다

붉은 꽃무릇으로 물든 함평 용천사

등록 2015.09.23 10:16수정 2015.09.2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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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이 판소리 한 마당을 완창하려는 데는 몇 시간이 걸립니다. 소리꾼은 소리를 하기 전, 목부터 풀어줍니다. 먼저 단가(短歌)를 한 곡조 뽑지요. 단가 중에 <호남가(湖南歌)>가 있는데, 첫 대목이 이렇습니다.

함평천지(咸平天地) 늙은 몸이 광주고향(光州故鄕)을 보려하고, 제주어선(濟州漁船) 빌려 타고 해남(海南)으로 건너갈 제, 흥양(興陽)에 돋은 해는 보성(寶城)에 비쳐있고, 고산(高山)의 아침안개 영암(靈岩)에 둘러있다.


<호남가>는 전라도 각 고을의 지명을 넣어 풍광을 읊으면서 사내대장부가 할 일을 열거한 노래이지요. <호남가> 첫대목 나오는 '함평천지'는 함평땅을 가리킵니다.

함평(咸平)의 원래 뜻은 여럿이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함평이란 지명에서 사람과 자연이 이어지고,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행복한 세상이 떠오릅니다. <호남가>에서 함평땅이 맨 처음 나오는 것은 함평이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 때문이 아닐까요?

함평사람들은 '함평천지'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기름진 땅이 함평천지요, 넉넉함에 풍요로움이 넘치는 땅 또한 함평천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이 포근한 고향땅, 함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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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용천사 대웅전이다. 대웅전 앞에 용천(龍泉)이라는 샘이 있다. ⓒ 전갑남


지난 19일(토), 아내와 함께 내 고향 함평땅에 내려왔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 40년 가까이 되지만, 고향에 오면 마음은 늘 포근합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자랐을 때의 정취는 찾을 수 없지만, 마음속에 담긴 고향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습니다.


부모님 성묘를 마치고 밥집에 들렸습니다. 우리 행선지가 영광 불갑사라는 말에 주인아주머니가 거듭니다.

"꽃무릇 구경갈라고요? 영광 불갑사까지 뭐할라꼬 간다요! 여기서 쬐끔만 가면 용천사 꽃무릇도 지천인디. 거긴 지금 말도 못허요! 온 천지가 꽃무릇잉께! 오늘이 축제 시작하는 날이라 사람들이 미어터질 것이요. 뭐시라 허드라, 셔틀버스가 뭔가 고거 타고 가면 편하다고 하대요! 내 말 듣고 한 번 가보랑께요, 후회 안 할팅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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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용천사 꽃무릇동산. 붉은 색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 전갑남


아주머니의 투박한 사투리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아내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씁니다.

"그럼 아주머니 친절하신 말씀 때문이라도 우리도 용천사 들려야겠네요! 거기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요!"
"길가는 말할 것도 없꾸, 심지어는 논두렁까지 심어놨승께! 함평천지가 아니라 꽃무릇천지랑께 꽃천지! 거그 꽃무릇 징하게 많을 꺼요! 이맘때 아니면 못 봐요, 못 봐!"

아주머니는 행여 우리가 좋은 구경거리를 그냥 지나칠까봐 신신 당부를 합니다. 고향사람한테 내 고향 자랑거리를 실감나게 들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실은 내가 어릴 적에는 꽃무릇이란 말도 못 들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꽃무릇은 지금처럼 흔하게 널려있는 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해보면 용천사가 꽃무릇천지로 변했다니, 흐른 세월도 길지만 세상이 풍요롭게 변화된 것입니다.

발이 달린 것도 아닐 텐데...

해보면에 들어서고 용천사까지는 내비게이션으로 많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벌써 길가는 붉은 꽃무릇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도로변 코스모스 꽃길처럼 붉은색 꽃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습니다. 가는 허리를 흔들며 춤추는 색색의 코스모스와는 또 다른 맛이 납니다. 온통 붉은 색으로 장식한 꽃길이 보기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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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사 가는 진입로에 핀 꽃무릇 꽃길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끈다. ⓒ 전갑남


용천사로 가는 길목, 널찍한 주차장이 보입니다. 차량 봉사자들이 길을 가로막고  주차장으로 안내합니다.

"여기서 셔틀버스를 타세요. 차로 10여분이면 됩니다. 내려올 때도 셔틀버스를 타면 아주 편해요!"

우리는 주차를 하고, 대기한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사람들이 자리가 채워지자 차는 금세 출발합니다. 셔틀버스로 이동하니 차량 소통이 원활합니다.

가는 길 내내 꽃무릇 꽃길입니다. 그야말로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습니다. 도로가는 물론이고, 산기슭에도 붉은 꽃 세상입니다.

