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 정혼녀 민갑완, 강제 결혼 협박까지 받았다?

[서평]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

등록 2014.08.13 14:11수정 2014.08.1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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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 책표지. ⓒ 지식공작소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지식공작소 펴냄)는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의 비로 간택되었으나 평생을 독신, 즉 영친왕의 정혼녀로 살았던 여인 민갑완(1897~1968년)의 회고록이다.

민영돈(1863~1918년)의 장녀로 태어난 민갑완은 11세에 황태자 이은의 비로 간택된다. 150명 중에서 간택되었다고 한다. 민갑완은 공교롭게도 영친왕과 같은 날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강제 파혼 당한 후 평생을 외롭고 힘들게 살았던 비운의 여인이다.


영친왕 이은은 고종이 아관파천(1896~1897년) 후 늦게 본 아들이다. 순조가 뒤를 이었으나 후사가 없어 이은이 황태자가 된 것. 일제는 '태자에게 신문물을 접하게 하고 신식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는 명목을 앞세워 일본 유학을 강행한다.

그런데 이는 자신들의 목적을 합리화시키려는 명목에 불과했다. 식민지의 태자를 볼모로 끌고 가 억류시키는 한편, 일본의 군사교육을 받게 하고, 일본의 문명과 문화, 풍습 등에 젖게 하는 것 즉, '조선의 태자를 일본화 시키는 것이 우선 목적이었다.

영친왕이 일본으로 유학 갔을 당시 이미 태자비로 간택 받은 민갑완은 약혼단자와 결혼을 약속하는 신물까지 받은 상태로 '택일 후 가례'만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 황실의 뜻을 묵살, 이들의 약혼을 강제로 파혼시킨다. 그런 후 영친왕 이은을 일본 황족의 딸인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 여사)와 정략결혼 시키고 만다.

무오년 정월 초사흗날 밤 열두시로서 나의 운명의 종막은 내려진 셈이었다. 날이 밝자 혜당댁에서 전갈이 왔다. 모두들 모이셨는데 아버님도 들어오시라는 거였다.(…)나는 벌써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조용한 방으로 모시고는 그 내용을 여쭤보았으나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면서 내용을 숨기려 드셨다. 내가 괴로워 할 것을 염려하고 혼자만 속을 썩이려는 자애로운 아버님의 뜻이었으나 이미 눈치를 알아채고는 꼬치꼬치 캐서 여쭙자 아버님께서는 할 수가 없으셨던지 괴로운 표정으로 입을 떼셨다.

"서약서를 쓰고 나왔다. 상(上)의 대리로 시종부관이 가지고 나왔다고 하면서 너의 결혼에 관한 서약서를 쓰라는 거야. '신의 여식을 금년 내로 타문에 출가시키지 않으면 부녀가 중죄를 받아도 좋다'는 것을 맹세한다는 서약서지. 상의 뜻이라니 내가 어찌 거역을 할 수 있겠느냐."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에서)


이는 민갑완이 간택을 받은 후 10년, 그 어느 날의 회상이다. 글이 시작되는 '무오년 정월 초사흗날'은 친일 세력들이 강제로 파혼, 10년 전에 받은 약혼단자와 신물인 쌍가락지를 '결국' 뺏어내고 만 날이다.

'결국'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민갑완으로부터 혼례 약속의 정표인 신물을 어떻게든지 뺏어내고자 날이면 날마다 수많은 궁인들과 친일 대신들이 민영돈의 집을 드나들며 괴롭힌 끝에 목적을 달성하고야 마는 정황이 이 책 몇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자로 이미 지나간 일을 읽으면서도 '어찌 그리 모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여하간 신물 회수에 성공한 그들은 그 다음날 아버지 민영돈을 불러 '신의 여식을 금년 내로 타문에 출가시키지 않으면 부녀가 중죄를 받아도 좋다'는 서약서를 받아내고야 만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들은 그로부터 몇 년 동안 민갑완의 주변을 맴돌며 어떻게든지 다른 남자와 결혼시키려는 목적의 갖은 공작을 벌인다.

조선 황실의 뜻과 전혀 상관없이 강제 파혼 당한 것도 억울한데, 올해 안에 딸을 결혼시키지 않으면 둘 다 큰 벌을 받겠다는 기상천외한 서약서에 사인을 해야만 했던 민갑완의 아버지 민영돈은 그러나 그 몇 달 후 결국 속절없이 죽고 만다. 민갑완에게 닥친 불행의 충격으로 민갑완이 파혼 당한 몇 달 후 죽은 외할머니의 뒤를 이은 죽음이었다. 줄초상이 난 것이다.

