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된 박수무당... 그의 성공 비결은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첫번째 이야기

등록 2012.01.11 20:22수정 2012.01.1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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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 MBC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MBC 수목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는 이색적인 풍경이 나온다. <주몽>이나 <김수로> 같은 고대 사극에서나 볼 수 있었던 신관(神官)들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하면 흔히 '유교'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의 눈에는 의아하게 비쳐질 법한 풍경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도 국가가 한민족 고유의 전통 신앙을 관리했다는 점은 서울 남산 꼭대기만 가 봐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가 남산의 산신을 숭배할 목적으로 세운 국사당의 터가 남아 있다.

적어도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신녀(무녀·무당)들로 조직된 성수청이란 국가기관이 존재했다. 조선과 교류했던 같은 시기의 오키나와왕국에서 '기코에오오카미'라는 최고 신녀가 33명으로 구성된 신녀 조직을 지휘한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런 신관들의 위상은 고대로 갈수록 훨씬 더 막강했다. 그래서 고대에는 이들이 국가 요직을 차지하거나 아니면 통치자 자리에까지 오르는 사례가 많았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계자이자 제2대 군주인 남해차차웅(남해왕)도 남자 무당 출신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신라시대, 무당도 왕이 됐다

"차차웅은 자충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의 말에 따르면, (이 단어는) 방언으로서 무당을 의미한다고 한다. 무속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했다. 존귀하고 연로한 자들을 자충이라 차츰 부르게 되었다."

신라에서 무속인들이 사회적 존경을 받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무당인 남해왕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수입 신앙인 유교가 급격히 확산된 7세기 중반 이전만 해도 신라에서는 전통 신앙인 신선교가 훨씬 더 막강했고, 신선교의 지도자들은 조선시대 선비 이상으로 사회적 존경을 받았다. 남해왕의 등극도 그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통 신앙의 권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에서도 발견된다. 백제 멸망 직전인 의자왕 20년 2월(660년 3월 17일~4월 15일), 지금의 충남 부여에 있는 왕궁에서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는 글귀가 등판에 새겨진 거북이가 발견됐다.

이때 의자왕은 무당에게 자문을 구했다. 정치적 판단보다는 직업적 소신으로 무장한 이 무당은 "백제는 기울어질 징조이고, 신라는 차츰 커질 징조"라고 해석했다. 의자왕이 격분해서 무당을 죽이기는 했지만, 이 사례는 한민족 고유의 신앙이 고대 국가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는지 잘 보여준다.

유교와 거리가 먼 고대 신앙의 신봉자들이 국가행정 사무를 담당한 사례는 중국·일본의 역사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된다. 고대 주나라의 통치체제를 정리한 <주례>에는 주술 사무를 담당하는 여축이란 궁녀 직책이 나온다.

또 고구려·백제 멸망 이후에 해당하는 일본 헤이안 시대(8세기 이후)에는 신기관이라는 신관 조직이 주요 국가기관의 지위를 차지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한·중·일의 사관들도 원래는 주술 사무와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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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의 국사당 터. ⓒ 김종성


영적 능력, 어디서 생긴 것일까?

