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 구워먹다 지붕 태운 그녀, 부럽다

[서평] 서명숙의 <식탐>을 읽고

등록 2013.02.01 14:42수정 2013.02.0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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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 하면 떠오르는 건 단연 제주 올레길이다. 그 다음이 시사주간지에 들어가 여기자 최초로 정치부장과 편집장을 한 사람, 그리고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 편집장이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랬던 그녀가 자신의 식탐이 삶을 향한 열정이라며, 어릴 때부터 유별난 식탐에다 생애 곳곳에서 만난 음식과 사람 얘기를 담은 책 <식탐>(시사인북 펴냄)을 푸짐하고 맛깔스럽게 내놓았다.

내 인생의 화두는 세 가지였다. 글, 길, 그리고 맛.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끈질긴 열망은 맛난 음식을 먹고 만드는 것이었다.(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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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탐> 길 내는 여자 서명숙, 먹으멍 세상을 떠돌다 ⓒ 시사인북

글, 길, 맛! 이 한 음절 단어에 누적된 먼 시간과 때 묻지 않은 원시성이라니! 사실 나는 음식과 맛에 대한 관심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식탐>도 멀리 밀쳐두었던 책인데,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이 쓴 책이라서인지 자꾸 끌리는 마음도 어쩌지 못했다. 게다가 맛에 대한 우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어, '식탐'을 제목으로 쓴 데에는 남다른 맛의 열정이 있지 않나 하는 호기심이 많이 작용한 독서였다. 그런데 책을 읽으니 아무래도 '식탐'은 '식복'인 것 같다. 그만큼 그녀는 푸짐하고 넉넉했다.

식복이 없었던 나는 어린 시절 굶기를 자주 했다. 초등학교 때 점심을 싸 가지 못한 날도 많았는데, 점심시간만 되면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나도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나와 수돗가를 맴돌았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 반 친구 하나가 점심을 먹고 매점에서 군것질을 하다가 나를 보고는 사탕을 하나 건네주었는데, 나는 자존심이 상해 거절했다. 아마 "됐다, 임마"라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음식을 성대하게 먹는 것을 꺼리고 조심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식의 세계는 지극한 사치로 여겼다. 어릴 때 못 먹으면 도리어 포한이 져서 먹는데 더 기를 쓰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런데, 거친 음식을 먹으려 하고, 적게 먹어야 한다고 나 자신을 채근하며, 나중엔 고기를 먹지 않는 식생활을 선택하다니! 난 좀 별스럽고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서명숙이 펼쳐내는 식탐의 세계로 들어갈수록, 나의 이런 식복이 서명숙과 자연 대비되면서 부러움과 넉넉함, 그리고 눈물 나는 따뜻함의 정서로 빠져들게 하였다. 나의 박복함을 거듭 한탄하면서.

아버지에게서 시작된 서명숙의 '음식 추억'

어린 서명숙의 음식 추억은 이북 태생의 실향민인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의 각별한 두부 사랑으로 거의 매일 아침 골목 입구의 두부 공장으로 두부 심부름을 했다한다. 두부는 담백하고 고소한 맛을 으뜸으로 하는 음식이라 요즘 아이들은 싫어하기 일쑤인데, 어린 서명숙은 오히려 아버지처럼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고 추억하였다.


내게 두부의 정체성이란 고소한 내음과 말랑말랑한 식감이다. 씹는 행위의 치열함을 요구하지 않는, 조리 과정의 수고로움도 생략해도 되는, 그러면서도 그 자체로 먹을거리로서 완성도를 뽐내는, 존재만으로도 기쁨과 경이로움을 선사하는 말랑말랑한 어린아이의 엉덩이 같은……(18쪽)

아, 두부에 대한 찬탄으로 이만한 문장이 또 있을까? 이는 깊은 애정이 없이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표현일 터. 어린 시절 음식에 관한 추억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음식의 추억이란 맛과 냄새, 모양과 씹는 소리와 시간, 장소, 그리고 사람과 얽힌 추억이기 때문에 이런 추억이 빈약한 사람은 삶도 얼마나 무미할까?