기다리는 세월은 오지 않아도 기다리지 않는 날짜는 쉬 다가와서 벌써 시월이 되었다. 앞으로 서너 달 안에 나를 치워야 하는데 나는 가려하지 않고 아버지 역시 나를 보낼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다. 그러고 보면 사필귀정이라고 별 도리 없이 우리 부녀는 중죄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하면서 혼자 조바심을 하시는 거였다. 그러나 일이 그뿐이라면 그래도 나으련만 정권다툼에 혈안이 되고 아부에 눈이 먼 친일파들은 나를 일본에다 팔아먹지 못하여 애를 태웠다. 삼만 원을 주겠으니 일본 황족의 아들과 결혼을 시키라느니, 일본 후작과 말을 해주겠다느니, 그렇게만 한다면 좋은 벼슬을 줄 것이며, 또 그로 말미암아 일본과 한국 양국 간의 우애도 더 두터워지며 친근해진다고  감언이설을 구역질이 나도록 하였다. 이러니 아버님의 심정은 얼마나 괴로우셨을 것이며 얼마나 마음 아파 하셨을까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에서)

'황태자비로 간택 받지 않았더라면 총명하고 호방한 소녀 민갑완은 어떤 여인으로 살았을까?', '강제 파혼 당하지 않았다면?' 

흔히들 지나간 역사에 '~~더라면'과 같은 가정은 부질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민갑완의 회고를 읽어나가는 동안 되풀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민갑완은 아버지 민영돈이 민석호의 양자가 된 이야기부터 '병판 아저씨'라 부르며 따르던 민영환이 을사늑약 뒤 자결한 일, 그 몇 년 후 황태자비로 간택되던 날의 상황과 절차, 일본으로 끌려간 영친왕 이야기, 강제파혼 과정과 그로 인한 집안의 몰락, 상해에서의 생활, 독립운동가인 김규식과의 만남, 부산에서의 생활과 회고록을 내기까지의 생활 등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안타까움과 함께 가슴에 싸르르한 아픔이 느껴지는 것을 어쩌랴. 

간택 그 후 10년 만에 강제 파혼 당한 민갑완은 결혼하지 않고 동생 부부와 살다가 71세인 1968년에 후두암으로 죽는다.

당시, 일제와 친일파들이 위 민갑완의 회고처럼 다른 남자와 어떻게든 결혼을 하게 함으로써 영친왕과의 인연을 끊어버리려고 온갖 방법으로 회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남자들이 청혼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도 그중 한사람. 그러나 그녀 스스로 '왕이 될 분하고 정혼했으니 파혼 당했어도 다른 사람이랑 결혼 못한다'라는 신념으로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이 책은 <백년 한>(문선각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1962년에 출간된 책을 52년 만에 재발간한 것. 당시 민갑완의 <백년 한>은 같은 제목의 영화(주연:도금봉)로 제작되었고, 많은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 대본료도 받지 못하게 되는 등, 말년에는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이미 지나간 일임에도 안타까움만 들뿐이다.

민갑완처럼 희생된 또 한명의 여인 이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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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책표지. ⓒ 지식공작소

영친왕을 가운데로 두고 민갑완처럼 희생된 여인이 또 있다. 우리에게 이방자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영친왕비 '나시모토 마사코'다. 민갑완의 회고록을 출간한 지식공작소는 이방자 여사의 생전 구술을 바탕으로 강용자씨가 쓴 글을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란 제목으로 출간했었다.

덧붙이면, 민갑완이 죽는 날까지 한집에서 함께 살았던, 더러는 한 침대를 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조카에 의하면, 민갑완은 영친왕이나 이방자 여사에 대해 단 한 번도 원망을 비추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에 이런 민갑완에 대한 이방자 여사의 마음이 실려 있다. 꼭 함께 읽으면 좋을 책으로 추천한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를 책으로 엮은 사람은 김정희씨. 민갑완이 회고록 발간 뒤 71살로 타계하기까지의 삶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김정희씨가 취재하여 이 책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 뒷부분에 수록했다. 김정희씨의 그 후 이야기 덕분에 민갑완의 회고록이 완성되는 느낌이다.

김정희씨의 그 후 이야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한 일본인(오구리 아키라)이 우연히 민갑완의 <백년 한>에 관심을 가졌고, 번역하여 일본에 알리고자 한국어를 배우는 등 지난 10년 동안 노력을 해왔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일제에 의해 영친왕과 이방자와 함께 희생된 여인 민갑완의 이야기가 일본에서 출간, 양심 있는 일본인들의 눈에 띄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덧붙이는 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정혼녀>(민갑완) |지식공작소 | 2014.07.10 |13500원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강용자 씀)(김정희 엮음) | 지식공작소 | 2013.08.01 |13500원

영친왕의 정혼녀 -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민갑완 지음,
지식공작소, 2014


#민갑완 #영친왕 #이방자 #민영돈 #백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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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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