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0·4선언'... 아직 늦지 않았다

10·4선언 5주년을 맞이해 부쳐보는 소망

등록 2012.10.09 11:50수정 2012.10.0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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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07년 10월 2일을 떠올려보며. 2007년 10월 2일, 가을 날씨답게 하늘은 청명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나는 그날이 마침 체력검사일이어서 오전에 하교했고, 그 덕분에 TV 화면을 통해 2차 남북정상회담 여러 장면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당시 TV화면을 통해 비춰진 장면은 이러했다.

먼저 많은 평양시민들이 꽃술을 들고 4·25문화회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취재진들이 흩어져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중 먼저 두 대의 차가 들어왔다. 그 차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내렸다. 김 위원장은 내리자마자 하품을 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잠시 뒤 카퍼레이드를 마친 노 대통령이 그대로 4·25문화회관 앞으로 들어왔다. 남북 두 정상은 악수를 했다. 그런데 다소 어색해보였다. 김 위원장은 걸음도 느리고 어깨도 처진 모습이었다. 반면 노 대통령은 활기가 있었다. 이어 인민군사열과 함께 두 정상이 서로 양측의 수행원들과 악수를 하고,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이내 각기 차를 타고 사라졌다.

이어 TV화면에는 노 대통령이 길을 달려 평양으로 어떻게 왔는지를 보여주는 영상이 공개됐다. 노 대통령 일행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시내를 지났다. 개성시내에는 수해의 흔적과 낡은 건물들이 보였다. 이어 고속도로를 달려 황해도 어느 지점(해주인지 신계인지 기억이 안 난다)의 휴게소에 들렀다. 북조선의 휴게소는 육교 식으로 되어있어 그 모습이 참 독특했다. 잠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 일행은 곧 평양으로 들어왔고, 이어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북쪽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일행을 영접했으며 양쪽 거리에 늘어선 평양시민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구호를 외쳤는데, 내 기억으로는 '조국통일' 등의 구호가 방송을 통해 들리는 것 같았다. 이어 카퍼레이드를 하며 대통령은 평양의 중심 거리를 달렸다. 달리는 도중 옆쪽에는 평양성의 성문인 보통문도 보였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좌회전을 하여 4·25회관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남북정상이 회담하는 장면도 방영됐다. 물론 일부분이었다. 회담 전 양 정상은 '국수'를 화제로 서로 환담을 나누었고 남쪽에서 가져간 선물이 공개됐다. 그리고 공식회담에 들어갔고, 화면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감격했다. 사실 1차 남북정상회담은 내가 너무 어렸을 때여서 TV화면에 비춰지는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몰랐지만, 이제는 달랐다. 아마 개인적으로만 따지자면 남북 두 정상의 만남을 생생하게 지켜본 것은 이 사례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대체적인 분위기를 돌이켜본다면, 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내외의 관심은 높았으나 6·15 때에 비해 그 감격은 다소 떨어졌던 것 같다. 실제 남북정상의 첫 대면 장면을 보아도 6·15 때에 비한다면 아주 차분했다. 역시 이래서 '최초'가 좋긴 좋은 모양이다. 물론 연도에 길게 늘어서 꽃술을 흔들며 '조국통일'을 외치는 북의 인민들에게서는, 그것이 의도된 연출이든 아니든, 통일을 향한 강한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분단된 조국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잊고 있었던 '조국통일'이라는 말이 남북의 사람들에게 이토록 뜨겁고도 절절한 의미를 담고 있음도 깨닫게 해주었다. 아무튼 10·4남북정상회담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반적으로 '이벤트성'은 축소되고, 차분하고,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분위기에서 회담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10·4선언 지우기