이처럼 무속신앙과 가까운 지식인들이 사회적 존경을 받은 것은 그들의 영적인 능력 때문이었다.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미래까지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그들의 주 무기였다. 그럼, 그런 능력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현대의 무당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신관들은 자신들이 신을 비롯한 초자연적인 존재의 도움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정말로 그랬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전체 우주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상식만으로 고대 신관들의 말을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인간 사회에는 대부분의 인간이 공감하는 보편적인 인식 방법이 있다. 현재로서는 그런 방법에 의지해서 고대 신관들의 실체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최선인 그런 방법을 동원해서 고대 신관들의 후계자인 현대 무당들을 관찰한다면, 그들의 실체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2009년에 작고한 서정범 교수(민속학자·국어학자)는 무속신앙에 흥미를 느껴 1950년대부터 약 3000명의 무당과 인터뷰를 했다. 그가 쌓은 학문적 성과가 현재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대답 중 하나를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서 <한국 무속인 열전>에서 서정범은 "무녀들은 뇌파에 의해 손님의 잠재의식을 해득하는 능력이 있다"고 정리했다. 1998년 7월 16일호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무속인은 상대방이 방출하는 기(氣)와 거기에 담긴 정보를 해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기'는 뇌파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무당은 뇌파에 담긴 정보를 해독해서 상대방의 과거를 파악하고 과거에 대한 지식을 기초로 상대방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이 서정범의 결론이다. 일반인들이 역사에 대한 정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로 점을 친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각 분야마다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한국사에는 한국사 나름의 패턴이 있고, 경제사에는 경제사 나름의 패턴이 있다. 이런 패턴들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또한 향상될 수 있다. 무당도 그런 원리로 점을 친다고 생각하면 서정범의 결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인들도 처음 만난 사람의 행색이나 인상 등을 보고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 왔겠구나'라고 추측하고, 더 나아가 '이 사람은 앞으로 이렇게 되겠구나'라고 예측할 때가 많다. 사실, 모든 인간은 조금씩 영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무당들의 경우에는 그런 능력이 특히 전문적으로 발달했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영적인 능력이 전문적으로 발달한 탓에, 무당들은 일반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하고 민감하다. 무당들이 멀쩡한 사람을 보고 나비나 꽃 혹은 동물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례가 많은 것은, 그들이 시인들보다도 더 민감한 감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인들은 느낄 수도 없는 인간의 뇌파까지 감지할 수 있으니, 그들의 감수성은 시인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무당이 과학자처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뇌파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선천적인 혹은 후천적인 계기에 힘입어, 뇌파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통해 앞날을 예견하는 능력을 자기 자신도 모르게 갖추게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무당이 24시간 내내 이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 중 일정 시간 동안은 무당도 일반인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몸에 '할머니'나 '할아버지' 혹은 '동자'가 들어왔다고 느끼는 순간, 무당은 일반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으로 바뀐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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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이래의 신선교 신앙을 반영한 장소라고 알려진 참성단. 인천시 강화군 마니산 소재.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고대 신관, 최고의 인재들이었다

이처럼 현대 무당들이 뇌파에 담긴 인간의 이력을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면, 이들의 선배인 고대 신관들도 그것과 같거나 비슷한 방법으로 영적인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유교적 합리주의로 무장한 선비나 서구적 합리주의로 무장한 현대 지식인 같은 인재가 드물었던 고대 세계에는, 사물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중추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 통치자들이 그들을 신임하고 중용한 것은 당시로써는 그들이 최고의 인재들이었기 때문이다.

<해를 품은 달>에 나타난 것처럼 조선시대까지도 신녀들로 구성된 국가 기관이 있었다는 것은, 직관력에 의존하는 지식인들이 불과 몇백 년 전까지만 해도 사회 곳곳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때는 사회적 존경을 받았던 무속인들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주류가 아닌 것을 지켜보면서, 정치인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의 세계에도 존재하는 세대교체의 문제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에 무속의 혁파를 부르짖으며 지식 권력을 잡은 유교적 선비들은 현대 사회에서 주류의 지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유교적 선비들을 비판하며 지식 헤게모니를 잡은 현대의 서구적 합리주의자들도 언젠가는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

새로운 인식방법이 세계를 휩쓰는 날이 되면, 오늘날 우리가 '차가운 시선'으로 과거의 신관들을 바라보듯이 미래 사람들도 그런 시선으로 현재의 지식인들을 바라보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분야에서나 권력은 무상한 법이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동시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앞선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겸손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무속신앙을 무조건 깔보고 짓밟고 올라섰다가 결국에는 그 자신도 비주류의 처지로 내몰린 수많은 선비들의 경험으로부터 현대 지식인들은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해를 품은 달 #무속 #무당 #신녀 #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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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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