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산하의 신음소리, 더 이상 듣지 않았으면...

[새로 찾아내는 길 이야기, 충주 둘레산길 ②] 발티와 성재 그리고 석종사

등록 2012.02.28 09:57수정 2012.02.2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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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티봉과 발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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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미면 향산리 ⓒ 이상기


대림산 아래 향산리는 살미면에 속한다. 살미면은 남한강을 끼고 있는 산골로 모두 13개 법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충주댐이 생기면서 3개(문화리, 신당리, 무릉리) 리가 수몰되어 현재 살미면에는 10개 리만 남아 있다. 향산리는 살미면의 가장 서쪽에 있으며, 대림산을 경계로 충주시 단월동과, 달천강을 경계로 충주시 풍동과 맞닿아 있다.


살미(乷味)이라는 이름은 물결이 급하고 센 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남한강 물살이 산골짜기를 지나면서 급해지고 빨라지기 때문이다. 충주 둘레산길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향산1리다. 아랫말, 장광, 웃말, 곰말, 둥튼말로 이루어졌으며, 이중 중심 마을은 역시 아랫말과 웃말이다. 가까이 보이는 웃말에는 평택 임씨가, 그 아래 보이는 아랫말에는 여산 송씨가 주류를 이루며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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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둘레산길의 진행거리와 표고 ⓒ 이상기


나냉이재에서 우리의 다음 목표지점인 발티봉까지는 2km 정도 거리로 1시간쯤 걸린다. 이 길은 300m 고도에서 549m까지 오르막길로 되어 있어서 만만치 않다. 이 길에는 오르막일 뿐 아니라 특별한 문화유산이나 스토리가 없어 심심하고 지루하기까지 하다. 발티봉이라는 이름은 발티라는 고개 이름에서 따 왔다. 그런데 정상석에는 발치봉이라고 새겨 놓았다. 치와 티 모두 고개를 나타내는 옛말이다. 그런데 충청도에서는 치보다는 티라는 어휘를 사용한다.

이번 탐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발티봉인지라, 우리는 이곳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지나온 대림산 쪽을 살펴본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금봉산 방향을 바라본다. 금봉산 산자락에는 산성이 보인다. 충주산성으로 알려진 테뫼식 산성이다. 금봉산 아래로는 석종사(釋宗寺)가 자리 잡고 있다. 석종사는 금봉산의 첫째가는 절집으로 이번 답사의 종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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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티에서 바라 본 충주호쪽 풍경 ⓒ 이상기


이곳에서는 또한 충주시 호암동에서 발티에 이르는 골짜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발티는 호암동 곧은골(直洞)과 발티 마을을 지나 살미면 재오개리 도선골로 넘어가는 고개다. 이 고개는 옛날 충주 사람들이 살미와 황강을 거쳐 청풍으로 가던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1929년 충주와 단양을 잇는 36번 국도가 세성리를 지나 용천리로 이어지면서 발티를 넘나드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길이 되고 말았다. 1950년대까지 장사꾼과 소장수들이 5일장을 보러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때의 추억을 80~90대 노인들만 겨우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발티에 가까워지니 충주호가 보이기 시작한다. 현재 발티에는 도수터널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발티 아래로 4.3km의 도수터널을 뚫어 재오개 쪽의 충주호 물을 충주시내 하천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이 물은 농업용수와 생활용수로 사용될 뿐 아니라, 충주천의 수질을 개량하고 도시 환경을 개선하는데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발티 아래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지만, 발티마을에서 도선골까지 이어지는 옛길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신음하는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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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음하는 산하 ⓒ 이상기


발티를 지나면 길은 다시 오르막이다. 산길을 따라 오후의 햇살이 쏟아진다. 우리는 축대처럼 쌓은 돌무더기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우리의 다음 목표는 499m봉이다. 300m 정도의 발티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려니 만만치 않다. 산행을 하다보면 고도보다는 고저가 심한 구간에서 지치는 경향이 있다. 둘레산길이라고 해서 쉽게 생각한 일부 회원들이 굉장히 힘들어 한다. 경험이 많은 대원이 뒤에서 이들을 격려하고 탐사대장은 앞으로 계속 전진한다.

이제 발티마을과 상재오개를 연결하는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의 이름은 분명치 않다. 그런데 고개 서쪽으로 채석장이 있다. 채석장에서 발티마을로는 길도 나 있다. 현장을 살펴보니 토석채취 허가를 받아 골재를 채취하는 일종의 광산이다. 산의 훼손 정도가 대단히 심각하다. 과장하면 산 하나가 파헤쳐져 골짜기가 생겨난 모양이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공사는 안 하고 포클레인 등 기계들만 보인다.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으니 토석채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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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산하 ⓒ 이상기


