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친지들 잔소리에 시달린 당신이라면...

[서평] 최태섭의 <잉여사회>, 세대 담론의 한 획을 긋는 통찰 담았다

등록 2013.09.19 18:17수정 2013.09.1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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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사회>의 표지. ⓒ 웅진지식하우스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민족의 명절 한가위. 풍성한 추수를 자축하면서 조상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추석은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을 남길만큼 뜻깊은 연휴이자 전통적인 기념일이 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로 들어서고, 추석에 대한 느낌과 반응도 꽤 많이 달라지고 있다. 명절 전후로 인터넷의 게시판들은 '고속도로 위의 지옥같은 교통체증'과 '제사음식 준비 등 가사노동의 힘겨움'에 대한 푸념으로 뜨겁게 달구어진다. 거기서 그친다면 육체적인 불편함으로 끝날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더욱 야속하다. 간만에 모인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들은 잔소리 때문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쉽게 들을 수 있다.


"성적은 어때? 이번에 들어간 대학교가 어디라고?"
"올해 몇살이랬지? 취직은 했니?"
"만나는 사람은 있고?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신상을 물으며 날아오는 질문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게시판에는 '명절 오지랖 대처법'이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잔소리 섞인 질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제시되곤 하지만, 도무지 무어라고 선뜻 대답을 하기조차 힘들다. 그저 억지웃음을 지으며 적당히 얼버무리는 사람이 아마도 많을 것이다. 많은 양의 댓글로 작성되는, 사람들의 눈물섞인 이모티콘만 보아도 충분히 그런 유추가 가능하다.

이런 질문공세에 시달리고나면, 아마도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하고. 그리고 또 누군가는 '잉여'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스스로에게 그런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쓴웃음을 짓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대가 낳은 잉여들의 보고서, <잉여사회>

문화비평가 최태섭씨가 쓴 <잉여사회>는 '잉여'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았다. 세대 담론으로서의 '잉여학개론'이자 현 시대의 한국에서 잉여가 살아가는 방식을 다룬, 가히 '잉여 생태계' 보고서라 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잉여라는 개념의 유래와 그것이 퍼져나가게 된 시점·과정도 적었으며, 인문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것이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잉여'라는 단어는 곧 '남아도는' 것을 지칭하는 의미로,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되는 상태를 일컫는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20~30대를 비롯한 청년 세대가 자의나 타의에 의해서 잉여의 정체성을 갖게되었다. 게임이나 병맛 웹툰·애니메이션 등 그들이 즐기는 문화는 주류로 평가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자립이 힘겨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을 토대로 '삼포세대'라 불리며 출산은 커녕 연애와 결혼마저도 포기한 채로 살아간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젊은이들은 '열정의 고갈'을 비판받는 상황이고, 정치의 세계에서도 한때 낮은 투표율로 '20대 개새끼론'이 거론될만큼 타자화 되어있다. 하지만 정작 선거에서 청년 정치인이나 청년정당은 그 중요성을 크게 인정받지 못하면서 기성세대의 들러리로 쓰일 뿐이다. 이보다 더 '잉여'스러울 수 없는 것이다.

<잉여사회>는 "우리 시대의 잉여는 풍요가 아니라 양극화로 대변되는 격차와 집중의 산물이고, 무너지고 있는 중간층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언급한다. "좌절한 이상주의자이기는 커녕 이상이라는 것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것"이기에 '패배하고 있는 현실'이 공통적이긴 하지만 그 기반이 엘리트주의를 품은 '루저 컬쳐'와도 다르다고 말한다.

"잉여는 이 싸움에서 탈락한 자들, 그러나 결코 전쟁터를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다." (본문 22쪽)

잉여 발생, 존재의 위상은 '좀비와 유령'

수가 불어난 비정규직과 실업자 등 자본주의 체제에서 '잉여'는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비록 잉여의 양산은 뜻한 바는 아닐지라도,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라고 <잉여사회>는 지적한다.

"복잡한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무엇이 잉여가 될 것인지는 다소 명확하다. 그것이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효율성'을 갖는가의 여부다. 비효율은 확실한 것이 거의 없는 우리 시대에서 명확한 악으로 자리 잡았다.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고, 주주들의 몫을 허공에 날려버리는 모든 비효율은 정의로운 구조조정을 통해 타파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공공기관을 민영화하고, 경영자나 기관장을 갈아치우고, 인원을 감축하고, 다시 장을 교체하고, 다시 또 감축하고, 또 갈아치우고, 한 번 더 감축한 끝에 간단한 사고에도 사람이 없어 대처하지 못해 인명 피해를 내고야 마는 효율적인 조직들이 탄생한다. 사고가 난 후에는? 아주 놀랍게도 사고의 책임을 물어 담당자를 교체한다." (본문 82~83쪽)

