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세~7세 주민이 만든 '죽곡 마을시집'

마을시집 <소, 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

등록 2011.12.30 17:53수정 2011.12.3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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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시집을 펴낸 곡성 죽곡마을 주민들. 지난 10일 시집 출판기념회 때 자리를 함께 했다. ⓒ 죽곡농민열린도서관


'팔십 평생 살아오면서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 이제사 돌아보니 / 왜 이렇게 아등바등하며 살았는지 / 이제는 몹쓸 놈의 병을 얻어 / 발 한 짝도 내디딜 수가 없네 / 방안에 앉아 하루 종일 마당 앞에 심어 놓은 / 호방 덩굴 자라나는 모습이며 / 텔레비전에서 전해주는 세상 이야기와 / 연속극을 보는 게 내 생활이 되었네 / 저 산에 해 저물어가듯이 내 인생도 저물어가네'

김봉순의 시 '내인생' 전문이다. 이 시에는 나이 들어 병든 몸으로 방안에 앉아 호박 덩굴 자라나는 모습과 텔레비전에 의지해 사는 삶이 눈에 선하다. 김씨는 올해 여든여덟 된 할머니다.


'올해 논에다 콩 심었더니 / 거름이 너무 많아 키가 커서 / 베어줄까 걱정을 했는데 / 마침 노루가 들러 적당히 끊어 먹어서 / 올해 콩 농사는 풍년 들겠네'

정계순의 시 '밭농사' 전문이다. 콩을 심어놓은 농부의 소박한 마음과 노루가 드나드는 산골마을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다. 정씨는 올해 일흔 된 할머니다. 두 분 모두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용정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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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죽곡마을 주민들의 시집 〈소, 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의 앞표지. 표지모델은 요즘 한시 쓰는 재미에 푹 빠져사는 죽곡면 태평리 최태석 씨의 모습이다. ⓒ 이돈삼


죽곡농민열린도서관(관장 김재형)이 최근 엮은 마을시집 <소, 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에 실려 있는 시(詩)들이다. 도서출판 강빛마을에서 펴낸 이 시집에는 곡성군 죽곡면에 사는 주민들이 직접 쓴 시로 채워져 있다.

올해 88세인 김봉순 할머니에서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 7살 이지현까지 같은 면에 살고 있는 주민 105명이 시를 썼다. 실린 작품 수는 모두 114편. 시인 백무산과 조은산의 여는 시와 축하 시, 그리고 여행작가 유성문의 마을이야기 '죽곡 죽곡사람들'은 덤이다.

시집의 제목은 최태석(61·죽곡면 태평리)씨의 시 '소-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에서 따왔다. 시집에 실린 이들 시에는 주민들이 농촌에 살면서 느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주민들의 눈에 비친 풍경도 보이는 그대로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표현방식도 소박하고 진솔한 시어를 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애틋한 사연들은 감동까지 안겨준다.

'나이 팔십 넘어 / 시작한 공부 / 다섯 달째 / 머리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 선생 얼굴보고 나온다 / 멍청하니 할 수 없다.'

오태순(85·죽곡면 용정리) 할아버지의 시 '나이 팔십 넘어' 전문이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 머리에 남는 것도 없지만 가르치는 선생님의 마음까지 배려하는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마음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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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열린 죽곡마을시집 <소, 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의 출판기념 잔치. 어린이 풍물패가 나와 풍물공연을 하고 있다. ⓒ 죽곡농민열린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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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곡농민열린도서관을 찾은 마을 어린이들. 이들은 도서관에서 학교숙제를 하고 책을 보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다. ⓒ 이돈삼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의 글만 마음에 와 닿는 게 아니다. 나이 어린 어린이들의 순박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시도 많다. 곡성중앙초등학교에 다니는 최호원(8·죽곡면 상한리) 어린이의 시 '애국가는 어렵다'이다.

'애국가 / 1절부터 4절까지 / 도대체 무슨 말인지 / 하나도 모르겠다 / 사랑 '애' / 국가 '국' / 노래 '가' / 나라를 /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 그런데 왜 나는 / 그런 마음이 하나도 안 생기지?'