이북 태생 아버지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음식은 냉면인데, 영화평론가 강헌씨가 들려준 이야기나 생전의 리영희 선생과 얽힌 얘기도 재미있었다. 또한 너무나 좋아하는 녹두 빈대떡을 서너 장 사들고 신문지에 말아 친구 집으로 가던 중에 뚜껑 열린 맨홀에 발이 빠지는 순간 빈대떡을 쥔 한 손을 '자유의 여신상'처럼 번쩍 치켜들었다는 얘기는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게다가 하숙집에서 친구들과 호떡을 구워먹으려 하다가 곤로를 잘못 다루어 제주 전통 초가지붕을 홀라당 다 태워먹은 얘기는 정말 서명숙의 식탐이 보통 수준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녀는 대학에 진학하여 대학 신문사에서 활동하고 야학에 참여하여 노동자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학생 운동으로 감금되어 취조를 받고 수감되는 일도 겪는다. 그녀는 취조 받는 과정에서도 배달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움으로써 식탐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단다. 내가 보기에 이런 '자유로운' 먹성이야말로 그녀가 가진 낙천성과 동의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먹성 때문에, 구치소에서 갈치구이가 특식으로 나온 날, 통통하고 큰 토막은 힘센 사람 차지이고, 자신과 같은 신참에게 돌아온 건 삐쩍 마른 갈치 꼬리여서, 비감해진 그녀가 고향 제주의 서귀포 바다를 그리워하는 모습도 애잔하다.

아, 뼈째 씹어도 가시가 걸리지 않을 만큼 앙상한, 살짝 고린 냄새마저 풍기는 시커먼 먹갈치를 먹으면서, 투명할 만큼 하얗게 빛나는 고향 제주의 은갈치, 그 달큰하고도 싱싱한 맛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갈치를 만난 날이면 서귀포 바다를 향한 그리움으로 밤새 뒤척였다. 음식이 목메는 그리움과 닿아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52쪽)

<시사저널> 기자가 되면서 그녀의 식탐은 날개를 달게 된다. 왜냐하면 기자들의 주된 취재 대상인 정치인, 기업인, 고위 공무원, 예술가들도 먹는 걸 밝히는 부류들이고, 식사 자리는 취재원을 만나는 주요한 매개 고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심 좋고 사연 많은 단골 밥집의 고수들을 하나씩 소개하는데 읽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어릴 때는 싫어하다가 임신한 뒤에 열광적인 마니아가 된 제주 토속 음식 '자리젓' 사연과 소설가 김훈이며 시인 이문재 등을 자리젓 신도로 만든 사연 등도 재미있지만 언론사에서 부대끼느라 심신이 지치고 영혼의 우물이 말라갈 때, 자리젓과 같은 제주 토속 음식인 '몸국' 한 그릇으로 그녀 자신을 치유했던 사연은 그 글을 읽는 나도 함께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몸국 국물을 떠넣으면서 위장이 아니라 영혼을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시에서 떠도느라 외롭고 시린 한 제주 여자의 영혼을 몸국이 따뜻하게 덥혀주고 있다는 느낌, 바로 이런 게 소울푸드라는 생각. 몸국을 다 비우고 나자 다시 거친 생존의 바다를 향해 나아갈 용기가 생겼다. 들어올 때와 딴판으로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나가는 손님을 보면서 주인은 짐작이나 했을까. 자기네 음식이 한 여자의 영혼을 위로했음을.(78쪽)

그녀의 보신탕 사랑도 보통이 아니었다. 더구나 광복절에 저지른 '보신탕 난동사건'은 후배들에게 놀림거리로 두고두고 회자된 사건이라는데, 광복절날 회의 마치고 보신탕을 먹기로 한 약속이 모리소바(대발을 깐 네모진 나무 그릇에 담은 일본식 메밀국수)로 바뀌자, 대표에게 젖 먹던 힘을 다해 "전 소바가 싫어요!"라고 외친 그녀를 상상하며 나도 두고두고 웃었다.