하지만 10·4선언이 발표된 지 두 달이 지나 정권교체가 되었고, 권력을 틀어쥔 수구세력들은 '의도적으로' 10·4선언을 사문화했다. 남쪽의 많은 사람들은 그 상황을 쳐다보기만 할 뿐,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야당조차 그랬다. 사실 10·4남북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된 당시부터 그런 비판은 있었다. 왜 하필이면 정권 말기에 정상회담을 하냐고. 사실 정권교체가 될 가능성이 유력한 상황에서 뒤에 새 정부가 집권하면 지켜질 수는 있는 거냐고. 하지만 설령 정권교체가 되더라도 새 정부가 10·4선언의 내용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 꼭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보수정권이 집권하든, 진보정권이 집권하든, 동북아 평화와 진정한 통일을 지향하는 가치를 공유하고만 있다면, 선언의 내용을 계승해 북과 협의하며 현실정책화하는 것이 어려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이명박 정권은 취임 초기부터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며 '노무현 지우기'에 열을 올렸고, 이런 속에서 10·4선언은 사문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이명박 정권의 '비핵개방 3000'과 같은 전혀 현실성 없는 대북정책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현실과 괴리된 대북 멘탈리티는 이후 '북한 붕괴론'에 기대어 아예 대북정책 자체가 부재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그토록 신봉하던 북한 붕괴론은 현실로 증명되었듯이 완벽한 허구였다. 아마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입안자들이, 왜 평양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이 회담 중간에 수행원과 기자들 앞에서 북의 개방문제는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보았다면, 이런 억지스러운 대북정책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취임 초 남북관계에 관련해 느닷없이 1991년에 맺어진 남북기본합의서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2008년 3월 26일 통일부 업무보고에선 "남북기본합의서가 91년 체결돼 92년부터 효력이 발생했고, 북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면서 "그 이후 남북정상이 새로 합의한 합의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6·15와 10·4선언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북한의 반응 역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당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 개원 연설에서 "과거 남북 간에 합의된 7·4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 공동선언,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을 어떻게 이행해 나갈 것인지에 관해 북측과 진지하게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이전에 비해 진전된 것이었지만,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에 묻혀버렸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남쪽의 보수 세력은 이명박 정권에 북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할 것을 압박했고, 피격사건 보고를 받고도 예정대로 국회 개원 연설에서 이 발언을 한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했다.

하지만 사실 이는 꼭 비난 받을 일만은 아니었다. 피격사건은 피격사건대로 수습하면서 그동안 이어져온 남북 당국 간 대화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유연한 태도로 해석될 여지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이 이런 '전략적 유연성'의 차원에서 피격사건 보고를 받고도 예정된 국회 개원 연설을 그대로 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실제 그 뒤에 전개된 양상을 보면 이런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다. 또 한편으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7·4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 공동선언 등과 같은 차원의 범주에서 다룬 것은, 이명박 정권의 남북관계 및 북에 대한 이해도가 그리 깊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적어도 남북 간 정상회담의 결과인 6·15, 10·4선언을 그 이전의 당국자 간 비밀회담의 결과였던 7·4공동성명이나 총리급의 남북기본합의서 등과 동급으로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는 북의 입장에서 본다면, 김정일 위원장이 '사인'한 남북 공동선언문의 격을 저평가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대목이었다.

