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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서현철, 그가 '라디오 스타'에서 못다 한 이야기

[인터뷰] "책임감으로 출연...창피하다던 아내, 반응 좋으니 넘어가"

15.05.13 13:57최종업데이트15.05.1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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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꼬박 회사에서 나오는 월급에 의문을 던진 서른 살의 한 남자가 있었다. '이렇게 출퇴근하며 먹고 살자고 일하는데 이게 인생에서 무슨 의미일까, 뭘 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은 곧바로 주 1회 연극 연기 수업 수강으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1년 후 직장을 뛰쳐나오게 된 촉매제가 됐다. 평범한 회사원이 배우로, 그것도 웃음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연기꾼으로 제 2의 삶을 시작한 순간이었다.

배우 서현철, 지난 6일 MBC <라디오스타>에서 공개된 건 물론 그의 일부다. 첫 예능 출연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모습에 시청자들이 크게 반응했다. 하지만 21년차 배우, '연극계 찰리 채플린'이라 불리는 그에게는 방송 몇 분 분량 말고도 들을 이야기가 더 많을 듯 싶었다. 12일 오후 새 연극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이하 '지킬앤하이드') 공연을 앞둔 대학로 동숭아트홀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라디오 스타>는 책임감에 출연한 것"

MBC 예능 <라디오스타>의 한 장면. ⓒ MBC


일단 라디오 스타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봤다. 정작 본인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방송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지인들이 "이러다 광고에 출연하는 거 아니냐. 크게 편집된 부분도 없는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서현철은 "부담감에 안 나가려 했다가 꼭 4명을 채워야 한다고 홍보 담당자가 부탁해 책임감에 나갔다"고 했다. "큰 웃음을 줄만한 얘긴 아닌데 아무래도 남의 단점을 잡아서 웃기는 개그가 아니라 신선하게 받아들인 거 같다"는 자평도 이어졌다.

"녹화 끝나고 김구라씨는 자기가 했으면 못 웃겼을 이야기라고 하더라. 윤종신씨도 신선했다고 말했다. 방송 후 아내가 내가 언급된 여러 기사를 보여줬는데 반응들이 재밌었다. 여러모로 다행이고 감사하다."

노래에 자신이 없어 애초부터 시키지 말라 담당 작가에게 부탁했지만 <라디오스타> 진행자들은 그걸 빌미로 서현철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더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성공이었다. 준비한 이야기 외에 자연스럽게 던진 일화들에 출연진들이 포복절도했다.

"갓길 위 정차한 트럭 뒤에 차를 세우고 졸다가 급브레이크 밟은 이야기는 평소 후배들에게 해줬던 거다. 나중에 예능 프로 이런 데 나가면 꼭 써먹으라 해서 가져나간 건데 그때가 드라마 <야경꾼일지> 촬영 때였다. 여튼 졸음운전은 진짜 위험하다! 

간장과 올리브유 이야기는 아내를 판 건데 처음엔 아내도 왜 자길 팔았냐며 창피해했다. 전국적으로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 됐다며 뭐라 하다가 기사 반응이 좋으니 잘 넘어갔다(웃음). 이번 일로 좋은 경험했다. 언젠가 기회가 또 된다면 예능 프로에 나갈 수는 있겠지만 일단 배우인 만큼 연기에 집중해야지!"

현철의 팔 할을 채운 유머 연기...인생의 본질을 묻다

연극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 공연의 한 장면. ⓒ 창작컴퍼니다


그의 말에 진지해지면서도 어느 순간 웃음이 난다. 서현철은 코미디 연기를 굳이 정극과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타이밍과 호흡의 차이로 웃음을 유발할 뿐 본질은 같다는 거다. "코미디를 연구해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주어지는 작품을 해왔을 뿐인데 그렇게 됐다"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너무 드러내려 작정하면 개그가 되고 진지하게 가면 연극이 되더라"며 전 연극 <웃음의 대학> 때 사연을 전했다. 그 중간 지점에 서현철이 추구했던 연기가 자리하고 있다.

