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고참에게 '남자'를 소개했습니다

[공모-위기의 순간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군대

등록 2015.05.09 20:42수정 2015.05.09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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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병장시절... 나도 그 김 상병처럼 졸병들을 괴롭혔었나. 지금 이 나이에 생각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렇진 않았던 것 같다. ⓒ 신광태


"너, 김 상병님이 밖으로 나오래..."


올 것이 왔구나. 어느 토요일 늦은 저녁시각. 동기 녀석이 김 상병의 호출을 귓속말로 알렸다. 순간 탈영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나쁘게 째진 김 상병의 눈이 떠올랐다.

김 상병은 무서운 고참이었다. 구타가 묵인되었던 나의 군 생활 시절, 고참병들의 낙은 신병들을 괴롭히는 것인 듯했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신병들에게 담배를 물리곤 기침을 하면 그게 뭐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거리며 웃던 사람들... 마치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 같았다.

"봉순씨에게 답장이 왜 안 오냐?"

앉아 쏴, 서서 쏴

"가족관계 설명해 봐!"


1982년 7월 무덥던 어느 날, 난 군에 입대했다. 4주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 내무반에서 깔깔이(군용 방한내피)에 '추리닝'을 걸치고 있던 대여섯 명의 사람들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그 해괴한 모습이 말년(군 제대를 앞둔) 병들 만의 특허복장이란 걸 그때 알았다.

"네, 어머님과 형님 그리고 동생..."
"이 XX가 사제물이 덜 빠졌네. 엎드려 뻗쳐!"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아버님이 안 계신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서 일까'라는 생각을 할 즈음 그 깔깔이 복장의 말년 병은 '앉아 쏴 몇 명, 서서 쏴 몇 명' 그렇게 군대식으로 소개를 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가족 중 남자들은 서서 쏴, 여자들은 앉아 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앉아 쏴 한 명, 서서 쏴 두 명입니다. 앉아 쏴는 어머님, 서서 쏴는 형님과 동생입니다."
"어머님은 빼고 인마, 너도 참... 여동생이 없다면 군 생활 괴롭겠다."

당시 말년 병의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없는 여자를 하나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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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병 시절엔 없던 여자도 만들었다. 왼쪽이 필자. 작대기 하나의 노란 계급장이 빛난다. ⓒ 신광태


"여동생 없다고 했지? 그러면 니네 동네에 예쁜 여자 많지? 이름하고 주소 대봐."
"없습니다."

"이 XX야, 남자들만 사는 마을도 있어?"라는 말 뒤에 날아온 군홧발, 그리고 거친 한 마디.

"내일까지 시간을 주겠어!"

자대 배치 후 3일쯤 지났을까, 그 인상 더러운 김 상병의 횡포가 시작됐다. 말년들 등쌀보다 더 무서운 게 상병이란 것도 그 즈음에 알았다. 나도 여자친구가 없는데 대체 어쩌라는 건가. 없는 여자를 만들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잠도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밥을 먹는데 마치 모래를 씹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반짝 머리를 스친 생각. 한번 모험을 해보자. 어차피 이렇게 맞나 저렇게 맞나 마찬가지다.

"생각했어? 이름과 주소."

정확히 하루가 지난 시각. 내무반 뒤로 나를 불러낸 김 상병은 다짜고짜 이름과 주소부터 대라고 했다.

"네, 이름은 길봉순. 주소는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예뻐?"
"네, 무척 아름답습니다."
"이 XX가 그러면서 고참을 놀려? 너 내가 오늘 길봉순씨한테 편지를 보낼 건데 답장이 오지 않는 건 이해하겠지만, 반송돼 오면 죽는다."

큰일이 났다. 부랴부랴 봉순이에게 편지를 썼다.

'김OO 상병에게 편지가 올 거다. 절대로 답장하지 마라. 이유는 묻지 말고 나 좀 살려준다고 생각해라. 휴가 나가면 자초지종 설명해 줄게.'

안부를 물을 경황도 없었다. 봉순이에게 서둘러 편지를 보냈다. 김 상병보다 내 편지를 먼저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봉순이는 남자였다. 그 친구가 왜 봉순이란 이름을 가졌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 집안의 돌림자가 '순'자이기 때문인 듯하다.

"야, 봉순씨에게 답장이 안 온다. 휴가 나가면 말 좀 잘 해 줘라."

입대 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내가 포상휴가를 나갈 때, 김 상병은 봉순씨에게 '자신이 잘 생겼고, 학력도 좋고, 사회에 나가면 크게 성공할 사람으로 보인다'고 말해 달라고 했다.

내가 언제 그랬냐고요

"너 이 XX 나를 팔아먹어? 그것도 남자한테? 내가 답장 보내려고 했어 인마. '난 남자다'라고 ㅎㅎ..."

첫 휴가를 나갔을 때, 난 집으로 가는 게 중요치 않았다. 대체 김 상병이 봉순이에게 뭐라고 썼는지 내용이 궁금했다.

'이렇게 초면에 글을 올려 죄송합니다. 군대라는 사회의 메마른 정서를 달래기 위해 그늘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을 때, 신 이병이 다가와 착하고 예쁜 동네 아가씨가 있는데, 펜팔을 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 실례인 줄 알지만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생전 책이라곤 쳐다보는 것조차 본 적 없는데 그늘에서 독서? 봉순이가 답장 보내지 않은 게 고마워서, 또 김 상병 글이 웃겨서 친구와 그걸 안주삼아 소주를 꽤 마셨다.

고마워 사랑하는 봉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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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봉순씨. 내 결혼식때 축하한다는 말을 제일 많이 했던 친구다. 왼쪽은 내 부인, 오른쪽 남자가 봉순씨다. ⓒ 신광태


"봉순씨 서울 가고 없더라."

이게 뭔 소린가. 김 상병이 휴가를 간다고 했을 때 후련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휴가 복귀하던 날, 느닷없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봉순이를 찾아갔단 말인가? 갑자기 등골이 서늘했다.

김 상병은 휴가를 가면서 우리 마을에 들렀다고 했다. 마을에 가서 어느 어르신을 만나 '봉순씨네 집이 어디에요?'라고 물었더니 어르신은 '친구가 찾아 왔겠거니' 하고 '봉순이네 집은 저기 밤나무 밑인데 어제 서울 갔어. 친척집에 갔으니까 열흘은 넘어야 올 걸'이라고 하셨다나...

그날 봉순이가 서울에 안 갔었다면... 또 그 어르신께서 '봉순이는 남자야'라고 말했더라면... 사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을 만도 한데, 아직도 김 상병을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먼저 든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덧붙이는 글 '위기의 순간들 응모글'
#이등병 #군생활 #길봉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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