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지하 만인지상'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나

[서평]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등록 2013.10.28 10:27수정 2013.10.29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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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두 사람이 같이 못 박힌 거 알고 있지? 둘 다 도둑질에 살인을 범한 중죄인이었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잘못을 뉘우쳐서 구원을 받았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정의를 행한 사람에게 과거의 잘못을 가지고 그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옳지 않아. 안 그런가?" -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에서

가톨릭 대학의 한 학생이 '김재규가 박통과 똑같은 인물인데 유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10·26사건을 일으켰을 리가 있느냐'는 의견에 대한 함세웅 신부의 말이다. 그의 의견은 계속된다.


"실제로 자네들이나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실행할 용기가 있었을까? (중략) 그가 박정희에 의해서 희생될 수도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구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런 경우에 박정희를 쏜다는 행위는 일종의 정당방위라고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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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평전 표지 김재규는 간경화를 앓고 있어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몇시간씩 진행되는 군법회의 재판에서 논리적인 발언을 했다고 한다. ⓒ 시사인북

10·26과 관련한 서적들이 꽤 있다. 대부분 이야기의 핵심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후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의 의견을 따라 선택한 육본 대신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이동했다면 시국은 어떻게 변해갔을까 하는 데 있다. 순간의 선택으로 김재규가 어설픈 쿠데타의 주역이 되었다는 흥미 위주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달 25일 출간된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다르다. 그간 묻혀 있던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에게 천착한다. 독자들에게 33년 만에 그들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일단 이 책에서는 그들, 10·26 직후 군인들에 의한 재판으로 사형된 김재규,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등이 주인공이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는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있던 김재규, 그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다. 더구나 김재규는 박정희와 육사 동기면서 한 고향 선후배지간이다. 누가 봐도 김재규의 거사는 석연치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서열 다툼, 박정희 대통령의 자신에 대한 저평가 등에 감정을 품은 우발적 살인 사건'이라는 당시 세간의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들이 깊이 생각하기에는 그 사건의 시작과 끝이 너무 돌발적이었고 짧았으며 갑작스러웠다.

저자는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현장을 잠행하고 와서 기억하는 차지철과 박정희의 대화를 인용한다.

"만약 4·19 때처럼 서울에서 데모가 크게 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어. 대통령인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는데 누가 나를 총살시키겠어."

대통령의 말을 경호실장이 받는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쏴 죽이고도 까딱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한 100만 명이나 200만 명 처치하는 게 무슨 문제겠습니까? 각하께 불충하고 빨갱이들하고 똑같은 소리나 하는 놈들은 이 차지철이가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습니다."

이들의 대화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김재규가 그들과 한통속이었다면, 1980년 일어난 5·18 광주항쟁은 더욱 큰 규모로 부마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저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민주인사들이 주목하는 대목이다.

그의 부하 박선호는 의전 담당이다. 해병대 출신 장교다운 임무를 수행하고 싶었으나 그의 임무는 불행하게도 대통령의 사적 유희를 위한 이른바 '소행사'와 '대행사'를 준비하는 일이다. 행사 준비로 연예인을 데리고 가기 위해 만났던 감독으로부터 '채홍사'라는 말까지 듣고 자괴감에 그만두고 싶었지만, 존경하는 김재규를 떠날 수 없어서 또 네 아이의 아버지로서 생계를 위해서라도 사표를 던질 수 없었다.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은 '군에 있을 때나 군복을 벗고 공직에 있을 때나 늘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자세로 일을 처리하는 존경스러운 상관' 김재규를 잠시도 떠날 수 없었다. 이들 둘은 거사 당일 바로 직전에 명령을 받고서도 지체없이 김재규를 엄호한다.

이야기 속 김재규는 10·26 거사의 이유를 세 가지 들고 있다. 첫째,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유신체제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즉, 박정희와 차지철의 국민에 대한 태도에 회의를 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둘째, 박정희는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관립요정인 이른바, '궁정동 안가'를 만들어 놓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해 사흘이 멀다 하고 젊은 여성 연예인들을 성적으로 유린했다. 그 수는 도합 이백여 명이 넘는다. 셋째, 자식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처신에 대해 대통령은 지나치게 싸고돌았다.

책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김재규 자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이 유신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니 권력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유신의 심장을 제거하고 난 후를 위한 어떤 시나리오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국민이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고, 평소 인권문제로 박정희에게 비판적이었던 미국도 자신의 행위를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김재규의 예상은 빗나갔다. 갑작스러운 대통령 서거에 국민들은 애도를 표했고, 미국은 방관하고 있었으며,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특별 사면이 이루어지는 등 새 세상이 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전두환과 군 사조직 하나회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권력을 그대로 인계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육군사관학교를 추동하여 5·16 지지시위를 성사시킴으로써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던 전두환은 그로부터 18년 후 10·26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이 되면서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김재규와 달리 전두환은 정권을 잡기 위해 애초부터 하나회와 같은 군내 사조직을 만들어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12사태 직후 전두환은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나 "부패를 일소한 뒤 병영에 복귀하겠다. 나를 믿으라. 우리가 하는 일을 지켜보라. 언젠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5·16군사쿠데타 직후 김종필이 당시 주한 유엔군사령관이던 카터 B. 매그루더 장군에게 한 말과 같다.

전두환의 12·12사태는 박정희의 5·16쿠데타의 매뉴얼을 그대로 사용한다. 김재규의 민주주의는 길을 잃고,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 전두환이 유신의 손과 발이 되어 유신체제를 연장하며 역사를 후퇴시키고 말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 김재규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자신이 모시던 각하 박정희를 저격했다. 유신정권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1972년 3군단장 시절 유신헌법을 꼼꼼히 살펴보던 김재규는 '이 헌법은 국민을 위한 헌법이 아니라 대통령 개인을 위한 헌법'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는 1974년 건설교통부 장관 취임 때 대통령을 저격하고 자신도 자살할 생각이었다고도 했다.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인 소의(少義)를 버리고 대의(大義)를 따랐다고도 했다.

김재규의 거사로부터 정확히 70년 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있었다. 이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끝까지 저격의 정당성에 추호의 의심이나 후회의 맘을 품지 않았던 김재규의 최후 진술에서 느껴지는 진실성 때문인 듯하다. '김재규가 그토록 원했던 제4심, 즉 역사의 재판'이 시작되어야 할 이유다.

"스스로 나를 변호하라고 하면, '5·16도 10월 유신도 범법이 아니라면 자연히 10·26혁명도 범법이 아니다' 이렇게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투쟁한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10·26혁명은 의미 없는 혁명이 되고 맙니다."
덧붙이는 글 *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라는 단체를 맡고 있는 사람은 함세웅 신부라고 한다. 또 김재규는 충의공 김문기의 18대 손이기도 한데, 김문기는 단종복위 모의에 동참하여 군사동원을 맡았던 충신이라고 한다. 위패와 가묘가 사육신 공원에 모셔져 있다고.
*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문영심 씀, 시사IN북 펴냄, 2013년 10월, 368쪽, 1만5000원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김재규 평전

문영심 지음,
시사IN북, 2013


#김재규 #문영심 #박선호 #박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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