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글 지킨 이극로 선생 누리집 탄생

등록 2012.03.03 15:34수정 2012.03.0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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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루 이극로박사 기념사업회 누리집(http://goru.kr)이 올해 삼일절 기념일에 등장하였다. 외솔 최현배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으나, 이극로(1893-1978, 호는 고루)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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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 가족 사진 (부인 김공순 여사, 오른쪽부터 장남 억세, 가운데 대세, 어린아이 한세, 장녀 세영) 1939년 12월 24일 결혼 10주년기념으로 찍음. ⓒ 이종수


이극로는 일생을 한국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운동가요 한글운동가이다.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던 시절 그는 과거 독일과 영국이 각각 폴란드와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했을 때 폴란드말과 켈트어를 말살했듯이, 이들 나라를 모델로 하여 식민정책을 펴고 있던 일본제국주의자들도 조선을 지배하면서 민족말살차원에서 조선어를 말살할 것을 예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민족의 말과 글을 영구히 지키는 한글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1929년 1월 귀국한 이후 그는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를 이끌어가면서, 동료학자들과 함께 민족어 3대 규범집(<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통일안>(1941))을 완성하였다. 동시에 민족어사전 편찬사업을 추진하고자 조선어사전편찬회(1929)를 조직한 뒤 1942년까지 14년간 오직 우리말사전 편찬에 헌신하였다. 1942년에 16만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의 뜻풀이가 담긴 <조선어사전>

이 발간을 앞두고 있었는데, 일제의 탄압 때문에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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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1940) 조선어학회 편찬 ⓒ 박용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이극로가 언어독립운동을 일관되게 전개하였기에, 그는 일제로부터 가장 무거운 징역 6년의 판결언도를 받아 함흥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해방 뒤에 석방되었다. 이극로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한 최현배 선생은 그의 행적을 '일신의 안일과 집안의 이익에 급급한 현대인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을 극복해 내었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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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큰사전> 6권(1947-1957)의 모습 조선어학회 지음 ⓒ 박용규


해방 뒤에도 이극로는 우리나라의 국어교육을 확립하고자 많은 활동을 하였다. 아울러 그의 진두지휘로 1947년 민족어사전인 <조선말 큰사전>1권을 발간하였다. 1948년 4월에는 평생 독립운동에 몸 바친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그 뒤 그는 북한에 잔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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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노래 1945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해 이극로가 작사함. 한글날 행사에 이 노래가 불려졌다. ⓒ 박용규

북한에서도 1978년 서거 전까지 30년간 우리말글 연구에 헌신하였다. 북한의 언어정책을 이끌어 갔고, 특히 <조선어소사전>(1956) 편찬에 기여하였다. 북한에서의 활동 역시 우리 민족을 위해 바쳤다. 1992년 북한 정권에서도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반일애국열사'로 평가하였다.

이극로의 북한 잔류와 행적을 두고 혹자는 아직도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있다. 분명히 밝힌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일제시기나 해방정국기 사회주의 단체나 좌익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는 남북의 정치세력이 힘을 합쳐 대화를 통해 평화로운 방법으로 통일국가를 수립을 염원한 민족주의자였다. 김일성을 만난 김구 선생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였듯이, 이극로 역시 독립운동가요 민족주의자였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정신과 생명이 있을진댄 그 민족은 영원불멸할 것이니, 또한 행복은 필연적일 것입니다'라고 이극로는 말씀하였다. 이러한 이극로의 우리말글 사랑과 민족 사랑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보편타당하다. 언어는 민족의 혼을 담는 그릇이다. 현재 남북으로 국토, 국가, 민족이 분단되어 있지만, 다행스러운 점은 언어가 분단되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 이극로 박사를 포함하여 한글학자들이 목숨을 바쳐 우리말글을 연구하고 지켜냈기에, 언어의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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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13일 조선어학회 재건시 사진(<한글학회100년사>에서) (앞줄 왼쪽 첫 번째부터 김병제 이병기 한분 건너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분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 김윤경 선생) ⓒ 한글학회


이러한 이극로 박사의 우리말 사랑과 민족 사랑과 나라 사랑의 가르침을 잘 살려 남북의 동포들이 교류하고, 민족어의 연구와 계승을 통해 민족 화해와 평화 통일의 기초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이극로 선생의 삶과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시민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
#이극로 #조선어학회 #조선말큰사전 #한글맞춤법통일안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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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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