이후 남북 간에는 피격사건을 둘러싼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고 차츰 남북관계가 경직되어 가는 가운데 북은 이명박 정권의 6·15선언과 10·4선언에 대한 이행 의지를 거듭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2008년 7월 말,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이명박 정권은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7월 24일 밤에 발표된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의장성명에는 "금강산 사건에 대해서는 참가국들이 관심을 표명했으며, 조속한 해결을 기대한다"는 부분과 함께 "참가국들이 10·4선언에 기초한 남북 대화에 대해 강력한 지지를 표명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의장성명 발표 직후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싱가포르 정부가 남북의 입장을 균형되게 반영하고자 병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지만 그 다음날로 입장이 바뀌었다. 당시 외교부 이용준 차관보가 싱가포르 외교부 차관을 만나 10·4선언 부분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던 것이다. 이에 성명에서 10·4선언 부분이 빠졌고 그와 함께 금강산 관련 내용 역시 함께 빠져버렸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이명박 정권의 외교라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국회에서도 이명박 정권의 전략이 부재한 외교력에 대해 강한 비판이 쏟아졌다. 더욱이 남측이 먼저 10·4선언 부분을 뺄 것을 주문한 것은 남북 간 신뢰도에 치명타를 안기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10·4선언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보였다. 이때 언론에선 한국 외교라인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데에는 청와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실제 이와 관련해 당시 청와대 관계자가 "금강산 사건은 단기간에 끝날 사안이지만 10·4선언이 성명에 담기면 한국의 대북정책 기조를 구속할 수 있어 문제가 생긴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에서 10·4선언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고, 이에 외교라인에서 황급히 공동성명의 10·4선언 관련 대목을 빼려다가 결과적으로 금강산 사건 관련 부분 역시 함께 빠져버리는 사태로 이어졌던 것이다. 앞뒤를 냉철하게 살피지 않고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외교라인의 허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10·4선언이 성명에 담기면 한국의 대북정책 기조를 구속할 수 있어 문제가 생긴다"고 한 청와대 관계자의 발언은, 이명박 정권의 10·4선언 이행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었다. 다시 말해 이 발언 속에는 10·4선언은 어디까지나 노무현 정부 때에 맺어진 것이고, 현재 한국의 대북정책 기조는 10·4선언 때와는 다르기에 10·4선언의 구속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이 '정권' 차원에만 국한된 '속 좁은 시야'에 갇혀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전 정권이 해놓은 것은 무조건 인정할 수 없다는 발상이 결국 남북관계의 악화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에 10월 16일, 북은 로동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괴뢰도당은 온 민족과 전세계가 한결같이 지지하고 그 정당성과 생활력이 확증된 력사적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북의 대남전략의 산물로 터무니없이 헐뜯으며 그 리행을 가로막아나서고 있다. 화해와 단합,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활로를 열어온 6·15시대가 잃어버린 10년으로 모독되고 통일의 근본리념과 원칙들이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있으며 북남 사이에 채택발표된 모든 합의들이 무효화되고있다.…사실상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부정하는것은 상대방의 사상과 제도를 부정하는것이며 서로 대결하자는 것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우리의 최고존엄을 감히 건드리는 것은 우리 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이며 공공연한 선전포고이다.…력사적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따라 북남관계를 발전시키고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것은 우리의 시종일관한 립장이다.

북으로선 무엇보다 김정일 위원장이 사인한 10·4선언을 부정한 이명박 정부에 대해 대단히 불만스러웠을 것이고, 또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에 있어 '신뢰'보다 '정권'을 앞세우는 태도에 대해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이후 남북관계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군사적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남북관계의 긴장과 대결은 동북아 지역에 '신냉전'의 기류를 급격하게 고조시키며 한중관계도 틀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지난 2008년 10·4 선언 1주년 기념 세미나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10·4선언이라는 꽃에 물도 주지 못한 채 시들고 말았다"고 탄식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은 비극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다. 또 그로부터 2년이 지나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했다. 이로써 10·4선언의 두 주역들이 모두 고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10·4선언은 잊어져갔고 그 의미 역시 퇴색되어 갔다. 불과 1년 단위로, 아니 한 달 단위로 강산이 변하는 사회에서 동시대의 일조차 기억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탓일까. 아니면, 정권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기억 지우기'가 이루어졌던 탓일까. 언론들도 정권의 눈치를 본 탓인지 이후 10·4선언에 대한 기사나 언급을 언론기사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2007년의 10·4선언은 우리에게서 멀어져갔다. 물론 이명박 정권은 임기 중반 지지율이 떨어져가자 '업적 쌓기용'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으나 일은 틀어지고 오히려 북의 '폭로'에 의해 망신만 당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관계에서 '신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남북정상회담을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대의'의 차원이 아닌, 정권의 지지율을 높이는 일회성의 이벤트 수단으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10·4선언의 핵심은 한반도 평화

그러면 10·4선언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10·4선언의 공식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다. 여기서 핵심은 '평화번영'이 될 것이다. 실제 10·4선언에는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평화로 이행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문제들이 많이 담겨 있다. 10·4선언 제3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

- 남과 북은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며 분쟁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였다.
-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반대하며 불가침의무를 확고히 준수하기로 하였다.    
- 남과 북은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과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조치 문제 등 군사적     신뢰구축조치를 협의하기 위하여 남측 국방부 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 부장간 회담을 금년 11월중에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특히 여기서 서해 공동어로수역 지정 문제는 서해상에서 벌어지는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남북 간 평화유지에도 핵심 사항임은 물론이다. 현재 남북 간 군사적 대치에서 가장 충돌 위험성이 높은 지역이 서해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해상에 남북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게 된다면 현재 남북 간의 대치를 틈타 거듭 NLL선으로 진출해 어자원을 '싹쓸이'해가는 중국 어선들을 막는 데도 긍정적일 것이다.

