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바로 정통 아웃백 스테이크입니다

[네 바퀴로 가는 호주 아웃백 22] 그레이트 빅토리아 사막 횡단 2일차

등록 2012.10.05 16:05수정 2014.12.1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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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후룸라이드

일출이란 본디 '장엄'을 근간으로 한다지만 이곳 일출은 남다른 감이 있다. 태양을 핥는 나뭇가지의 형상이 다르거니와 주황과 붉은 빛으로 색조화장을 넓게 한 하늘색도 특별하다. 유화의 꽉 채운 질감으로 가득한 주황빛 하늘이라니. 그 틈을 비집고 노란, 정말 샛노란 해알갱이가 쑤욱 승천하는 장면은 가히 경이롭다.


어쩐지 <라이온 킹>의 배경음악이라도 낮게 깔려야 할 것 같은 아프리카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아침. 남은 김치찌개와 누룽지로 아침을 해결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순간에도 어쩐지 비현실의 공간에 놓인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하긴 이 비현실감의 원인이 어디 태양빛에만 있으랴. 이곳은 어차피 내가 속한 도시의 일상을 벗어난 타국의 사막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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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의 일출 ‘라이언 킹’의 주제곡이라도 들릴 것 같은 배경. 매일 경험하는 해돋이라도 날마다 그 감흥이 다르다. ⓒ 오창학


이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음식섭취만큼이나 현실적인 활동은 차를 움직이는 일이다. 매일 아침 출발 전 타이어 공기압 상태를 점검하고 엔진룸을 열어 각종 오일과 냉각수 상태를 살피는 일은 비현실공간에서의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키박스에 열쇠를 넣고 첫시동을 거는 행위는 신성한 의식처럼 느껴진다.

사막을 여행하는 이들이 겪는 최고의 악몽은 아침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 일일게다. 간단한 부품 교환이나 동네 카센터에서의 응급조치로 해결 가능한 고장이 이곳에선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열쇠를 돌린 뒤에 들려오는 박력 있는 엔진음은 생명의 소리요 구원의 소리처럼 들린다.

오늘 점검에선 배터리액이 흘러 왼쪽 휠하우스를 적시고 있는 걸 발견했다. 엔진룸 안에 보조 배터리가 있으니 절망적인 상황까지 가진 않겠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다. 윈치덮개가 덜렁인 건 벌써 먼 과거의 일이고 앞바퀴 정렬도 틀어져 있다. 지금으로선 그저 이 이상의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

힘차게 시동을 걸고 보크스 힐(Voke's Hill)을 향해 가다가 사막에 들어온 이래 처음 우리 외의 다른 차를 만났다. 라버튼을 출발한 지 나흘째란다. 다시 말해서 이제 나흘만 더 가면 우리도 라버튼에 도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최 감독이 묻는다.


"반갑죠, 사람?"
"진짜 반가워요. 그리고 마음이 좀 놓여요. 혹 무슨 일이 생겨도 며칠만 기다리면 사람이 지나간다는 말이니까."

워낙 그레이트 빅토리아 사막 횡단에 대한 자료가 적었고 심슨사막에 비해 거리도 긴 데다가 횡단경험자를 접할 수 없어 마음의 부담이 컸음을 그가 알기에 이렇게 물었나 보다. 막상 사막에서 이틀 밤을 지낸 터라 마음이 편해졌던 참인데 이렇게 교행하는 차까지 만나게 되니 적이 안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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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주행의 흔적 사막의 노면은 모래 후름라이드를 연상케 할 만큼 악조건이다. 이미 두 개의 손잡이가 떨어져 끈으로 이어 써야 했다. ⓒ 오창학


운전하는 내내 회전을 너무 급하게 한다는 둥, 속도가 빠르다는 둥 뒷좌석의 아내는 말이 많았다. 직접 해 보라며 운전대를 넘겼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뒷좌석에 앉게 되었는데 아내의 잔소리는 나를 쉬게 하기 위한 핑계였나 보다. 그런데 아내의 운전을 보니 거칠기로는 내게 댈 게 아니다.

