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게임의 아버지' 랄프 베어를 기리며

지인의 시선으로 본 진정한 혁신가 랄프 베어, 그 삶이 창업과 혁신계에 주는 교훈

등록 2015.01.05 14:41수정 2015.01.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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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평생 멘토이자, 남편이 태어나기 전부터 남편의 가족과 친분이 있었던 랄프베어(1922-2014)가 '비디오게임의 아버지 향년 92세로 지다'라는 밋밋한 부고 기사만 잔뜩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원래는 시아버지의 사업 파트너로 시작된 친분이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의 스폰서, 멘토, 친구 같은 관계로 발전했다. 우리 부부는 그다지 멀지 않은 미국 뉴햄프셔 주 경계에 사는 랄프를 약 2년에 한번 꼴로 찾아 갔다.

지난 11월 6일 방문은 좀 남달랐다. 그 전부터 남편이 "랄프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니 크리스마스 연휴가 오기 전에 방문해야겠다"며 시아버지와 시아주버니까지 설득했다. 딱 한 달이 지난 2014년 12월 6일 영면했으니 남편과 랄프가 가진 이유모를 연결은 경외감이 드는 수준이다.

나도 특이한 경험을 했는데, 내가 운영하는 창업 관련 블로그 <비플>에 세 번째 주인공으로 모셨던 지난해 12월 1일 수지 김 라일리씨와의 대화 중 문득 공통적으로 랄프에 대한 경의를 발견했고, 그렇게 그녀의 기사를 정리하던 중 랄프가 떠났다. 그래서 예기치 않게 수지씨 인터뷰가 랄프에 대한 헌정 기사가 됐다.

연말을 맞아 지하실 창고는 물론 컴퓨터를 정리하면서 눈에 띈 랄프와 관련한 것들을 따로 전자 폴더 및 종이 상자에 보관하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랄프와 스친 기억이 많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7년 전 결혼식 때 선물받은 커튼 한 장이 (선물 고르는 내 미숙함으로 두 짝이어야 완성되는데 한짝만 주문 해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덩그러니 접혀있었다. "선물 잘 도착했냐"고 이메일로 확인까지 했는데. 독일 출신의 알뜰한 성격의 랄프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얹짢아 할까... 한편으론 또, 이렇게 예쁜 실크 커튼 두 짝이 다 있어 사용했다면, 물건 아낄 줄 모르는 우리가 2~3년 사용하고 버렸겠지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첫 아이가 태어나 방문했을 때는, 88세의 고령에도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잰걸음으로 서재와 지하 실험실을 오가며 여전히 장난감 관련 개발 프로젝트에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었다. 당신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이름이 같다며 증손자뻘 되는 레오에게 주신 장난감 피아노를 이제는 둘째가 매일같이 띵똥댄다. 둘째가 싫증이 나면 손때가 묻긴 했지만 미국에선 이젠 흔치않은 이 미국산 장난감을 '랄프 베어 보관함'에 모셔놔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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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구순잔치에서 ⓒ 이미현


그러고 보니, 둘째가 태어나기 직전인 지난 2012년 3월엔 랄프 베어의 구순 생신 잔치가 있었다. '비디오게임의 창시자'가 90세까지 건재해 있다는 것을 세상은 잘 모르는 지 기자들이 몰려오거나 팬들이 줄을 서서 사인을 받는 일은 없었다. (아마, 다들 Xbox이든 PS3든 자기 콘솔 앞에서 시간을 죽치고 있었으리라) 그저 90세 노인이라면 쌓았을 만한 숫자의 지인들을 초대한 조촐한 파티였다. 사실 우리나라의 왠만한 칠순 잔치보다 손님이 적었으니... 참 아기자기한 구순이었다. 잔치의 최고령자가 가장 어린 손님 레오에게 장식 풍선을 손수 잘라 건네주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상기하면, 랄프베어는 비디오 게임 시스템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발명가다. 그의 지하에서 직접 만져보고 조작해보던 초대 핑퐁 게임은 이제 워싱턴DC의 스미소니안 박물관의 랄프 베어 섹션에 가야 볼 수 있다. 2006년에는 과학 기술 부문 대통령 훈장도 받았다. 아마, 내 세대의 한국 사람이라면 비디오 게임 한 번쯤 안 해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 흔하던 아케이드 오락실도 랄프의 발명을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탄생한 장르이자, 인류가 손바닥 안에 쥘 수 있는 오락 거리로 자리 잡은 것이다. 발명가 랄프에 관한 것들은 한글로도 잘 정리된 글이 있으니 언급만 하고 반복하진 않겠다.

구순 잔치에서 기념품으로 얻어온 랄프 베어의 책 뒤표지에 '110억 불 (11조 원) 규모'라고 적힌 전 세계 비디오 게임 산업은, 2013년 기준으로 1000억 불(100조 원)대로 성장했으니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미치는 파급력은 정말 엄청나다. 그렇다고 해서 랄프가 수 백억 대 부자가 되었을까? 빌게이츠나, 잡스처럼 하이테크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정확한 자산 규모는 모르지만, 랄프가 자신의 발명을 돈 버는 기계로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계속해서 특허를 번복 하는 방식으로 연장해 대기업들로부터 로열티를 따 먹는 짓도 하지 않았다. 그의 특허가 가진 파장을 생각하면 어떤 식으로든 로열티 수입을 얻었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가 말년까지 지속적으로 컨설턴트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분야도 사실은 장난감 쪽이었다. 요즘의 비디오 게임 산업은 자기와 거리가 멀다고 판단해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랄프 베어와 한국이 엮인' 재밌는 일화가 있다(이 이야기가 알려지면 자긍심 높은 우리 비디오 게임 업계가 자존심 상해할까 걱정은 되지만 이 계기로 좋은 교훈 삼길 바랄 뿐이다). 랄프가 우리 부부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을 소개한다. 요점인 즉슨, 독일의 한 장난감, 비디오게임 콘퍼런스에서 만난 한국 게임 업체가 어떤 식으로든 자기네 회사와 랄프의 명성을 연결 짓기위해, 요즘 비디오 게임에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랄프에게 자기네 휴대용 게임 장치를 무작정 소포로 부쳐왔다는 것. 도저히 그 기기를 작업실에 놀리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그래도 당신보다 요즘 비디오 게임에 더 가깝다고 판단해서) 모바일 UI 프로그래머이자, 한국 부인을 둔 남편에게 이 기계를 덥석 안겨줬다. 우린 물론 열어보기만 하고 고이 창고에 모셔놨다. 우린 그 당시 새로 나온 PS3 게임을 즐기느라 바쁜 터였다.