저자는 잉여의 발생요인이 결핍과 과잉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라고 말한다. 그 예로 아프리카처럼 지나치게 빈곤이 문제가 되어 사람들이 고통받는 제3세계의 환경과, 과열된 스펙경쟁에 국민 대다수가 대학교를 졸업하는데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한국의 상황이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양쪽 모두 결핍과 과잉이 낳은 슬픈 현실이다.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잉여가 생산되고, 이와 같은 움직임은 점점 가속화된다. 1세계에서 부의 증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3세계에서는 빈곤이 증가하고 잉여가 늘어나는 것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잉여의 존재론적 위상을 '좀비와 유령'에 비유한다. 육체가 있지만 살아있거나 죽은 것도 아닌(빈곤에서 구제되지 않으나 최소한의 임금이 주어지는) 좀비와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기에 어둠(우리의 시선 바깥인 제3세계, 혹은 해고당한)으로 밀려난 유령 말이다.

잉여들의 자유공간, 사이버 스페이스... '일베'도 파생된 잉여

<잉여사회>는 "잉여들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게 드러나는 곳은 사이버 스페이스"라며, 온라인에서의 잉여 생태계를 분석한다. 2000년대 초반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으로 급속하게 확장된 가상현실에서, '아햏햏' 등의 유행어를 낳은 디시인사이드같은 인터넷 잉여문화의 원산지도 찾아볼 수 있다. 책 속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앞서 말한 사회적 배경에서 "인터넷은 돈 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놀이터이자 광장이었고 배설구이자 또 다른 '현실'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런 문화적 토양은 최근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터넷 유머사이트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병맛('병신스러운 맛'이라는 뜻으로, '매우 엽기적으로 웃기다'는 뜻) 웹툰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인터넷 논객이 출현했지만 더불어 욕설을 쓰는 악플러까지 생겨나는 악영향도 발생했는데, 그로부터 파생된 것 중 하나가 '일베'라는 가설은 상당히 흥미롭다.

민주화 운동이 그저 역사책 속의 이야기라고 인식하는 젊은 세대는 사회적으로 박탈과 불안을 앓고 있다. 민주주의마저 '주어진' 것일 뿐,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세대의 외침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선뜻 내키지 않는 흐름에 강요 당하는 상황에서 인터넷은 쉽게 뭉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이 공간에서는 나도 나름의 의미있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비뚤게도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 셈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나 마냥 마음을 놓고 이들을 비웃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들이 빠진 함정은 지금 우리도 함께 빠져 있는 함정이다. 일베가 아닌 모든 이들도 불안과 불만을 양손에 가득 쥐고 있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모두가 앓고 있는 '박탈감'이 일베의 자양분이 되었고 그 분출구와 해소방법이 비겁할 따름이라 문제인 것이지, 일베 자체가 괴물의 탄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기력과 초라한 느낌에 빠진 그대여, 거울을 보자

명절에 듣는 덕담 섞인 잔소리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기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잉여'라고 구분짓는 사람들을 이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유머사이트를 빙자한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가 그렇고, 매달 발간되는 잡지 <월간잉여>가 다루는 인물과 이야기도 그렇다. 온/오프라인을 불문하고 특정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들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RPG 게임에서 퀘스트를 풀고 경험치를 얻어내듯이 사회로의 진출을 위해 스펙을 쌓아가려고 노력하지만, 현실은 게임처럼 만만하지 않다. 도전했다가 한번 실패하여 미끄러지면, 다시 시도하는 일도 '게임 재시작' 버튼을 한번 클릭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힘겹고 답답한 노릇이다.

<잉여사회>는 흔한 자기계발서처럼 희망적인 말로 위안을 주지는 않는 대신, 애물단지 취급받는 젊은 세대의 현 주소를 냉철하게 풀어냈다. 읽는동안 비록 속이 쓰릴지라도, 날카로운 통찰로 꿰뚫어본 시대의 담론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거울 속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하기만 한다면, 여지껏 기한없이 앓고있는 이 절망은,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되물림(혹은 전염)되어 그 무게감만 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 20대의 문제는 몇 년 후에는 지금의 10대의 문제가 되어있을 것이고, 상황이 바람직하게 변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에서 20대를 맞이할 모든 이들의 문제가 될 것이다." 잉여사회가 된 한국, 이제는 스스로를 돌아볼 시기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잉여사회> (최태섭 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09. | 1만3000원)

잉여사회 -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최태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3


#잉여사회 #일베 #월간잉여 #잉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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