차체 왼쪽면을 자꾸 나뭇가지에 쓸며 달리기에 뭐라 조언했는데 운전자에겐 그게 바로 잔소리였다. 어떻게 운전하든, 어떤 자세로 앉아있든 노면이 울퉁불퉁한 사막을 달리는 차는 요동치게 되어 있다.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겨우 자동차 하나 지나갈 폭으로 열린 곳을 달리면 나뭇가지를 긁으며 갈 수밖에 없다. 마음 편한 길은 내가 사막에 있음을 인정하는 거다.

"야 이거 공짜로 후룸라이드 타는구나."

내 말에 경숙이 응수한다.

"모래 후룸라이드라고 혹시 아나."

그래 우린 모래 후룸라이드를 타는 중이다. 하루짜리 자유이용권을 끊어서.

차는 요동치고 태양은 참 따갑다. 손수건으로 커튼을 만들고 버텨보지만 심슨사막 때처럼 차가 동에서 서로 계속 움직이는 지라 아침엔 해가 뒤통수에서 떠서 내내 우측면을 비추다가 해질 무렵에 정면에서 얼굴과 가슴에 열기를 퍼붓는다. 여긴 남반구니까 해 뜨는 방향도 반대였으면 좋으련만.

다 뜯겨진 천정손잡이를 끈으로 매어 잇고 악전고투하는 동안 보크스 힐에 도착했다. 이정표 옆에 이곳을 지난 이들의 이름을 적은 방명록이 있어 짧은 글을 남겼다. 이로써 심슨사막에서 한 줄, 그레이트 빅토리아에서 한 줄 우리의 흔적을 남긴 셈이다. 모래에 남겨진 바퀴자국이야 내일이면 다 덮이고 말 터이지만 방명록에 남겨진 기록은 한동안 더 남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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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크스 힐에서의 점심 어쩐 일인지 이곳엔 그 악명 높은 파리가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차내식을 벗어나 야외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오창학


보크스 힐에서 샌드위치로 늦은 점심을 준비하는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곳엔 파리가 없다. 그토록 극성맞고 떼로 다니던 아웃백의 파리가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간만에 차내식이 아닌 야외식으로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차 그늘을 활용한 작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비닐 위에 앉아 먹는 점심이지만 백주대낮에 파리의 위협 없이 한가로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행복이다.

아웃백의 악동, 낙타

"앗! 공룡발자국이다."

앤 정션(Anne' Juntion)의  나무 사이에서 아내가 깊게 패인 거대한 흔적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정말 공룡발자국만큼 큰 발자국이었다. 필시 낙타 발자국이 분명했다. 이 깊은 사막에 낙타가 있다니. 하긴 낙타는 사막에서 사는 동물이고 여긴 나무까지 있는 곳이니 낙타가 살기엔 최적이겠지. 발자국 크기에 기가 질렸지만 어떤 면에선 이 광막한 땅에 우리 외의 생명체들이 있다는 사실이 적잖은 위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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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의 공룡 발자국.....? 공룡발자국 만한 낙타발자국. 길이 2m에 몸무게 700kg의 거구들이인 만큼 발자국도 크다. ⓒ 오창학


적어도 우리 앞을 막을 낙타들이 나타날 때까진 그랬다. 주행 중에 길을 막고 서 있는 낙타를 발견했다. 처음엔 세 마리, 다음엔 여덟 마리, 그러더니 나무 사이 어디에선가 떼로 몰려와 길을 점령하고 우릴 향해 마주 섰다. 영락없이 패싸움이라도 벌일 기세다.

"그래 한 번 해보자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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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들과의 한판 승부 길을 놓고 팽팽한 신경전. 녀석들이 패거리를 이루어 우리와 대치해 있다. 현재 호주는 100만 마리의 야생낙타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 오창학

차에서 내려 녀석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이거 은근 무섭다. 몸길이 2m에 무게 700Kg이 넘는 떡대들이 스무 마리도 넘게 날 응시하고 있다.

'설마 이대로 날 향해 달려오지는 않겠지?'