일상에서 느끼는 소재로 어린아이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기발하다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묻어나는 내용이다. 한편으로는 금세 수긍이 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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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곡농민열린도서관 김재형 관장(왼쪽)이 지난 28일 소문을 듣고 도서관을 찾아온 방문자들과 만나 도서관 운영, 마을시집 발간 등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다. ⓒ 이돈삼


이렇게 마을주민들의 시집을 묶어낸 이는 김재형(47) 죽곡농민열린도서관장. '경상도 사나이'로 살다가 전라도에 들어와 지난 2004년 8월 농민도서관 개관을 준비하면서 처음 시집 발행을 생각했다고.

"그때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는데요. 그 카페에 하나 둘 지역 농민들의 글이 올라왔죠. 그런데 가끔이었지만 시도 올라왔어요. 자기 삶의 힘들고 고단함,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농민들이 쓴다는 게 참 소중하다고 생각했었죠. 언젠가 우리에게 힘이 생긴다면 마을문집을 꼭 한번 만들어보자고…."

그러던 지난해 12월 전남문화예술재단의 문화사업 공모 안내를 보고 주민들의 시집 발간을 신청했다. 그리고 100만 원의 지원금을 받게 됐다. 하지만 노인들만 남은 산골마을에서 시집을 만드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도 헛웃음만 지었다. 심지어 100만 원을 돌려주고 시집 발간을 취소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문제는 지원금 100만 원이었어요. 그래서 100만 원을 전부 원고료로 지불하기로 마음먹었죠. 죽곡마을 시문학상을 공모하기로 하고 홍보물을 만들어 마을에 돌렸죠. 참가자에겐 지역에서 쓸 수 있는 상품권을 주겠다는 내용과 함께."

먼저 어린이들이 반응을 보였다. 평소 도서관을 드나들던 아이들은 시 쓰는 일을 놀이처럼 받아주었다. 다음에는 농민회원들이 참여하고 노인들도 나섰다. 지난 5월 부임한 이 고장 출신의 김순기 면장은 시집 발간계획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전부터 시를 써오던 김 면장은 마을시집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 주었다. 면장이 직접 시를 써 주고 면사무소 직원은 물론 마을이장들에게도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집집마다 시를 쓰고 또 시집을 엮는 일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팔을 걷은 것은 시집발행보다도 더 큰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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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기 죽곡면장이 지난 10일 죽곡마을 시집 <소, 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 출판기념 잔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 고장 출신의 김순기 면장은 마을시집 발간의 숨어있는 공동 편집자였다는 게 김재형 관장의 얘기다. ⓒ 곡성농민열린도서관


김 관장은 "2년쯤 뒤에는 마을 주민들이 쓴 수필과 단편소설을 묶는 마을이야기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면서 "이번 시집 발간이 자연과 함께 숨쉬며 맑고 밝고 따뜻한 감수성에 가득 찬 새로운 농촌문화를 만드는데 조그마한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평리 대황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곡성군농민회 죽곡면지회에서 만든 '농민문고'가 모태였다. 2004년 농민회원들이 집에 있던 책을 몇 권씩 가지고 나와서 만들었다. 보유 도서는 1만여 권에 이른다.

지난해부터선 여름과 겨울 농한기를 이용, 농민인문학강좌를 열고 있다. 강좌에는 이 고장 출신의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를 비롯 전희식 귀농운동본부 대표, 백무산 시인 등이 강사로 다녀갔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자격증 갖기 운동, 학생들을 상대로 한 영화상영 등도 함께 하면서 농촌마을 도서관의 표본을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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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농민열린도서관의 내부. 농민들에게 유익한 서적에서부터 문학, 잡지, 만화까지 다양한 도서를 갖춰놓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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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농민열린도서관 전경. 섬진강과 만나는 보성강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소, 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 - 죽곡마을시집

죽곡농민열린도서관 엮음,
강빛마을, 2011


#소, 너를 길러온 지 몇 해이던고 #죽곡마을시집 #김재형 #죽곡농민열린도서관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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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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