아내는 꽃무릇이 펼친 장관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논둑에까지 꽃무릇이 피어난 것을 보고는 탄성을 지릅니다.

"꽃무릇에 발이 달렸나 봐요? 어떻게 논두렁까지 꽃이 있죠?"
"이사람, 어떻게 꽃에 발이 달려! 사람이 심었겠지!"
"세상에! 함평사람들 대단하네요! 논두렁까지 콩 안 심고 꽃 심을 생각을 했을까! 꽃천지를 만들었네요!"
"그러게 말이야, 이걸 보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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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 보이는 농촌 들녘. 꽃무릇이 논두렁에까지 심어져 있다. ⓒ 전갑남


차창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의 표정들도 꽃처럼 환합니다. 꽃무릇공원에는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어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용천사 꽃무릇공원은 꽃무릇으로 그야말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고즈넉한 산사에 이렇게 많은 꽃을 피우다니!' 절로 감탄사가 나옵니다. 용천사 호수 주변에 핀 꽃은 호수 물빛까지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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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사 앞 호수가에도 꽃무릇의 아름다움이 장관이다. ⓒ 전갑남


용천사 꽃무릇은 입구인 꽃무릇공원부터 시작하여 호수 둑을 거쳐 용천사와 모악산 산기슭 산책로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길 양옆은 붉은 꽃길이고, 산기슭에도 꽃이 무더기로 피었습니다. 나무숲 아래도 말할 것 없이 꽃동산입니다.

높지 않은 돌담 아래 살포시 얼굴을 내민 꽃은 새색시처럼 예쁘고, 돌담 너머 숲 밑에 무리지어 피어난 꽃은 붉은 융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아름답습니다.

밥집 아주머니가 '징하게도 많을 거다'는 말이 들어맞습니다. 우리는 원 없이 눈이 시리도록 꽃무릇을 보고 또 봅니다.

함께 피워서 아름다운 꽃 '꽃무릇'

​앞서가는 관광객의 흥에 겨운 말이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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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룻의 아름다운 자태 ⓒ 전갑남


"꽃동산에 바람이 살랑살랑! 꽃무릇 가느다란 허리도 살랑살랑! 그럼 꽃바람에 처녀가슴도 살랑살랑 할까!"

살랑대는 가을바람에 일렁이는 꽃무릇 물결이 보는 이의 마음도 흔들어 놓습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천년을 산다 해도 잎과 꽃이 따로 핀다는 꽃무릇. 꽃은 잎을 그리워하고, 또 잎은 꽃을 그리워하고! 서로를 그리워한다하여 혹자는 꽃무릇을 상사화(相思花)라 부르기도 합니다. 상사화는 원래 다른 꽃인 데도요.

꽃무릇은 봄에 언 땅이 풀리면 어린 난초와 같은 잎이 고개를 내밉니다. 봄에는 잎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다가 어느 날 슬그머니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다 장마 끝에 놀랍게도 시든 잎을 헤치고 꽃대가 불쑥 솟아오릅니다. 죽은 시늉에서 깨어난 개체는 반가움 그 자체입니다.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붉은 꽃망울이 맺히고 나면 여섯 개의 가느다란 꽃잎을 펼쳐 꽃을 피웁니다. 뒤로 말린 꽃잎과 꽃잎보다 더 길게 뻗어 나온 꽃술이 조화를 이뤄 한껏 멋을 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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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핀 꽃무릇. 뭔가 외롭게 느껴진다. ⓒ 전갑남


꽃무릇은 피보다 진한 색으로 치장하여 화려함을 더합니다. 그런데 그 화려함 뒤에는 뭔가 모를 애틋함이 묻어있습니다. 작은 이파리 한 장 없이 껑충한 키에 꽃송이만 달랑 매단 모습은 그리움에 목이 메워 보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리움을 혼자서가 아닌 무리를 지어서 서로를 달래주니 말입니다.

꽃은 홀로 필 때보다 함께 피어야 더 아름답습니다. 꽃무릇은 그걸 아는지 무더기로 피어나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것입니다. 한 번 심어놓으면 알뿌리로 수도 없이 번식하여 자손을 늘리는 지혜가 놀랍습니다.

꽃무릇 구경에 지친 듯 아내가 쉽니다. 자기는 꽃무릇보다는 못하지만 예쁘게 사진 한방 찍어달라고 합니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며 아내의 말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잖아! 당신, 내가 보기엔 꽃보다는 훨씬 아름다우니까 걱정 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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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릇 속의 아내 모습이다. ⓒ 전갑남


덧붙이는 글 용천사는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415이다.
서해안고속도로 이용 : 함평IC -> 영광방향 23번 국도 이용 -> 용천사
#용천사 #꽃무릇 #함평천지 #해보면 #꽃무릇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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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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