한편, 10·4선언 제4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 남과 북은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하였다.

여기선 남북 간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평화협정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적어도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 상황'이 계속되는 이상 남북 간 군비경쟁과 군사적 긴장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런 속에서 남북 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남북 내부의 경제발전이나 동북아 평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10·4선언에선 이를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의 종전선언"과 "6자회담, 9·19공동성명, 2·13합의의 순조로운 이행"을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3자 또는 4자"라고 한 것은 중국의 배제를 의미한다는 것이 당시 대다수의 해석이었다. 이러한 해석대로라면 남북이 주체가 되어 한반도 상황에 대한 중국의 입김을 차단하는 것이 된다. 어쨌거나 이 문제가 동북아 지역 내 남북관계의 주도권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10·4선언의 핵심적인 내용은 남북 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이었다. 북핵문제는 남과 북 그리고 미, 중, 러, 일의 다자간 협의가 이루어지는 6자회담 무대에서 해결하도록 명시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남과 북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남북한의 서해상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행하고, 3자 또는 4자 간의 종전선언을 통해 현재의 정전상태를 불식시키자는 것이 10·4선언의 핵심 내용인 것이다. 이 선언의 내용이 그대로 이행되고 지켜졌더라면, 우리는 비극적인 연평도 사태와 그와 연동된 일련의 동북아 긴장상태를 경험할 수 있었을까?

응답하라 10·4선언!

10·4선언이 발표된 지 5년이 흘렀다. 물론 남쪽에선 방송이나, 신문을 막론하고 10·4선언에 대해 별반 언급이 없었다. 다만 올해 대선 국면에서 다시금 10·4선언이 주목받고 있다. 가령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문재인 후보는 10·4정상회담 당시 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을 맡은 바 있었고, 최근 10·4선언 5주년을 맞아 10·4선언에 토대를 두어 나름의 '남북국가연합'안을 내놓은 바 있다. 그는 "남북 경제협력을 기반으로 북미·북일 관계를 정상화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시키는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한편,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최근 발표한 정책 비전 선언문에서 "남북한의 대화와 협력,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함께 사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남북기본합의서로부터 6·15선언, 10·4선언 그리고 남북한 미, 일, 중, 러가 함께 합의한 9·19공동선언의 합의정신입니다"라고 밝혀 10·4선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제 10·4선언은 문자 그대로 '오래된 미래'가 되었다고나 할까. 한편, 지난 10월 4일 북의 조선중앙TV에선 10·4선언을 기념하는 기록영화를 방영했다. 물론 그 내용은 '김정일 위원장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북의 입장에선 앞으로도 10·4선언의 내용 자체를 결코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의 평화는 남북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남과 북은 동북아 평화의 주체로서 지역 내 국제사회에서 자기 입지를 다져야 한다. 그것이 남북 사람들의 생존권과 직결되어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동족의 꽃게잡이 어선에는 총질을 해대며 상대의 도발을 유도하면서, 정작 일본 자위대의 독도 영공 침범 사실은 국민에게 숨기고 있다 한참 뒤에야 들통나는 오늘의 기막힌 상황에서, 정작 그 주역조차 시들었다고 평가한 이 꽃은 분명 다시 피어나야 한다. 꽃이 피어있는 시간도 한때이지만, 꽃이 시들어 있는 시간도 한때일 뿐이다. 꽃은 시들었다가도 그 다음해에 다시 피어나게 되어있다. 지난 5년 동안 이 꽃은 피어나고 싶어도, 일부러 물과 양분을 공급해주지 않는 자들에 의해 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꽃을 피워내는 풀마저 고사한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지난 5년 동안 이 꽃을 다시 살려내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차기 정권이 남북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역시 가장 기본은 '6·15정신'과 '10·4선언의 합의사항'을 계승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롭게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기존의 합의사항을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남북은 충분히 신뢰를 회복하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역사 앞에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하지 않을까?

'응답하라 10·4선언!'.
#10.4선언 #노무현 대통령 #남북정상회담 #한반도 평화 #동북아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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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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