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정신 계승해서 수모 역사 되풀이 말아야!"

항일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 충혼제 거행

등록 2013.06.02 15:01수정 2013.06.0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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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병오창의(丙午倡義) 107주년이 되는 해이다. 병오창의는 을사늑약(1905) 이후 전라북도에서 최초로 일어난 항일 구국 투쟁의 거병이다. 1906년 6월 당시 창의는 면암 최익현을 망주로 추대했지만 사실상 총 지휘는 전 낙안군수 임병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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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 충혼제가 열리는 옥구초등학교 강당 ⓒ 조종안


제3회 의병의 날을 맞아 한말의 대표적인 항일의병장 임병찬(1851-1916) 선생과 의병 35인의 애국 충혼을 기리는 충혼제가 1일(토) 오전 10시 30분 군산시 옥구읍 옥구초등학교 강당에서 엄숙히 거행됐다.


군산문화원(원장 이복웅)이 주최하고 군산시(시장 문동신)가 후원한 충혼제는 문동신 시장을 비롯해 임정엽 완주군수, 김종식 군산시의회 부의장, 임향순 전국 임씨 중앙종친회장, 독립수훈자 후손들과 지역 주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충혼제 식전행사는 옥구 농악단의 풍물 한마당으로 문을 열었다. 이어 펼쳐진 군산문화예술단의 민요공연은 나라를 구하고자 항일 구국운동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참석한 참가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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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헌관 이복웅 원장(왼쪽)과 독축하는 이진원 부원장(오른쪽) ⓒ 조종안


남정근 전 군산문화원장 집례로 시작된 제1부 제례는 집례자의 충혼선언에 이어 순국선열에게 정성껏 끓인 우리의 전통 차를 올리는 헌공다례, 삼헌례(초헌례·아헌례·종헌례), 독축, 진혼풀이, 종제선언 순으로 차분하고 경건하게 진행됐다.

이복웅 원장은 인사말에서 "주말을 맞아 바쁘신 가운데에도 참석해주신 내외 귀빈과 시민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군산(옥구) 출신 항일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의 충절혼을 기리는 충혼제는 30만 군산시민의 화합과 단결은 물론 새만금 국제관광 기업도시로 발돋움을 기원하는 자리로 마련했다"고 말했다.

문동신 시장은 "제3회 국가기념일인 의병의 날에 개최되는 충혼제를 통해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일본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싸우신 선조들의 애국정신을 시민의 가슴에 깊이 새겨 후손에게 더욱 나은 미래를 물려주도록 다짐하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기원했다.


김종식 부의장은 "자연의 푸르름이 짙어가는 계절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항일 의병장 임병찬 선생과 의병 35인의 추모제를 뜻깊게 생각한다"며 "충혼제를 통해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확고한 역사관을 주지시킴은 물론 우국충절 정신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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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들에게 인사하는 임향순 전국 임씨 중앙종친회장 ⓒ 조종안


임향순 회장은 후손 인사에 앞서 2년 전 일본 대마도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느낀 소감을 소개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군대에 끌려갔다가 희생당한 한국의 젊은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는 것. 그는 "비석에 새겨진 이은상 시인의 애절한 시를 읽으며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았다"며 대마도에 갈 기회가 있으면 찾아볼 것을 권했다. 

임 회장은 "일본의 망발과 망언이 이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의병의 날을 맞아 개최한 충혼제는 우리에게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며 "우국, 호국 정신이 깃든 선조들의 항일정신을 가슴에 새기고 계승해서 다시는 이러한 수모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충혼제를 마치고 독립의사 고봉민 의병장 충혼비 제막식장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참석자들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투쟁하다가 목숨을 바친 인물(임병찬)의 생애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입을 모았다. 군산출신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며 자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항일의병들을 추모하는 자리에 학생들이 보이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임병찬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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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임병찬 선생 초상 ⓒ 조종안


임병찬(林炳瓚)은 본관이 평택(平澤), 호는 돈헌(遯軒)으로 1851년(철종 2년) 2월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광월마을에서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 한학을 통달했으며 16세 때 전주 향시에 급제하여 39세에 낙안(樂安) 군수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를 역임하면서 농정에 공을 세웠다.

을사늑약(1905)으로 국운이 기울자 1906년 2월 스승인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지의 의병 200여명을 인솔하고 담양으로 향하다가 왜적과 접전, 패하여 최익현과 함께 사로잡혀 대마도에 감금됐다. 최익현은 그곳에서 단식으로 자결하였고 임병찬은 2년 만에 돌아온다.

경술국치(1910) 직전 고종의 특명으로 종2품 가선대부가 되고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에 올라 지역을 돌며 항일 구국투쟁을 전개한다. 1914년 6월 왜경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한다. 그해 6월 임병찬은 거문도로 유배되어, 1916년 5월 23일(음) 단식을 감행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임병찬 #의병장 #충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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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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