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고 아리고 그러면서도 지독하게 그리운..."

[서평] <눈뜨면 없어라>(김한길/해냄)

등록 2011.12.02 11:54수정 2011.12.0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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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방황과 고뇌를 그린, 눈뜨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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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눈뜨면 없어라 ⓒ 이명화

꽤 오래전에 <여자의 남자>(전3권)란 책을 읽었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었나 보다. 오랜 만에 작가의 글을 대하니 처음 같다. 초대문화부장관을 지낸 이어령의 딸 이민아의 간증집 영향일까. 다시 김한길의 에세이집 <눈뜨면 없어라>가 회자되고 있는 모양이다.


<눈뜨면 없어라>(김한길/해냄)에 실린 글은 작가가 1982~1983년에 문예지 <문학사상>에 2년여 간 연재했던 원고를 <미국일기>로 출간하였고, 1990년대 초반에 <눈뜨면 없어라>로 제목으로 새로 단장하여 나온 책이다.

이 책은 제목부터 왠지 슬프다. 상실의 아픔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과 치열하게 살아냈던 시절 이야기이며, 한 여자와의 추억이 담긴 신혼일기이기 때문일 게다. 지금은 곁에 없는. 부록으로 실린 '병정일기'와 '대학일기'까지. 젊은 날의 지문 같고 나이테 같은 글들이다. 젊은 날 가장 힘들고 막막했고 불안했던 날들이었지만 돌아보면 그 어떤 시간보다 찬란하고 행복했던 그 시절들의 이야기. 글은 간결하다. 예리하면서도 따뜻하고 슬프면서도 짓궂고 안타까우면서도 통쾌 명쾌하다. 그 안에 짙은 외로움과 슬픔이 묻어난다.

김난도 교수는 그의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불안하니까 청춘이다. 막막하니까 청춘이다. 흔들리니까 청춘이다. 두근거리니까 청춘이다. 그러니까 청춘이다'라고 말했다. 가장 소중한 시절이지만 그 시절을 방황하고 끙끙 앓느라 그 소중함을 모르는 때가 또한 청춘이 아니던가. 그래서 영국 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책은 열여덟 개의 소제목글로 엮여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망설임 끝에 미국으로 떠나게 된 사연으로부터 시작해서 힘들고 고단했던 미국생활, 나름대로 그곳에서 자리 잡고 출세하였고 아내가 아들을 낳는데까지 이어진다. 지금은 가고 없는 사람, 내게서 너무나 멀리 있는 사람, 눈뜨면 없는 사람과의 사랑과 결혼, 이혼까지. '눈뜨면 없어라'…. 그래서 이 글의 끝자락은 사뭇 슬프고 아프다.

세상이 하수상하여 사람들의 권유로 도망치듯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작가와 그의 아내의 미국생활은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작가는 하루 16시간씩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하며 일과 공부를 병행했고, 아내는 옷가게에서 눈물 쏟아가면서 일하고 공부하였다.


"결혼생활 5년 동안,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은 그 절반쯤이었을 것이다. 그 절반의 절반 이상의 밤을, 나나 그녀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 밤을 새워 일하거나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모든 기쁨과 쾌락을 일단 유보해 두고, 그것들은 나중에 더 크게 왕창 한꺼번에 누리기로 하고, 우리는 주말여행이나 영화구경이나 댄스파티나 쇼핑이나 피크닉을 극도로 절제했다."

마침내 미국생활 5년 만에 아내는 변호사가 되고 작가는 신문사의 지사장이 되었다. 현지의 교포사회에서는 젊은 부부의 성공사례로 일컬어졌고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벗어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그림 같은 언덕 위에 삼층짜리 새집을 지어 이사도 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이혼에 성공했다. 작가의 말대로 그때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 버린 대가였다. 작가는 그때를 회상한다.