은근한 걱정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니 더욱 대열을 정비한다. 그만 다가가라며 소리치던 아내가 보다 못했던지 차를 움직여 내 뒤를 지원했다. 숫자는 많아도 겁이 난 녀석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하더니 길을 열었다. 차가 있는 한 우리의 압승이 분명했다. 그러나 저렇게 많은 낙타가 떼지어 있는 모습을 보고 호주가 직면한 현실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1929년 애들레이드에서 앨리스스프링스를 잇는 간(Ghan) 철도가 개통되지 전까지만 해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오드나다타에서 앨리스스프링스까지 500Km 거리를 낙타를 통해 물자를 운반했다. 그러다 철도 개통 후 필요 없게 된 이들을 풀어 준 것이 오늘날 야생 낙타의 시작이었다.

현재는 100만 마리로 늘어난 야생낙타 때문에 호주는 몸살을 앓고 있다. 50만 마리의 낙타가 10년 새에 두 배로 증가한 것인데 이들은 갈증이 심해지면 떼를 지어 마을을 습격하기도 한다. 수도관을 뜯어낼 정도의 강인한 생명력과 3분 만에 200리터의 물을 흡입하는 억척스러움 때문에 호주의 자연과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야생 낙타 관리 프로젝트(FCMP)는 현재 1㎢당 5~20마리인 낙타 밀도를 10㎢당 5~10마리로 줄이는 것이다. 낙타를 포획해 상업적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 목표라지만 과연 이렇게 깊은 곳에 살고 있는 녀석들을 일일이 찾아 낼 수나 있을까. 또 찾아낸다 한들 사살 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을 것이다. 멀리 아프카니스탄에서 들여와 용도를 다한 이들은 이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천덕꾸러기가 됐다.

낙타가 많긴 많은지 오후 늦게 또 한 무리의 낙타들과 마주쳤다. 아까처럼 장난할 마음은 없어 내처 지나가려는데 옆으로 비키지 않고 길을 따라 도망쳤다. 비키라는 의미로 차를 더 바짝 붙이니 더 빨리 뛴다. 멈추면 그들도 멈추고, 다가서면 그만치 움직이고, 달리면 함께 달리고. 달리는 낙타들은 숨이 턱까지 차 오른 것 같은데 이들을 추월하지 않으면 오늘은 못 움직일 것 같아 비키기만 바라며 계속 주행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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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와 함게 춤을 또 다른 낙타의 무리는 우릴 피해 앞으로만 달렸다. 우리가 멈추면 녀석들도 서고 우리가 달리면 녀석들도 달리는 의사소통 부재의 상황이 한동안 이어졌다. ⓒ 오창학


예전부터도 낙타를 보면 늘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는 그 못난 얼굴 때문이기도 했고, '낙타'라고 입술만 움직여도 바짝 타는 갈증이 연상되는 점도 그랬다. 등에 붙은 혹은 수분을 저장할 창고라기보다 장애처럼 얹힌 멍에를 연상케 해 더욱 그랬다. 오늘 본의 아니게 육중한 몸으로 흰 침을 삼키며 뛰는, 그것도 살길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무한정 뛰고만 있는 낙타의 엉덩이를 보며 가노라니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결국 낙타를 설득할 길 없는 우리가 진행을 포기했다. 잠시 멈추고 밭처럼 펼쳐진 스피니펙스 링스(Spinifex rings)나 구경하다 가기로 했다. 똬리를 틀 듯 원형으로 퍼지는 스티니펙스 링스는 흡사 솜처럼 느껴지는 가시 덤불이다. 넓은 지대에 밭처럼 펼쳐 있는 이 식물 또한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의 명물이다. 잠시 여유를 두고 둘러보는 사이 낙타는 모습을 감추었다.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어서 녀석들은 저토록 순박(?)한 걸까?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 신경림, '낙타'

에뮤와 낙타가 느릿하게 걷는 여기는 신기한 세상. 흡사 주라기 공원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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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니펙스 링스(Spinifex rings)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에서 만날 수 있는 있는 또 하나의 신비. ⓒ 오창학