사실 이 사건은 랄프의 인격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자신의 초기 발명으로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거기에 안주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의 발명이 결과적으로 거대한 산업을 탄생시키긴 했지만 오히려 비디오 게임의 잔혹성으로 인한 폐악을 걱정했고, 유명세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발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추구하는데 집중했다. 비디오 게임 발명 이후 그의 행보는 주로 장난감 업계 발자취로 남겨져 있다. 보드게임 업계의 멘토인 시아버지와 만나게 된 것도 아마 두 분야의 겹치는 인연 때문이리라. 자신의 손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랄프의 열정과 끊임없는 호기심이 아마 그를 90이 넘도록 활동적이고 젊어 보이게 했으리라.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랄프의 명성으로부터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누군지 명시할 수는 없지만, 랄프와 사진 한 장 함께 찍는 것 이상을 바란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랄프는 부인 디나를 떠나보내고 적적한 시간이 많았으므로 누가 미리 연락만 하면 자기 집을 방문해 지하실 랩을 보여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랄프가 떠나기 한 달 전의 방문 이전부터, 남편은 랄프 및 그 자녀들과 종종 전화 통화를 하곤 했다. 식탁에서 일하고 있노라면 위층 사무 공간에서 남편이 평소보다 격한 목소리로 랄프 가족에게 훈계조로 뭔가를 떠들어댔다. 무슨 일이냐고 걱정돼 물으니 (구순 먹은 할아버지랑 의가 상한 일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역시) 랄프가 말년이 다가오니 별의별 사람들이 마구 방문해, 이런 저런 자잘한 물품을 반강제로 또는 은근슬쩍 기증받는 식으로 집어가더라는 것이다. 비디오 게임의 창시자의 물품이니 언젠가 메모지 한 장이라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못된 심보들이 발동된 것이다. 설상 관련 업계에서 오랫동안 알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병문안을 핑계로 노인의 서재에서 전리품을 노리는 것이 너무나도 괘씸했다.

스미소니안 기증은 별개로 치더라도 그 유명한 노먼락웰의 원화를 락웰 뮤지엄에 무상 기증하는 등 (작품당 수억 원대) 랄프 베어에게는 퍼주는 품성이 없지 않아 있기에 남편의 걱정은 하늘을 찔렀다. 역시 발명가인 남편과 시아버지가 전화 통화로, 어떻게 이런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지, 앞으로 랄프의 유품을 어떻게 관리해야할 지 아주 '엄한 조언'을 하느라고 목소리가 커진 것이었다. 랄프와 자녀들은 그러한 애정어린 조언을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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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워즈니악은 '나를 비롯한 우리모두에게 랄프가 선사한 것들에 너무나 감사한다'는 감사의말을 전했다. ⓒ 이미현


번외 이야기지만, 랄프 베어가 40여 년 넘게 산 뉴햄프셔 맨체스터 동네에는 유명 할리우드 코미디언 아담 스탠들러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랄프는 "허, 난 백날 봐도 그 놈이 웃긴지 하나도 모르겠던데"라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씩 웃으며 답하곤 했다. 어찌 보면 한 세기 동안 인류의 유머 감각이 너무나 멀리 변해 있어서 그런 것일 수 있지만, 난센스의 털털한 랄프 할아버지에게는 아담 스탠들러의 수백만 불 짜리 몸값이나 과장된 연기보다 멋쩍은 여드름 투성이의 십대 꼬맹이가 더 기억에 남았으리라.

어떻게 보면 우리 부부에게 랄프 베어는 그런 존재다. 남들은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니, 대부이니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 멋진 인간이자 유머 넘치는 아저씨였고, 멘토였다. 우리 부부는 랄프의 업적 수준은 아니더라도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고자 창업의 길을 조용히 걷고 있다.

하지만 랄프가 남겨준 혁신에 대한 겸허하고 순수한 정신은 평생 우리 안에 남고 우리 아이들 안에서 숨 쉴 것이다.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의 기술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지는 과학 기술과 자본 만능주의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기술 뒤에 숨어있는 따뜻한 사람 내음을 찾기 쉽지 않은데 랄프 베어가 우리 가족의 삶 속에 있었다는 자체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영광의 'DNA'이다.

지난해 12월 7일, 평생의 멘토를 잃은 상실감이 얼마나 클까 내심 걱정하며 기분을 살피니 남편은 "오늘부터는 '랄프가 없는 새로운 삶'이야"라고 의미 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런 그의 무덤덤한 어깨를 보듬어 주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글쓴이가 운영하는 창업관련 블로그 비플(bpplblog.com)에도 게재됐습니다.
#랄프베어 #발명가 #비디오게임 #창업 #기술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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