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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에서 증발한 이야기, 덕수 인생의 '왜'

[리뷰] 천만 관객 넘은 <국제시장>, 이래서 아쉽다

15.01.16 18:46최종업데이트15.01.1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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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덕수(황정민 분)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이는 영화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조명하면서도 역사적 배경을 들추지 않는 것과 묘하게 닮았다. ⓒ CJ 엔터테인먼트


지난 13일, 영화 <국제시장>의 관객 수가 천만 명을 돌파했다. 이로써 <국제시장>은 2015년 들어 처음으로 천만 명을 동원한 영화가 됐다. 더불어 지난해 개봉한 <명량>에 이어 열한 번째로 천만 관객 기록을 달성한 한국 영화 대열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영화가 흥행 가도에 오르기 시작하자 평론가들의 말이 쏟아졌다. 허지웅씨가 <한겨레>와 나눈 대담 중 일부를 종편에서 자극적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TV조선>은 해당 발언의 맥락을 생략한 채 인용하며 허지웅씨를 '좌파 평론가'라는 자막과 함께 방송에 내보냈다.

이 같은 반응은 영화에 대한 비판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보수진영의 자기 방어로 보였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의 '애국가' 발언이 더해지며(관련기사 : 박 대통령, '국제시장' 언급하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마치 <국제시장>이 보수적 가치를 담은 영화로 평가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국제시장>

영화 <국제시장>은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의 어린 시절로 시작된다. 6·25가 한창 벌어지던 흥남에서 철수하는 미군의 함정에 올라타는 피난민들, 그 가운데 덕수네 가족이 있다. 피난을 가던 중 여동생을 잃어버린 덕수는 좌절하고, 대신 그녀를 찾겠다며 떠난 아버지도 끝내 돌아오지 못한다. 결국 장남인 덕수가 가장이 되어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져야하는 신세가 된다.

친척이 살고 있다는 부산의 국제시장을 찾은 덕수와 가족은 힘겨운 삶을 이어간다. 구두닦이를 시작으로 갖은 육체노동을 하면서 동생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는 덕수. 명문대에 합격한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덕수는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고 파독 광부로, 이후에는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으로 향한다.

젊은 시절 온갖 고난을 겪은 덕수는 나이가 들어서도 물려받은 가게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쓴다. 오직 가족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그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어릴 적 헤어진 여동생을 찾으려고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에 나가기 위해 방송국을 찾는 덕수의 모습은 가슴 아픈 분단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나이가 든 덕수는 고집불통의 고독한 노인으로 묘사된다. 그가 왜 그토록 지독한 성격을 갖게 됐는지, 또 왜 외로운 처지가 됐는지, 영화는 과거 회상을 통해 차례로 보여준다. 그 시절의 많은 사람이 그러했던 것처럼, 덕수도 '살아가기 위해' 독해져야만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나씩 드러나는 그의 과거는, 한국 역사의 슬픈 굴곡과 함께 크고 작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역사적 사건마다 사라진 국가의 흔적

요약하자면 영화 <국제시장>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다. 마침내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 가족을 행복으로 이끈 덕수를 보면, 영화는 오늘날의 기성세대의 노고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아버지의 환영이 늙은 덕수에게 "니 고생한 거, 내 다 안다"며 어깨를 토닥이는 후반부의 장면은, 영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헌사'라던 감독의 의도를 압축한 셈이다.

감독이 영화의 제작 의도에서도 밝혔듯이, <국제시장>은 힘든 시기를 살아온 기성 세대를 위로하려는 모습이 강하게 드러난다. 시기별로 과거의 향수를 아련하게 자극하는 소재를 배치하면서, 적절히 유머 코드를 가미한 것이 영화의 매력으로 분석된다.

영화에서 그려낸 '역사적 사건'마다 국가의 흔적이 사라진 것도 특이한 점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과 베트남 전, 파독 광부까지, 마치 무언가에 희석된 듯 흐릿해진 기억의 파편 같은 느낌이다. 자기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덕수의 '기념사진'은, 영화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조명하면서도 역사적 배경을 전혀 들추지 않는 것과 묘하게 닮았다.

<국제시장> 속 장면들은 역사의 몇 사건을 부분적으로 선택해 스크린에 펼쳐낸다. 민주화 과정의 치열했던 기억은 물론이고, 덕수가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고스란히 증발한 상태다. 영화를 보고 숨 가쁜 삶을 살아야만 했던 개인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국제시장>을 과거 역사의 정당함으로 인식하는 보수 진영의 사고에 동의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만 영화 <국제시장>이 아쉬운 이유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독일 파병의 현장에서 온갖 고난을 겪는다. ⓒ CJ 엔터테인먼트


어린 시절 덕수는 주한 미군에게 "기브 미 쪼꼬레또"를 외쳐 얻은 초콜릿을 동생에게 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동네 형들에게 발길질을 당하는데, 이 와중에 어른들은 모두 '이승만 대통령의 대국민 방송'을 듣느라 그를 지켜주지 못한다. 덕수의 생존을 위한 노력은 흥남 부두 철수에서부터 독일과 베트남으로 장소를 옮기며 연결된다. 그리고 아내에게 쓴 편지에 "이 고생을 자식들이 아닌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고 덕수는 말한다.

<국제시장>은 덕수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척박한 시절을 극복한 많은 기성세대의 노력을 그려내고 이를 치켜세운다. 안타까운 점은 그 '고생'이 어떤 이유로 발생했는가에 대해선 침묵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성찰'이 제외된다면, '위로'의 기능에만 머무를 뿐이다.

영화가 젊은 세대를 그려내는 방식도 의아하다. 덕수의 막내 여동생 끝순이(김슬기 분)가 시종일관 철없는 행동으로 오빠의 속을 썩이는 것과, 노년이 된 덕수의 장성한 자녀들이 손주를 맡기고 자기들끼리 해외 여행을 떠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줄거리가 진행되는 동안 대부분의 젊은이는 '이기적인 골치덩어리'로 묘사되고, 고생한 덕수를 남겨두고 '혜택만 챙기는' 속물로 그려진다. 만약 영화가 덕수를 위로하는 방식이 '죽은 아버지의 토닥임'이 아니라 '자녀들이 내미는 손길'이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이마저도, 영화 속 나이 든 덕수가 쉽게 역정을 내는 성격이기에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국제시장>이 천만 관객의 반열에 오른 다른 영화에 비해 무게감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는 결국 영화의 완성도 문제로 귀결된다. 가벼운 관점으로 역사를 재구성한 영화이기에, 정치권과 보수 언론이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려 했던 것도 어색한 시도로 기억될 것 같다. 젊은 세대와의 소통, 자성의 목소리를 생략한 보수 진영의 호들갑이 '정신 승리'라는 비판에 부딪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국제시장 근현대사 기성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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