야영금지구역 벗어나서 자려고 늦게까지 달려 서호주와 남호주의 주경계선을 약 25Km 남겨둔 지점에서 멈췄다. 지금 시간 여섯 시 사십육 분. 그러나 시간은 무의미하다. 시드니 기준시에서 앨리스스프링스가 삼십 분 시차를 두고 있음은 확인했으나 앨리스스프링스로부터도 한참 떨어진 이곳은 또 얼마의 시차가 둬야할 지 알지 못한다. 그저 심리적 기준시를  위해 시계를 차고 있을 뿐 절대적 개념으로 시간을 구획하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그러나 해가 지고 있다는 사실은 시계바늘의 위치와 무관하게 자명한 현실이다. 고프면 먹고, 해가 지면 선다. 시계는, 인위적인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내와 경숙이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 나와 최 감독은 시계를 대체한 눈앞의 현상을 렌즈에 담기 위해 언덕에 올랐다.

"아......"

태양은 잔 구름 사이를 비집고 가라앉으며 낮 동안 쓰고 남은 빛깔을 구름에 뿌려놓고 있었다. 내가 가진 언어는 광경을 묘사하기에 늘 빈곤하고 렌즈를 통해 기억시킨 상은 원본을 충분히 재현해 내지 못한다. 그저 짧은 외마디 신음을 연발하며 이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을 망막에 담았다. 내 인생에서 벌써 몇 번의 일몰을 접했던가. 그리고 이곳 아웃백에서 이미 여러 번 석양을 접했지만 매번 감동하게 한다. 지금, 여기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곳에서 이 특별한 하루를 경험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남은 생애에 맞닥뜨릴 고난과 고통 따윈 잠시 접고 태양이 있었던 오늘 하루만큼의 삶에 감사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거야'라고 희망의 언어를 전할 수 있었던 것도 저 강렬한 색채에 영향 받은 바 클 것이다.

정통 아웃백 스테이크를 먹다

해가 진 후 사이트로 내려가니 저녁을 위한 준비는 끝나 있었다. 최 감독이 팔을 걷어 부치고 스테이크 요리를 자청했다. 그야말로 '아웃백 스테이크'와 와인으로 근사한 저녁을 마쳤다. 육질 좋은 호주산 쇠고기에 시즈닝을 하고 그저 프라이팬을 모닥불 위에 얹어 구웠을 뿐인데 일류 식당 부럽지 않은 스테이크가 되었다. 또 최철호식 요리법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모든 준비가 다 갖춰진 상황에 나타나 고기를 팬에 올린다, 불 위에 얹는다, 먹는다, 그리고 훌륭한 요리사란 찬사를 한 몸에 받는다. 물론 불 위에서 언제 팬을 집어낼 것인가 하는 결정은 요리사의 몫이겠지만 진짜 공로는 호주 청정우와 그 신선함을 지금까지 지켜 준 냉장고에 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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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아웃백 스테이크 호주산 청정 쇠고기를 아웃백에 직접 구워 먹는 그야말로 정통 아웃백 스테이크다. 최철호식 요리법이 다시 한 번 등장했다. 모든 준비가 되었을 때 등장하여 고기를 굽는 하일라이트를 장식한다. 모든 찬사는 자신이 갖는다. ⓒ 오창학


아웃백을 다니면서 마주친 소들은 방목인지 야생인지 모르게 자기 인생을 살고 있었다.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조밀하게 사육되는 '고기'들을 연상하다가 이렇게 드넓은 지역에서 방목되는 소들을 접한 건 충격이었다. 귀에 걸린 바코드가 아니었다면 분명 야생소라 여겼을 것이다. 그 신선한 고기를 이렇게 사막에서 먹을 수 있는 건 차량용 냉장고의 힘이다.

빵과 함께 먹을 우유를 여러 날 보관하고 늘 시원한 맥주를 공급하는 것 또한 냉장고 덕이다. 국내에서라면 이 무겁고 비싼 냉장고를 살 이유도 없고 싣고 다닐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가게를 마주치지 않고 일주일씩 다닌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렇지만 아웃백에선, 그것도 뜨거운 아웃백에선 부식의 보관과 시원한 음료의 제공을 위해 꼭 필요한 물품이다. 이번 아웃백 여정은 호주산 쇠고기와 차량용 냉장고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한 계기였다.

