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별빛과 풀꽃과 생명의 시인 이야기

[서평] '풀여치의 시인' 박남준 산문집 <스님, 메리크리스마스>

등록 2013.03.09 13:51수정 2013.03.0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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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걸어서도 당신을 볼 수 없어요.
새들은 돌아갈 집을 찾아 갈숲 새로 떠나는데
가고 오는 그 모두에 눈시울 붉혀가며
어둔 밤까지 비어가는 길이란 길을 서성거렸습니다.
이 길도 아닙니까, 당신께로 가는 걸음
차라리 세상의 길이란 길가에 나무가 되어 섰습니다.
                     -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1990년 첫 시집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를 내고, 이어서 낸 시집 <풀여치의 노래>로 '풀여치의 시인'의 된 박남준은 이번에 다섯 번째 산문집 <스님, 메리크리스마스>(한겨레 출판)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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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메리크리스마스> 박남준 산문집 ⓒ 한겨레출판


생각건대, 박남준 시인의 시는 얼마나 맑고 순정한가? 전주 모악산에 묻혀 세상의 적막을 알리고, 다시 지리산 자락 하동 악양의 동매마을로 옮겨와 생명의 개울에 마음을 닦고 있으니, 시인의 시가 눈물을 글썽이게 하고, 작고 힘없는 생명들에 대한 여린 사랑으로 투명하지 않을 수 없으리.

비록 그의 시가 시류에서 벗어나 있는 듯 보여도, 도리어 세상을 빗겨가는 듯한 이런 맑음이 1980년대를 거쳐 오면서 지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닦아주었고, 허망과 무기력의 90년대를 살아갈 힘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나무의 삶을 배워보고 싶었다

<스님, 메리크리스마스>는 그러한 시인의 심성이 따뜻하게 담겨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시인의 근황은 자연과 깊이 하나 되어 살아가는 시인의 일상에 있다. 책의 처음은 역시 지리산에서 맞이하는 사계절의 아름다움과 생동하는 생명의 기운을 담고 있는 시인의 집과 뜰 이야기로 시작한다.

겨울을 지나며, 가장 먼저 피어나 봄을 알리는 노란 복수초를 시인의 책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고, 또한 시인의 책을 '샛노란 햇살'로 물들이는 듯하다. 참 시인은 복수초를 사랑하는가보다. 시인이 살았던 모악산 집 뜰 안에서 함께 살던 인연인데, 지리산으로 오면서 함께 이사한 복수초를 나는 이 책 속에서 참 자주 만났다.


이처럼 시인의 안식처는 꽃이며, 아울러 풀이랑 나무와 새들이며 별빛이 모두 다 애틋한 위안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 시인의 시에는 사람 사는 풍경이 들어있지 않고, 사람 사는 냄새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인은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나무와 풀꽃과 작은 돌멩이와 냇가의 버들치가 싫은 내색도 없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위안이 되어 주었다고 답한다. 시인의 고백은 이어진다.

내 삶의 방식은 동물보다 식물의 삶에 가깝다. 많은 곳을 떠돌았다. 안주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붙박이인 나무의 삶을 배워보고 싶었다. 바람 부는 언덕 위 한 그루 나무, 나무의 삶으로 돌아가서 새들의 보금자리와 향기로운 열매를 주고, 언젠가는 베어지고 쓰러져 누군가의 언 몸을 덥혀주고 싶었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비롯된다. 꽃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새와 나와, 별과 나와, 소나무와 나와, 숟가락과 나와의 만남과 헤어짐과 그 인연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 시가 나왔다.(본문 10쪽)

책 속에 가득 핀 자연과 의인화

시인의 책 속에는 식물도감에서나 볼 수 있는 많은 꽃과 나무들이 나온다. 뜰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에 심은 파초, 집 뒤의 큰 바위 아래를 파서 만든 연못에 심은 어리연꽃과 애기수련, 뜰 앞의 모란, 작은 연잎처럼 생긴 깽깽이풀, 흰 해당화, 동자꽃, 각시원추리꽃, 지리터리풀, 노루오줌, 술패랭이꽃, 모싯대꽃, 노각나무꽃 등 한이 없다. 꽃들을 노란색, 보랏빛, 붉은색, 흰색 등 색깔별로 분류하면서 봄을 전해줄 때는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다.

