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네틱스 정리해고, 나쁜 일자리로 가는 로드맵

[주장] 규제 덜한 비정규직 간접고용 늘린 풍선효과... 잊지 말자

등록 2012.02.20 18:40수정 2012.02.2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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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 전성시대다. 자본은 '경영상 어려움에 의한 해고'라고 하지만 실제로 정리해고가 일어난 사례를 보면 물량 빼돌리고, 현지 공장 축소하려고 해고, 주주 배당 많이 해서 자기들 배불리려고 해고, 민주노조가 눈엣가시라서 해고하는 경향이 있다.

21명의 목숨을 앗아간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가 그렇고, 400명을 해고한 한진중공업은 노동자들을 해고한 그 해 1백74억 원 주식 배당에 52억 원 현금 배당도 모자라 경영진 평균임금을 1억 원 인상하는 돈잔치를 벌렸다.

이러한 '경영상 어려움' 없이도 이뤄지는 '합법적인' 정리해고를 보며, 국민들의 마음속에 정리해고라는 단어는 '1% 가진놈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힘없는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것'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자리잡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도 부족해 자본의 정리해고 활용 사례가 일취월장 진화하고 있다. 영풍그룹, 시그네틱스의 정리해고 사태를 보면, 자본은 정리해고를 통해 당장의 이윤을 취하기도 하지만 나아가 구조조정, 노동유연화의 처음단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리하게 밀어부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구조조정의 모범 메뉴얼, 시그네틱스 해고사태

2000년도부터 영풍그룹은 자사의 모든 반도체 계열사에 인력 구조조정을 진행한다. 2001년 시그네틱스 서울 염창동 공장을 파주공장으로 확장, 이전하는 과정에서 시그네틱스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일방적으로 안산공장에 발령 내고 본사의 파주공장의 생산라인 전체를 사내하도급(소사장제)화 한다.

이후 10년 동안 코리아써키트, 인터플렉스, 영풍전자 등 반도체 생산공장 생산라인 전체를 소사장제로 만들어 정규직 제로(0) 공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7월 시그네틱스 안산공장을 두 개의 사내하도급 회사(퓨렉스, 유앤씨)로 쪼개는 작업을 시도했다. 하지만 시그네틱스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발에 부딪히자 이들을 정리해고하고 안산공장에서 시그네틱스 간판을 철수해버렸다. 이로써 영풍그룹 정규직 0%, 꿈의 공장 만들기 프로젝트는 마무리됐다.


대공장이 아닌 중소규모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소사장제', 특히 영풍그룹의 IT계열사 같은 전기전자 하청업체가 밀집해 있는 반월시화국가산업단지(반월시화공단) 내 대다수 고용 형태는 소사장업체의 정규직이다. 하지만 회사와 모기업과의 계약관계 자체가 불안정하다는 점에서 소사장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비정규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소사장제는 사내 분사경영의 한 형태로 동일사업장에서 근무하던 노동자(통상 직반장이나 관리자, 임원)에게 일부 라인이나 제조공정을 도급주는 형태로 사내하청의 초보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소사장이 모회사로부터 독립해 경영 한다면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소사장은 형식만 독립사업자로 해놓았을 뿐, 실제로는 모회사의 지휘, 감독 하에 근무하는 업무 담당자의 지위에 불과하다.

실제로 영풍그룹의 경우에도 시그네틱스의 과장출신이 계열사 코리아써키트의 일부라인 소사장을 하고 있거나, 시그네틱스 조합원들이 해고되기 직전까지 교섭대표이던 부사장이 안산공장의 신설 도급업체인 유앤씨의 대표이사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소사장 밑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의 경우, 실제로 모회사의 지휘 감독하에 근무하지만 형식상으로는 독립사업자인 소사장에게 고용된 것으로 돼 있어, 고용과 사용이 분리된 간접고용 문제가 발생한다. 이 경우 사내하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또한 파견법이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제조업 등의 직접 생산공정업무에 투입되는 경우로 불법파견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비정규직법 피해가는 '나쁜 일자리'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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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네틱스 위장하도급 실태 2월 15일 시그네틱스토론회에서 윤민례분회장이 시그네틱스의 위장하도급 사례를 폭로하고 있다. ⓒ 금속노조


실제로 이러한 일은 영풍그룹 내에서 뿐 아니라  대다수 중소사업장, 특히 전자산업 하청업체에 만연해 있다. 반월시화공단내 꽤 유명한 반도체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한 여성 노동자의 경우,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6년 동안 해왔는데 업체가 4번 바뀌고 사장이 2번 바뀌었다고 한다. 이 회사는 22개의 소사장 라인에 2천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데 다른 업체들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한겨례>는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 "정규직 채용을 유도하기 위해 법으로 계약직에 대한 보호를 강화했더니,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또다른 비정규직인 간접고용 노동자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노동계에서는 이를 두고 '풍선효과'라 부른다.

합법으로 포장된 사내하도급, 소사장제 등의 간접고용이 하청노동자들의 고용과 노동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하다.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인력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들의 경우 시설과 기술을 투자해 이윤을 창출하기 보다는 작업공정을 쪼개어 조반장, 관리자에게 하청을 주고 생산량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고 고용과 노무의 책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소사장제가 돈을 벌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일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근로조건을 악화시키고 고용불안을 증가시킬 뿐이다.

실제로 시그네틱스 파주공장 소사장라인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와 시그네틱스 안산공장의 정규직 노동자가 해고되기 전 받던 임금의 차이는 30% 정도 났던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시그네틱스 회사 측은 한 경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해고자들을 파주공장으로 복직시키면 함께 일하는 하청 노동자들과 임금 등 조건차이가 많이 나서 위화감이 조성될 수 있다"며 스스로 사내하도급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를 인정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처음 정규직 노동자들을 소사장업체로 전직시키는 과정에서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임금과 근로조건을 맞춰 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임금과 근로조건이 저하되는 것은 중간 하도급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해야하는 자본의 속성상 필연적인 귀결인 셈이다.

자본의 시나리오는 단순, 명료하다. '정리해고한 정규직 일자리, 나쁜 일자리로 채워라.' 이것이 자본의 메뉴얼이라면 노동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응도 좀 더 앞서 갈 필요가 있다. 정리해고 철폐하고 현장으로 돌아간들, 자본은 끊임없이 비정규직, 간접고용 등 나쁜 일자리로 공장을 채우기 위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번, 세 번의 해고는 어렵지 않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총선을 앞두고 비정규직법의 풍선효과를 교훈삼되 실제로 진화되고 있는 자본의 간접고용, 나쁜 일자리까지 막을 수 있는 실질적 입법 방안이 모색되고 준비돼야 하는 이유다. 그럴 때만이 자본의 정리해고 로드맵을 원천봉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그네틱스 #정리해고 #사내하도급 #소사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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