식사 후 왼쪽 뒷바퀴에서 바람이 새는 걸 최 감독이 발견했다. 이곳에선 나뭇가지 쪼개진 것에 타이어가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던데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펑크 난 타이어를 수리하려 바퀴를 빼내고 수리키트를 꺼냈다. 이제 타이어 펑크는 식후 운동처럼 가벼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에어컴프레서가 작동되지 않는다. 모터는 돌아가는데 공기는 압축되지 않고 소리만 요란하다. 어라? 이러면 얘기가 다른데. 아직도 갈 길이 창창한데 다시 타이어 펑크가 나면 고칠 길이 없다는 말이다. 예비타이어를 끼우고 나니 더 이상 여분의 타이어가 없다는 사실에 무척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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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패 펑크난 타이어를 수리하려는데 에어컴프레서가 작동하지 않아 예비타이어로 교환했다. 이제부터는 단 한 번의 펑크도 허용되어선 안 된다. ⓒ 오창학


약속과 달리 오프로드 타이어를 끼워놓지 않아 잦은 펑크를 겪게 한 렌트카 업체를 원망했지만 실은 그 상태로 여행을 강행한 내게 잘못이 있지 누구를 탓하랴. 사이즈가 맞지 않더라도 여분의 타이어를 하나 더 구해 들어왔어야 했다. 그 동안 무난히 잘 다닌 것에 고무되어 안이한 생각에 빠졌던 나의 잘못이었다.

"에이,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어쨌든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 미리 염려하는 것도 정신 건강에 안 좋다 싶어 일이 잘못될 지도 모른다는 방정맞은 생각을 애써 떨쳤다. 여분의 타이어가 없어서 벌어질 위험에 대해선 함구했다. 나 하나만 고민하면 되지. 언제나처럼 모닥불 주위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달랑 네 사람이서 한 차로 움직이는 처지에 낮동안의 대화에 이어 무슨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일까. 아마 불꽃이 주는 마력(魔力)때문이리라. 추위와 딩고 때문에도 불은 절실하다.

그러나 실용을 넘은 불의 효용을 알기에 사막에서 캠핑하는 모든 날 불을 피웠고, 우린 항상 불곁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불이 불을 감싸고 나무와 나무가 기대어 불을 받치면 자연스레 불 가까이로 모여 앉았고, 가라앉은 숯이 마지막 열기를 올려 또 불을 이을 때면 어느새 마음을 열렸다. 나무 타는 내음, 타닥거리는 소음, 피부에 감기는 열기에 감정은 무장해제 되었다. 사람을 향한 마음도 자연을 향한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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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밤 모닥불마저도 인위적인 사막의 밤. ⓒ 오창학


캠핑의 매력은 이렇게 삶을 단순화 한다는 데 있다. 추우면 불을 피우고 고프면 먹는다. 업무와 관리비와 각종 경조사 따위의 매인 것들을 내려놓고 그저 매트 밑에 등을 배기게 하는 돌 하나를 치우는 일이 최대 관심이 되는 단순함. 사막의 캠핑은 더욱 단순하다. 씻을 물도, 별도의 화장실도, 전기도, 휴대폰도 허락되지 않는 그저 '자연'이다.

금세 사막의 밤이 익숙해졌는지 어제의 기괴함과 음산함 대신 맑고 청정한 느낌으로 밤을 맞았다. 지평선에서 지평선으로 길게 이어진 별밭은 훑으면 쏟아질 듯 가득하다. 매일 보는 일출과 일몰의 감동이 늘 달랐듯 항상 하늘 가득한 별인데 볼 때마다 감정이 일렁인다. 모닥불마저도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절대 적막과 어둠, 그 상공으로 천연의 빛만 가득한 사막의 밤. 언젠가 캠핑을 하지 않는 동료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밤하늘은 파랗다고. 그는 믿지 못하다가 내가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야 수긍했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파란 밤. 달은 더디 떠오를 것이다. 모든 것이 평안하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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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횡단 1,350Km가 넘는 호주 최대의 사막. ⓒ 오창학



#호주 #아웃백 #대륙횡단 #사막 여행 #자동차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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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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