이렇게 시인의 꽃 이름 알기는 알고 보니 내력이 있었다. 그건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 덕분이라 했다. 나무와 풀꽃 이름 알아맞히기 대회에 반 대표로 뽑혀 선생님과 한동안 학교 근처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공부를 했기 때문이라 하는데, 이는 시인들에게 얼마나 부러운 경험인가? '이름을 불러주어야 비로소 꽃이 되는' 존재들이 시인에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더욱이 시인의 풀꽃, 나무에 대한 사랑은 대상화되어 있지 않다. 그의 지극한 사랑은 모두 의인화되어 있음이 그 증거이다. 말을 걸고, 대화하고, 호소하고, 미안해하며, 마치 사람에게 대하듯 친근하다. 책 속에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이란 소제목을 보고, 혼자 사는 시인에게 다가온 어떤 여인의 얘기인 줄 알고 긴장했는데, 알고 보니, 산작약꽃를 부르는 의인화된 호칭이었다.

모악산을 떠나온 다음 해에 다시 가서 그녀 앞에 앉았다. 심심하지 않았니? 날 기다렸던 것이니? 같이 가자. 거긴 따뜻한 곳이야. 네가 살던 지리산 자락이니까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야. 파초나무 아래 그늘 택해 그녀의 자리를 만들었다. 산작약 꽃봉오리가 올라왔다. 그녀가 다시 내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 오랜만이야. 반가워. 고마워. 무려 20년이 흘렀는데 넌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얼굴 그대로구나. 난 이렇게 반백의 머릿결로 늙어버렸는데.(본문 43쪽)

대상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애틋한 마음이야말로 최고의 생태적인 상상력일 텐데, 그 마음이 생명평화 탁발순례에 나서게 하고,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순례에도 참여하여 4대강 사업을 반대하게 하였으며,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에 분노하게 하였겠다. 그러나 시인은 '생태는 무슨 생태, 차라리 생태탕이라면 간밤 세상의 팍팍한 일로 소주잔을 들이킨 술꾼들의 속풀이나마 시켜주기라도 하지'라고 눙치며 특별한 의미 부여를 꺼렸다.

사람 사는 풍경, 사람 사는 냄새

시인의 책 속엔 꽃과 나무와 별빛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도 함께 있었다. 그 사람들은 꽃처럼 나무처럼 별빛처럼 아름답다.

전주에 가면 시인이 자주 가는 식당이 이름도 이상한 '장뻘콩나물국밥집'인데, 이 집과 이어진 인연이 근 20년이 되었지만 한 번도 식당 주인아주머니는 시인에게 밥값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혼자 사는 가난한 시인'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동행 없이 혼자서는 돈이 있어도 갈 수 없는 밥집이 되었다는데, 그리고 그 밥집은 문을 닫았고, 아주머니는 암 투병 중이라는데, 그 마음의 향기들이 참 진하다.

시인이 사는 하동 지역 인근에 있는 생태환경운동 모임인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과 함께 '동네밴드'를 만든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들은 겨울 쯤 날을 잡아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열고 싶은데, 작은 잔치로 만들려는 이 장터에 가수를 초청했으면 좋겠다고 시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예상 경비는 200만 원에서 300만 원 정도인데, 초청하고 싶은 가수는 정태춘과 박은옥, 한영애나 강산에, 장사익, 이런 사람들이라니! 기가 막힌 시인이 제안하였다.

"차라리 밴드를 만들어보면 어때요?"

밴드를 만들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너 나 할 것 없이 곧바로 유쾌한 반란에 한바탕 웃음보를 터트리며 동의하고, 밴드 이름을 '동네밴드'라고 지었다. 그리고 2008년 12월에 '동네밴드 겨울 나들이' 공연을 하였으며, 시인 자신도 하모니카를 들고 함께 하였다. 그 공연을 본 초등학교들이 그룹사운드 '동네친구들'을 만들었고, 젊은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모여 '필'이라는 통기타 반을 만들기에 이르러, 작은 산골 마을에 악단이 3개나 결성되었다. 밴드 연습실은 18평으로 지어져 '풍악재'라는 이름을 매달았다 한다.