친구와 스페인 음식 먹다 떠오른 '제주 올레길'

그러던 그녀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스페인 산티아고 길 위에 선다. 800km의 길을 한 달 동안 도보 순례하는 그녀의 여행기는 당연히 음식이야기와 함께 한다. 그 중에 알베게르에서 한국의 여행고수 2명과 함께 비 오는 날 부침개를 만들어 수십 명의 순례자들과 나누어 먹은 일은 감동이다. 성경의 '오병이어'가 따로 없다나? 그래서 '코리안 수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길 위의 통신을 타고 퍼져,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준 영국 여자 헤니도 그런 인연으로 만나게 된다. 역시 선행은 복을 불러들이는 법.

길에서 만난 헤니는 그녀를 알아보았고, 함께 동무가 된다. 맛있는 뽈뽀(문어를 삶아 올리브 기름과 고춧가루를 뿌려 만든 스페인 요리)를 같이 먹고 술을 마시며 인생 얘기를 하던 중에, 한국이야말로 치유의 길이 필요하다는 말을 헤니에게 듣고 그녀는 머리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전율이 휩쓸고 갔다 한다. 제주 올레길을 만들려는 마음의 씨가 막 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너스레를 떤다.

왜 내 인생의 중요한 모멘텀은 항상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순간에 이뤄지는 것일까.(125쪽)

또한 그녀는 이탈리아의 슬로푸드 대회에서, 네팔의 안나푸르나 트레일에서, 베트남 하노이 거리에서, 중국 베이징 소수민족 박물관에서 만난 음식 이야기, 그리고 일본과 스위스에서 만난 음식 이야기도 풀어내는데, 그녀 특유의 활달함과 자유스러움이 더해져서 글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구체적으로 함께 여행을 가고 음식을 맛보고 즐기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하는데, 어떻게 글을 이토록 맛깔스럽게 요리하는지 모르겠다.

책의 끝은 다시 제주도 서귀포로 돌아와 있다. 고사리로 시작하여 고사리로 끝나는 제주의 봄을 무치고, 올레꾼의 음료인 제주 할망들의 '쉰다리'를 발효시키고, 서귀포 네 여자, 정영희, 서애숙, 정묘생, 서영선 얘기를 버무려서 내놓은 그녀의 고향 밥상이 참 맛있다. 산티아고 길이, 올레길이 치유의 길이 된 것처럼, 음식도 치유하고 소통하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나의 통로라고 하는 그녀의 말이 더욱 간절해진다.

<식탐>을 덮으며, 문득 길을 걷고 싶었다. 걸으면서 나도 많은 음식들과 만나 그 음식들 속에 담긴 희로애락의 풍성한 맛을 느끼고, 사람의 정들을 배부르게 맛보고 싶었다. 걸으멍 놀멍 쉬멍 먹으멍 마시멍, 나도 내 길을 내고 싶었다. 불끈 힘이 나게 하고, 다시 용기를 갖게 하며, 가슴을 출렁이게 하는 서명숙의 <식탐>은 따뜻한 또 하나의 치유였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책 속에 담긴 삽화이다. 37년째 크레파스 그림만 그리는 전업화가 한중옥의 그림인데, 크레파스만으로 이렇게 섬세하고 따뜻할 수 있다니, 그의 이름처럼 보배로운 구슬(重玉) 같았다. 자주 그의 그림을 만났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식탐>, 서명숙 씀, 시사인북 펴냄, 2012.09.03, 1만3000원

식탐 - 길 내는 여자 서명숙 먹으멍 세상을 떠돌다

서명숙 지음,
시사IN북, 2012


#자리젓 #몸국 #쉰다리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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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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