산행을 하다 보면 인적이 뜸한 산골에서 토석을 채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산속에 좋은 돌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사 현장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소음 걱정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장에 대한 복구나 복원이다. 그들은 이익이 나면 그것을 나눠갖는데 바쁘지, 복원이나 환경 같은 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속이 파헤쳐진 채로 버려진 토석 채취장이 곳곳에 의외로 많다. 복원이라고 해 놓은 것도 흉내만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는 산하는 개발이 아닌 보존에 신경써야 한다. 개발이 일시적으로 편리하고 돈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번 파괴된 것은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높은 봉우리부터 4대강 물길까지 함부로 건드릴 일이 아니다. 산길 물길은 역사와 세월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고, 가장 안정된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고통 받는 산하, 그들의 신음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성재와 성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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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오개 성황당 ⓒ 이상기


토석 채취장만 없다면 능선을 따라 갈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왼쪽으로 우회해야 한다. 산길 옆으로 펜스를 쳐 놓았고, 그 밑으로는 천길 낭떠러지다.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길은 450m 고지까지 계속 오르막이다. 산에 오르니 상재오개에서 진의실로 넘어가는 길이 구불구불 펼쳐진다. 이제 길은 성재를 향해 내리막길이다. 성재는 직동에서 석종사를 지나 상재오개로 넘어가는 고개로, 최근에 남산 임도가 생기면서 포장이 되었다. 그래서 이곳으로의 통행량이 옛날보다 많아졌다.

성재로 내려가다 보니 세 개의 느티나무 사이로 서낭당이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재오개 성황당이라 부른다. 그것은 충주호 수몰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다리가 있는 한 칸짜리 판잣집을 짓고 그 위에 함석지붕을 얹었다. 그래도 주변에는 금줄도 치고 색동옷도 있고, 징도 갖추어 놓았다. 성황당 문을 열어보니 성황지신(城隍之神)이라는 위패도 보인다. 위패 앞에는 청동향로에 향이 꽂혀 있고, 도자기 뫼그릇도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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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의 위패 ⓒ 이상기


이를 통해 이 성황당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과 7월 보름에 동제가 올려진다고 한다. 재원이 부족해 제물로는 술과 뫼, 삼색실과와 북어, 떡과 돼지고기 정도가 마련된다. 축문은 제관이 준비해 와 읽는데, 한글로 음만 달아 놓아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대략의 뜻은 '봄을 맞이하여 주민이 무고하고 만사가 길하기를 바라면서 제를 올린다'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유세차  ○○정월 ○○삭 십오일○○ 유학○○○ 감소고우
이사지신 유차초춘 약시소사 이민무고 길뢰휴 흠명존 전거상향"

이제 석종사가 충주 제일 가람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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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아래에서 만난 문인석 ⓒ 이상기


성황당에서 길은 남산으로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충주 둘레산길 탐사를 두 번에 걸쳐 하기 때문에 1차 탐사를 이곳에서 마감하려고 한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성재를 넘어 석종사로 이어진다. 성재에서 석종사까지는 임도가 나 있어 길은 좋은데 산길을 걷는 맛은 안 난다. 고개를 넘으니 길 오른쪽으로 무덤들이 보이고 그 앞에 석물이 세워져 있다. 크기가 작지만 문인석이다.

두기가 있는 데 한 기는 조금 더 오래돼 보이고 또 한 기는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묘표를 보니 평택임씨와 충주석씨의 합장묘다. 이곳을 지나 다시 길을 더 내려오니 산비탈을 따라 사과나무 과수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남향으로 볕이 잘 들어 과수원으로서의 조건은 아주 좋은 편이다. 과수원 아래로는 5~6가구 정도 사는 마을이 있고, 그 옆으로 석종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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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티봉에서 바라 본 석종사 ⓒ 이상기


석종사는 그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던 죽장사 터에 1983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봉암사에서 수행중이던 혜국선사가 꿈에 나타난 스님을 좇아 전생의 인연이 있던 죽장사를 찾아 나섰고, 이곳 충주땅 곧은골에서 그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현재 석종사는 10만 평의 부지에 18개 건물이 있는 대가람이 되었다. 대표적인 법당과 선원으로는 대웅전, 오화각, 소소원, 안양원, 금봉암, 조종육엽, 금봉선원, 천척루, 회명당, 원흥료, 보월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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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종사 대웅전 ⓒ 이상기


석종사는 승려를 위한 절이기도 하지만, 재가자(在家者)가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절이다. 그래서 재가자들이 수행과 요양을 겸할 수 있는 선원을 만들어 놓았다. 보월당이 시민선원으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보월당(寶月堂)이라는 당호도 보배로운 마음달이 온 세상을 비춰 모든 번뇌와 망상을 잊게 해준다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석종사에서는 절을 찾아 수행하는 불자들을 위해 일반 사람들이 크게 떠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석종사에는 현재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 <육조단경(六祖壇經)> <상교정본 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 慈悲道場懺法)> 같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혜국선사는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깊어 최근 신라시대의 서성 김생 관련 자료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전유암산가(田遊巖山家)>가 있다. 절을 내려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절이라는 것 역시 사람이 만드는구나 하고, 30년 전만 해도 이름 모를 탑만 하나 있던 황량한 곳이 이렇게 커다란 절로 변했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석종사 누리집은 http://www.sukjongsa.org


덧붙이는 글 석종사 누리집은 http://www.sukjongsa.org
#발티 #발티봉 #성황당 #성재 #석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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