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들의 역습

[교육 칼럼] '착한'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당당한' 아이 키우기

등록 2013.02.03 20:49수정 2013.02.03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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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형용사 '착하다'가 있다. "요새 애들은 대체 말이 안 통해. 정말 착한 애들이 얼마 없어.", "선생님 반 애들은 말을 잘 들어요. 정말로 착한 것 같아요.", "착한 애들이 공부도 잘 해. 그러니 애들은 착해야 해." '착하다'라는 형용사는 이렇게 학생들을 평가하는 교사들의 대화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착하다'라는 형용사에는 '곱고 어질다'는 뜻이 있다. '어질다'는 '너그럽고 덕행이 높다'는 뜻이다. 마음이 넓어 감싸 받아들이는 성질이 있을 때 어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착하다'라는 말에 이차적으로 함의되어 있는 덕행은 어진 행실을 의미한다. 착함은 결국 일상 생활에서 실지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몸가짐에서 드러난다.

'요새 애들은 대체 말이 안 통해' 담론을 보자. 이때의 '착함'은 무엇으로 판별되는가. 우리는 이를 '대체 말이 안 통해'를 통해 알 수 있다. 교사의 말이 아이들에게서 '거울 반사' 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교사는 속이 터진다. 교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듣기 좋거나 인생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줘도 아이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교사는 자신의 말이 묵살돼버리는 그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말이 아이들에게 맞는가 그렇지 않은가 여부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한 마디로 교사는 자신의 말에 대해 성찰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그 모든 상황의 책임을 아이들에게 돌린다. '요새는 착한 애들이 정말 별로 없어'와 같은 말을 하면서 말이다.

'선생님 반 애들은 말을 잘 들어요' 담론은 어떤가. 이때의 '착함'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한 마디로 아이들이 교사의 말에 얼마나 잘 복종하는가 하는 게 관건이다. 교사와 아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명령과 복종, 지시와 순종의 메커니즘이 중요하다.

평범한 교사 중에 이 메커니즘에 미혹되지 않을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아이는 우선 교사 자신을 편하게 하지 않는가. 교실에서 교사와 아이들 사이에 형성되는 권력과 권위의 문제는 사뭇 미묘하고 복잡하다. 그 모든 상황을 차분히 고려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교사들이 자신의 말에 복종하는 아이들을 손쉽게 착하다고 판정해버리는 이유다.
'착한 애들이 공부도 잘 해' 담론 또한 마찬가지다. 도대체 이런 주장은 무엇을 근거로 나온 것일까. '착한 애들'은,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교사의 명령과 지시에 잘 복종해서 그런 것일까. 그런데 학교에서 공부께나 한다는 아이들은 제멋대로인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싸가지 없는 전교 1등'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

결국 이것은 사실에 근거한 주장은 결코 아닐 것이다. '착함'을 따라야 높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아이들에게 멋진 유인책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결국 '착한 애들이 공부도 잘 해' 담론은 실증적인 연구 결과가 아니라 아이들을 감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한 교육적 마타도어(matador, 흑색선전)일 뿐이다. 그것은 아이들을 꼬드기려는 '잔꾀'나 '술수'에 불과하다.
아이들의 '착함'을 규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착하다'라는 말은 대상에 대한 가치 평가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가치'는 한두 사람의 한두 가지 관점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있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 '일반'과 '보편'을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근대 교육사의 모든 연구 결과를 취합해보아도 결코 쉽게 답을 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착하다'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들을 평가하는 교사의 말은 가치 중립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이 객관적 사실이나 상황에 기초해야 한다. 교사 자신의 말이 아이들과 잘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아이들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진단도 '내 말에 문제가 있어서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는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불통을 느낀다면 자신이 한 말의 내용을 꼼꼼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또 교사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다. 말(지시나 명령)을 잘 따르는 것이 '착한' 것이라면, 그 '착함'은 복종의 탈을 쓴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고분고분 복종하는 아이들은 민주 공화국이 원하는 올바른 시민의 모습이 아니다. 교사는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까닭을 아이들의 입장과 처지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그 삐딱한 어긋남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렇게 교사가 공감의 눈으로 그 이유를 찾고자 노력할 때, 아이들의 어긋남 또한 반드시 줄어들게 돼 있다.

아이들은 그저 유순한 '착함'보다는 스스로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그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도록 배경이나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말할 때 절대로 그 중간을 가로막지 말라. 권력자인 교사의 앞에서 자신의 말을 끝까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이 부당한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용기 있는 시민이 되는 법이다.

나는 교사들이 즐겨 말하는 그 '착한 아이들'이 언젠가 우리 사회를 역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사에게 고분고분 순종하기만 하고, 아무 말 없이 자기 공부만 하는 아이들이 교사의 말을 거부하는 아이들의 보이지 않는 내면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아이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불우한 처지와 환경을 공감하듯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들이 이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수많은 불온한 이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 우리는 '착한 사람들'만이 넘쳐나는 사회가 결코 선한 곳이 될 수 없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착한 아이 #당당함 #자신의 언어 #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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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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