연극 <황구도>(1994)로 데뷔한 뒤 쌓아온 작품들 중 상당수가 유머로 가득하다. 굳이 따지면 전체 중 약 80% 정도다. 웃음의 편차가 존재할 뿐, 기본적으로 유쾌한 캐릭터를 주로 맡아왔다. 현재 공연 중인 <월남 스키부대>에서 그가 맡은 김 노인 역이 직접적인 웃음을 전하며 인생을 말한다면, <지킬앤하이드>에선 조수 풀로서 각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재치있게 연결한다.

"<지킬앤하이드>의 풀은 굳이 특징을 내세울 필요가 없는 캐릭터다. 빅터(이시훈 분)와 지킬(정웅인/최원영 분) 등 다른 캐릭터가 재미를 주니까. 이게 미타니 코키라는 작가가 쓴 건데 이 사람 작품을 쭉 해왔다. <웃음의 대학>, <너와 함께 라면> 등인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웃음을 주는 힘이 있다.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는 걸 힘 있게 끌어가는 면이 있더라. 미타니 씨가 한국에 왔을 때 잠깐 대화한 적이 있다. '미국 같은 나라엔 코미디 작가가 많은데 왜 일본엔 없나' 생각하며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더라. 이 분야에서 코미디와 삶을 연결시키며 점차적으로 인정을 받아온 거다.

연기 전공자는 아니지만, 감히 말하자면 연극은 시대성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엔 (권력층에게) 잡혀갈 각오를 해서라도 계몽이 필요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웃음이 필요하다고 본다. 찰리 채플린이란 배우를 보면 웃기면서도 슬프다. 영화 <모던 타임즈>였나? 볼트 돌리는 그의 연기를 보면 웃긴데 짠하다. 그게 시대성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연극계 찰리 채플린이란) 별칭은 영광스럽다. 아무래도 내가 썼던 작품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서현철은 2003년 연극 <지팡이를 잃어버린 채플린>을 직접 쓰고 연출했다-기자 주)

평소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데 영등포역이었나 거기서 어느 할아버지가 물러터진 홍시를 먹는 모습을 보고 착안했다. 홍시 물이 흐르니 할아버지가 근처 쓰레기통 위에서 껍질을 깠는데 그만 알맹이만 쏙 빠져 버린 거다. 껍질만 핥는 그분 모습에 처음엔 웃다가, 몰래 구석에 가서 엄청 울었다. 상황은 코미디지만 얼마나 슬픈가. 작품엔 계란 껍데기를 까다 결국 계란을 먹지 못하는 걸로 그렸었다.

근데 가만 보면 코미디의 90%가 남의 불행을 소재로 한다. 갑자기 넘어지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사실 우리가 종종 겪는 일들 중에서도 당시엔 엄청 놀라고 화나지만 세월이 지나면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게 있다. 나중에 웃으며 얘기할 거면 지금 이 순간 그렇게 화내고 슬프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나 싶다. 이런 게 코미디 같다."

선택의 순간 내린 과감한 결정..."늦었지만 열등감은 없었다"

배우 서현철. ⓒ 창작컴퍼니다


이야기를 보다 과거로 돌렸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뒤 K제화 영업사원이 된 서현철은 애초부터 회사 생활을 오래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독재 밑에서 시절이 수상했던 때, 남들처럼 불의에 적극 항거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할 마음도 없던 차에 얻은 밥벌이 수단이었다.

회사 내 각종 불합리에 적극 항의했다고 한다. 이런 행동으로 부하 직원은 좋아하고 상사는 거북해 하는 직원이었지만, 평범함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고 했다. 마음에 남은 부채감이었을까. 막연했던 연극 무대보다 가까웠던 건 사회복지사의 꿈이었다. 당시 그는 수화 초급과 중급과정을 수료했으나, 고급과정을 앞두고 멈추게 됐다.

"고급과정은 6개월간 수업을 쭉 들어야 했다. 회사를 그만둬야 할 상황이었지. 결국 그러지 못했다. 나만 먹고 살지 말고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자는 거였는데, 누굴 도울만한 각오는 없구나 싶었다. 그 와중에 막연하게 마음 한 구석에 있던 연극 연기 맛을 보기로 한 거다. 회사 다니며 1년 동안 매주 토요일 국립극장 문화학교를 다녔다. 재미를 느꼈고, 욕심이 생겼다. 부모님이나 결혼을 생각했으면 못했을 결정이었지만 더 늦으면 만날 후회하며 살 거 같더라.