또한 시인의 책 속에는 화려한 옻칠을 하는 장인 성광명 이야기, 용산으로, 기륭전자로, 희망버스로, 온몸으로 뛰어다니며 온몸으로 시를 쓰는 송경동 시인 이야기, 시인은 무엇보다 시를 잘 써야 한다며 단단한 가르침을 던져준 시인 조태일 선생님 이야기, 아버지가 안 계신 시인이 명절에 세배 드리고 싶은 시인 정양 선생님 이야기가 따뜻한 시냇물처럼 '흐르고 흘러간다.'

나도 늘 어디 계신지 궁금한 전 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에게 보내는 시인의 편지글은 말간 눈물 같았다. 4대강 사업으로 꽉 막힌 화두에 쩔쩔매면서, 아무래도 자신의 기도는 지극한 간절함에 가 닿지 못한다고 자책하면서 수경 스님을 그리워한다.

화계사에 계실 때 하는 일 없는 사람이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없다며 보일러를 틀지 않은 냉랭한 방에 겨우 전기장판 한 장으로 겨울을 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제가 자는 따뜻한 구들장, 스님을 떠올리면 날마다 하는 일 없이 죄만 지으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본문 154쪽)

그래서 동치미 국수 생각나시면 슬쩍 건너오라고 한다. 고수나물도 있고, 애호박고지나물도 있고, 고들고들 잘 마른 무말랭이도 매콤달콤하게 무쳐서 한 단지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따뜻한 국밥 한 그릇도 공양하고 싶다고, 어디서든 건강하시고, 아, 그리고 너무 용맹정진하지 마시라고. '메리크리스마스입니다. 스님!'

강과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로구나

책의 뒤를 채우고 있는 것은 시인의 분노였다. 생명을 사랑하는 시인에게 분노는 도리어 생명이 아닌가? 아름답게 흘러가는 강물을 파헤치고 거대한 인공구조물을 만들어 물의 양과 흐름을 통제하겠다는 4대강 사업에 대해 시인은 무척이나 아파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고 한 드라마 대사처럼, 강이 아프니 내가 아프고, 중생이 아프니 보살이 아프다. 수만 년 세월이 만들어놓은 자연을 단 5년 만에 인공의 손길로 바꾸어버렸으니, 시인은 책의 말미를 붙잡고 거듭 거듭 분노를 표현했다.

그래서 시인은 또 다시 강물을 따라 걷는 100일 순례를 떠나는데, 강을 따라 걸으며 시인은 놀라운 체험을 한다. '강물이 맑게 흐르며 여울의 노래를 들려줄 때' 발걸음이 가볍고 즐겁다가, 낙동강 구미, 칠곡 무렵에선 실제로 기침과 열이 오르고 아프기 시작했고, 낙동강과 영산강을 다 지나도록 회복되지 않았던 몸이, 금강을 거슬러 오르고 남한강에 들어서자 나뭇잎의 새순처럼 생기가 돌았다 한다. 그러다가 한강에 들어서자 또다시 몸이 좋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강이 나와 둘이 아님을, 그 강물이 내 몸에 흐르는 핏줄이었음을 깨달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인다.

나는 지난 2007년 5월, 하동 악양면 취간림에서 정서운 종군위안부 할머니 추모와 평화의 탑 제막식에서 박남준 시인을 처음 만났다. 이원규 시인과 함께 시인의 집에 올라가 파라솔이 있는 탁자에 앉아, 박남준 시인이 살고 있는 집이 원래 무당이 살고 있었던 집이라며, 집 뒤에 있는 밤나무 꽃향기 때문에 못 견디고 가버려서 시인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입담 좋은 이원규 시인이 풀어낼 때도 박남준 시인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책을 읽으니 집 왼쪽에 있던 화단과 장독들이며, 집 뒤의 연못과 정자가 떠오른다. 그 때 머문 시간이 너무 짧아 깊고 따뜻하게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헤어질 때, 다음엔 편하게 와서 술도 한 잔 하고, 자고 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도 가보지 못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스님, 메리크리스마스>, 박남준, 한겨레출판, 2013년 2월 18일, 1만 2천 원

스님, 메리 크리스마스

박남준 지음,
한겨레출판, 2013


#복수초 #생명평화 #동네밴드 #수경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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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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