"그 즈음의 그녀가 간혹 내게 말했었다.
"당신은 마치 해복해질까 봐 겁내는 사람 같아요."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다섯 살 때였나 봐요. 어느 날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피아노를 실은 트럭이 와서 우리 집 앞에 서는 거예요. 난 지금도 그때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아빠가 바로 그 시절을 놓치고 몇 년 뒤에 피아노 백 대를 사줬다 해도 나한테 그런 감격을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예요."
서울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내시곤 했다.
"한길아, 어떤 때의 시련은 큰 그릇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련이란 보통의 그릇을 찌그러뜨려놓기가 일쑤란다."

위기경보였다. 깃털도 많이 쌓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물건도 많이 실으면 수레의 축이 부러진다고 했던가. 터럭같이 작은 때 치지 않으면 결국 도끼를 써야 한다는 말도 있다. 그는 신문사의 지사장이 되었고 아내는 5년 만에 변호사가 되었지만 마침내 성공했던 그 찰나에 이별이 왔다. 두 사람이 그토록 원했던 안락한 집과 출세를 하였지만 놓쳐버린 소중한 것들을 깡그리 무시하고만 까닭에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작가는 가장 힘들고 막막했던 젊은 날의 방황과 고뇌, 가장 행복했던 젊은 시절을 일기란 나이테로 이렇게 남겼다.

이별은 또 다른 재회, 그리움을 키우는 높은 이자의 빚

치열하고 뜨겁게 살면서 사소한 행복과 사랑을 챙기며 사는 것이 그토록 어렵고 회한이 남지 않는 인생은 없나 보다. 눈뜨면 없고 멀어져간 사람들과 멀어져 간 시간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나고 이별하고 또 만나고…. 만남과 이별은 교차한다. 이혼한 사람들은 대부분 좋았던 기억보다는 힘들고 아팠던 기억들을 더 많이 가지고 추억한다. 때로는 지긋지긋해서 생각조차 하기 싫어한다. 하지만 작가의 신혼일기요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을 담고 있는 이 글에는 지난날의 가슴 에이는 그리움과 사랑, 애틋함이 더 많이 묻어난다.

"지난날을 고칠 수는 없으니까. 과거란 그런 거니까. 안타깝고 아리고 그러면서도 지독하게 그리운… 추억이란 다 그런 거니까"라고 작가는 썼다.

저마다 지난날 돌아보면 회한이 없는 사람 누구 있으랴. 그래서 생택쥐페리는 "어떤 사람의 나이, 그것은 그렇게도 많은 욕망과 희망과 비탄과 망각과 사랑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나 보다. 부부든 연인이든 세월이 지나서 돌아보면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하고 더 많이 잘 해주지 못한 것만이 아쉽고 미안하기 마련이다. 싫든 좋은 내가 남긴 삶의 지문들이니 끌어안고 인정하고 가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나와 관계된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사랑해줄 것밖에 더 좋은 것 무엇이랴. 거대담론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무나 가까이 있고 익숙해서 우린 자신도 모르게 홀대하고 잊고 사는 것은 없는지, 값싼 행복을 무시하고 살고 있진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하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하고 살고 있나. 다시 생각한다.

그러나 후회스러운 지난날과 이별 또한 비관하지는 말자. 그것 나름대로 값진 것이니까. 내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고 또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기도 하기에 또 다른 재회이기에. 작가의 말이 가슴에 담긴다.

"나는 알지 못했었다. 이별이 때로 값진 것은 새것들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지는 헌 것들과의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이별은 또 다른 재회이며, 그래서 이별은 그리움을 키우는 높은 이자의 빚이라는 것."(p16)

덧붙이는 글 | 책: <눈뜨면 없어라> / 저자: 김한길 / 출판:해냄 / 값: 13,800원


덧붙이는 글 책: <눈뜨면 없어라> / 저자: 김한길 / 출판:해냄 / 값: 13,800원

눈뜨면 없어라 - 김한길 에세이, 개정판

김한길 지음,
해냄, 2011


#눈뜨면 없어라 #김한길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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