대신 선택 이후 벌어질 모든 일들은 어려움이라 생각하지 말자고 각오했다. 늦게 시작하니 오히려 연기 열등감이 없었다.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편했지. 가족에 대한 미안함만 있었다. 물론 연기하면서 퇴직금을 전부 탕진했고, 새벽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늦게 시작한 자가 견딜 몫이라 생각했다. 힘들다 느꼈다면 다시 회사원이 됐겠지. 더한 어려움을 겪는 배우도 많이 있다."

주변으로부터 간헐적으로 들었던 '전공자도 아닌데 연기 잘한다'는 칭찬이 그 원동력이었다. 그렇게 버티며 작품을 쌓아오는 모습에 후배 연기자들이 종종 상담을 청하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서현철은 난감해한다. "정답이 없기에 그저 들어줄 수밖에 없다"며 "결국 선택의 문제"임을 짚었다.  

"내 생각을 얘기할 수는 있지만 그게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심지어 연극을 계속 해도 되는지 묻는 친구도 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계속 해보라 했는데 아무 발전이 없을 수도 있고, 때려 치라 했는데 언젠가 잘 될 수도 있잖나. 사람마다 성격과 한계치가 다른 만큼 같은 걸 다 잘할 수는 없다. 그저 술 먹고 그들 얘기 들어주는 게 위로지.

사실 털어놓는 사람도 말하면서 스스로 정리하곤 한다.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거지 정답을 얻으려 하는 경우는 없지 않나. 거기에 대고 '야, 이 XX야 이렇게 해!' 이러면 꼰대가 되는 거다(웃음). 그저 그들보다 더 힘든 친구 이야기를 해주면 스스로들 느끼는 바가 있더라. 그것도 너무 강조하면 안 된다. 자연스럽게 지나가듯 해야지."

서현철이 사는 방식..."인명은 재천, 마음의 근육 키워갑시다"

연극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에서 풀 역을 맡은 서현철이 시연 중이다. ⓒ 창작컴퍼니다


반 육십일 때 배우에 입문했던 서현철이 어느덧 오십이 돼 있다. 군데군데 희끗한 머리가 보였지만 풍기는 분위기만큼은 그보다 훨씬 어려 보이고 평온함마저 느껴졌다. 평소 자주 마음의 상태를 의식하고 관찰해서일까. 연극 <사랑별곡> 때 만난 이순재 선생을 떠올리며 서현철은 "같은 대사라도 선생님이 하면 깊이가 달랐다. 난 그저 연기하는 척 할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반성적 사고가 습관이 돼 있어 보였다.

"부끄럽지만 당장 뭔가 깨달을 순 없어도 마음을 챙기기라도 하자는 주의다. 마음이 편해야 덜 가지고 있어도 행복하다.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읽다가 언젠가 달라이 라마의 <용서>라는 책을 접했다. 매사에 마냥 긍정적이 되라는 말이 아니더라. 다만 내가 겪는 것들이 화낼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는 거였다. 그 이치를 알면 화 푸는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 

근데 나도 사람이더라. <용서>를 읽고도 그 책을 집어던지면서 '어휴! 대체 몇 번을 더 읽어야 저 XX를 용서할 수 있는 거야!'라고 한 적도 있다(웃음). 운동을 해서 근육을 만들듯 마음의 근육도 조금씩 만들어 가야 하더라. 스님들이 매일 목탁을 두드리는 것도 해탈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현철이 지닌 화두가 평범하면서도 진실하게 다가왔다. "본래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자는 등 거창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마흔 다섯에) 결혼 하고 아이를 낳으니 완전 바뀌었다"며 "그저 소중한 가족, 사람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게 화두"라고 말했다. "어린이는 무조건 사랑받아야 한다. 그래야 자라서 남에게 상처주지 않는 어른이 된다"는 그의 말에 결코 가볍게 넘기지 못할 무게감이 있었다.

남을 대놓고 돕는 삶은 아니지만, 그는 맑은 거울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있는 배우였다. 이것도 충분히 이타적 삶이 아닐까. 그가 <라디오 스타>에서 못 다한 이야기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듯 했다.

서현철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 라디오스타 연극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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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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