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골 브레이커', 노스페이스 말고도 또 있다

[학생부장 일기 12] 학교내 서열의 새로운 기준, 스마트폰

등록 2012.05.01 11:45수정 2012.08.2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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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학교에서는 도둑을 키우고 있는 겁니까?"

학부모로부터 다짜고짜 얻어 들은 핀잔이다. 자녀가 며칠 전에 사 준 스마트폰을 잃어버렸다면서, 학교의 무성의한 조치를 따져 묻는 전화였다. 익명 뒤에 숨어 내뱉은 '막말'이었지만, 그렇다고 화 난 학부모에게 언성을 높일 수 없어 그저 죄송하다고,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전화를 끊었다.

말투에 차이가 있을 뿐, 이런 전화는 하루에도 몇 통씩은 걸려온다. 그만큼 교실 내 사소한 분실과 도난 사고가 잦다는 얘기다. 담임교사들이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 화근이라면 화근.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개인 소지품 간수를 잘 하라"는 훈화 말고는 딱히 대책이랄 게 없는데, 이 말이 잃어버린 아이들을 되레 책망하는 것으로 들렸음직도 하다.

학교에서 스마트폰 도난 당해 경찰에 신고까지 하다

어떤 학부모는 학교의 무성의에 실망하고, 못 미더웠던지 아예 도난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마저 있다. 신고 접수를 하는 경찰도, 경찰로부터 연락받은 학교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대개는 예방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다짐을 서로 주고받으며 두루뭉수리하게 처리되기 일쑤다.

이미 학교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고, 몇몇 학생의 경우 교실 내에조차 설치하자고 주장할 만큼 분실과 도난 사고는 도를 넘어서고 있다. 친구끼리의 불신을 조장하는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지만, 전교생을 대상으로 대놓고 일괄적으로 소지품 검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학교 역시 답답하고 참담한 심정이다.

잃어버렸다고 신고하는 물건의 대부분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학교 내에는 분실물 보관 센터가 운영되고 있어, 일과 중에 아이들이 습득한 가지각색의 물건들의 쌓여있는데 스마트폰은 이상하리만큼 단 한 개도 없다. 스마트폰의 경우에는 잃어버린 아이는 있는데, 주운 아이는 없는 셈이다.


재미있는 건 찾아가지 않고, 쌓여있는 분실물 중 가장 많은 품목이 단연 구형 휴대전화라는 사실이다. 이른바 '2G폰'은 일부러 잃어버렸다고 할 만큼 아이들 사이에서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외관 상 멀쩡하고 통화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왜 찾아가지 않을까를 물었더니, 친구들 앞에서 꺼내 보이기가 창피하기 때문이라고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값비싼 스마트폰 지녀야 따돌림 안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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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자료사진 ⓒ 김시연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동영상을 끊어짐 없이 실감 나게 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이들 사이의 스마트폰 열풍에는 그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숨어있다. 값비싼 스마트폰을 지녀야 하는 건 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 당하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거다.

적어도 학교의 아이들 사이에서 스마트폰은 '통신기기'가 아니다.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레벨'을 증명하는 도구다. 이태 전부터 전국 모든 학교의 '공통 교복'으로 불렸던 노스페이스 열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모양새다. 노스페이스가 그랬듯, 스마트폰의 있고 없음, 나아가 어떤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가가 시나브로 아이들 사이의 서열을 정하는 기준이 됐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작년 말까지만 해도 노스페이스는 아이들의 서열을 결정하는 전국 공통의 절대적인 잣대였다. 물론, 처음에는 아이들끼리 노스페이스를 구입하기 위해 곗돈을 붓고, 성적을 흥정거리 삼아 부모님에게 떼쓰는 '수긍할 만한' 정도로 출발했으나, 학교폭력으로 비화될 정도로 이내 상황이 심각해졌다.

그저 '빌려' 입었을 뿐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갈취 행위가 아이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일어났고, 짝퉁을 입었다며 '찌질이'라고 놀리는 집단적 괴롭힘이 이어졌으며, 같은 정품끼리도 가격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처음엔 노스페이스를 구입하기 위해, 나중엔 비싼 것을 사기 위해 '올인'해야 했고, 그 덕에 부모들의 등골을 휘게 한다는 뜻에서 '등골 브레이커'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올 초부터 비뚤어진 노스페이스 열풍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자살 사건이 연이어지고 학교폭력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면서, '공통 교복' 노스페이스가 학교폭력의 주범으로 지목받았기 때문이다. 노스페이스를 입었다고 다 '일진'은 아니지만, '일진' 치고 노스페이스를 입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노스페이스라는 이름이 억울하게 학교폭력의 대명사쯤으로 내몰리면서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주춤해진 가운데, 그 틈을 스마트폰이 노리고 들어온 양상이다. 대개 아이들은 브랜드별, 기종별 판매 가격을 구구단 외듯 꿰고 있고, 그에 따라 시나브로 새로운 서열이 만들어지고 있다.

브랜드별, 기종별 판매 가격을 구구단 외듯 꿰고 있는 아이들

얼마 전 경찰에 분실 신고를 한 스마트폰의 경우 100만 원을 호가하는 최신형 제품이라고 하는데, 부모에게 그토록 값비싼 스마트폰을 사 준 까닭을 물었다. 기껏해야 동영상 강의 들으며 공부하겠노라며 사달라고 졸랐을 텐데, 아이들 사이에서 뻔히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절도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간과한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가계에 적잖은 부담도 되고 마음도 내키지 않았지만, 부모로서 아이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작년엔 친구들 모두 노스페이스 점퍼를 입고 다닌다며 사달라고 떼쓰더니 올 초부턴 다 '4G'니 '노트'니 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며 노래를 부르더군요."

왕따 문제 등 학교폭력이 심각한 요즘, 그렇잖아도 의기소침한 아이의 '안전한' 학교생활을 위해서 학부모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사소한 놀림거리 하나로도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 당하는 현실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어떻든 남들 다 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하소연이다.

바야흐로 아이의 자존감이 노스페이스에 이어 스마트폰의 기종과 가격에 따라 저울질 되는 어처구니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TV든, 인터넷이든 켜기만 하면 스마트폰 광고로 넘쳐나는 현실과 오로지 돈이면 행복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천박함에 아이들조차 물든 탓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런가 하면 내면보다는 외양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형식 문화가 뿌리 깊은 탓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기준을 달리 하며 끊이지 않고 순위가 매겨지는 학교 내 아이들 간 '서열 놀이'라면,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눈을 우선 비뚤어진 학교문화로 돌려야 한다는 뜻이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에겐 어릴 적부터 남을 딛고 올라서야 성공한다는 강박과 어차피 세상은 무한 경쟁의 정글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마치 본능인 것처럼 여기게 됐다.

아이들은 남을 이길 수 없다면 최소한 다수의 울타리 안에 어떻게든 들어가야 안심할 수 있는 사회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배제되고, 아이들 사이에서 한 번 찍히면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것이라 두려워한다.

몇해 전, 꽤 유명했던 TV 광고 카피 한 꼭지가 떠오른다.
"당신이 어디에 사는가가 당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줍니다."

요즘 아이들의 현실을 빗대보자면 이쯤 되려나?
"네가 쓰는 스마트폰이 네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이렇듯 아이들의 영혼이 좀 먹는 현실에서, 학교폭력은 어쩌면 '덤'이다.
#스마트폰 #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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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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