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나를 연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반 민지와의 마지막 데이트를 몇 시간 앞두고

등록 2013.03.03 14:44수정 2013.03.0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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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4일) 개학을 하루 앞둔 잉여의 시간을 멍하니 보내고 있다. 책도 손에 안 잡히고, 세수고 식사고 누가 좀 대신해주었으면 좋겠다. 하루쯤 그렇게 보낸들 뭐라고 할 사람도 없겠지만, 난 성격상 그런 낭만적 게으름을 견디지 못한다. 내 낭만은 활성화된 낭만이랄까? 우울과 권태와 침체는 내 언어가 아닌 것이다. 다행히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글을 끼적이는 것.


어제(2일) 아내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말다툼을 했다. 전화를 끊고도 화가 안 풀렸는데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후회감이 몰려왔다. 오늘 아침 멍 때리기의 주범이기도 하다. 나는 왜 성질머리가 고따윈가? 사실, 아내의 성질머리도 만만치는 않다. 아니, 나보다 한 수 위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오십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증상이 심해지고 있다. 다행히도 아내나 나나 마음에 앙금이 없다. 신나게 역정을 내다가도 돌아서면 곧 풀이 죽는다. 풀이 죽는 것은, 닭살 돋는 말일지 모르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욱 서로를 연민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나를 연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아내에게 쥐어 산다는 것을 아내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아내를 연민하는 이유? 그건 내가 아내에게 쥐어 사는 것과 그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여성들에게 욕을 먹을 말일지, 칭송을 들을 말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아내는 유독 몸과 마음이 섬약한 여자다. 아내는 남편인 나한데만 강하다. 난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아내가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쿨하게 생각하면 될 일이다. 헌데 가끔은 울화가 치미는 것이다.

'그동안 잘 해주었더니 날 너무 함부로 대하는 거 아냐?'

어제 우리 반 민지에게 전화가 왔다. 개학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난 뒤였다. 마지막 문자라는 말에 아이들도 울컥했는지 곧 답장 문자가 쇄도했다. 그 중에 민지의 문자는 없었다. 조금 섭섭한 마음이 일기도 했는데, 전화를 한 것이다.

"어, 우리 민지구나? 잘 지냈니?"
"예. 선생님은 요?"


"응. 나 지금 산에서 내려가는 중이야. 참 내일 너 기숙사 입소해야겠구나?"
"예.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그래? 무슨 일 있니?"
"내일 오후 6시까지 기숙사 입소하라고 했는데 3시까지 가면 안 될까요?"

민지는 순천에서 조금 떨어진 광양에서 살고 있다. 작년까지는 스쿨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올해는 새로 지어진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다. 내일이 개학날이지만 민지는 하루 전인 오늘 오후 6시에서 8시 사이에 입소를 해야 한다. 민지에겐 부모님이 안 계신다. 두 분 다 일찍 돌아가시고 나와 나이가 엇비슷하신 할머니(젊은 할머니라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와 단 둘이서 살고 있다. 이불이고 옷이고 챙겨 오려면 짐을 운반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고맙게도 이웃에 사는 분이 도움을 주시기로 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시간대였다. 도움을 주기로 하신 분이 오후 3시 이후에는 다른 볼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전화를 끊고 기숙사 사감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사정을 말씀드리니까, 한 시간 앞당겨 오후 5시에는 문을 열겠다고 했다. 두 시간의 공백은 담임인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런 다음 다시 민지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제안했다.

"오후 3시에 내가 학교에 있을 거야. 그럼 넌 잠깐 나랑 시간을 보내고 오후 5시에 입소하면 되잖아. 나도 너랑 마지막 데이트도 하고 좋겠다!"

민지는 환히 웃었다. 그 해맑은 웃음!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민지가 있어서 정말 행복했었다. 가끔 너무 힘들 때는 일부러 찾아가서 민지를 웃겨댈 때도 있었다. 아이의 웃는 환한 눈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다. 나에게 더 없는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다음은 오래 전에 민지에게 써준 생일시의 한 구절이다.

넌 알고 있을까?
사랑하는 일이나 살아가는 일이나
때로는 지치고 힘에 겨워
잠시 쉬어가고 싶을 때
네 눈 속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는 것을.

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음성보다 먼저 지어지던 수줍은 미소
마치 호수에 돌을 던지면 생기는 볼우물 같은
그 환한 동그라미 속으로
풍덩 빠지고 싶었다는 것을.

보름 전쯤에도 민지에게 전화가 왔었다. 기숙사 입소를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날이었는데, 학생이 아닌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간이었다. 민지는 할머니가 대신 오셔야하는데 할머니가 몸이 편찮으시다는 것이었다. "선생님,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는 민지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해주었다.

"네 아빠가 가면 되지."
"예?"

"너 잊었어? 선생님이 일 년 동안 네 아빠하기로 했잖아?"
"아, 예!"

"그날 너도 나와. 보고 싶으니까."
"예. 그럼 그날 뵈어요."

아뿔싸! 정작 그날 나는 다른 급한 볼일이 생겨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사감 선생님께 전화만 드렸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했는데, 그때도 민지는 전화기 속에서 드맑게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에는 그늘이 없었다. 난 본래 성격상 그늘 같은 거 키우지 않는 사람이지만, 미래에 생길지도 모를 예비 그늘마저 민지가 다 없애 준 것 같다. 너무도 고마운 아이다!

어제 나는 친정인 전주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로 그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만도 한 일이었다. 전날 아내는 나에게 짐이 많으니 역으로 나와 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대가 겹쳤다. 아내는 자기가 먼저 부탁을 했지 않느냐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 미안하다고, 시간대를 조금 늦추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을 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나는 측은지심이 없는 아내를 나무랬다. 아내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을까? 문제는 나의 미숙한 대응에 있었을 뿐. (여기까지 글을 쓰다 말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어제 미안했다고… 그런데 아내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부드러워도 너무 부드러웠다. 모르면 몰라도 내가 반성하고 있었던 그 시간에 아내도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아, 이 팔불출 같은 글 그만 쓰고, 어서 세수하고 밥 챙겨 먹어야겠고, 책 좀 보다가 오후에는 학교로 민지 만나러 가야겠다. 우리 아내 만세!!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교육공동체 벗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내 #교육공동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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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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