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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준의 꼼수, 어린 유생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TV리뷰] <뿌리깊은 나무> 작은 기득권 지키려 큰 뜻 외면하는 이들이 안타깝다

11.12.01 12:42최종업데이트11.12.01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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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한석규 분)의 강적으로 그려지는 정기준(윤제문 분)은 백부인 정도전의 뜻을 받들어 사대부가 뿌리가 되어 성리학 중심 국가 조선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지금 이도가 만드는 새 글을 저지하기 위해 명나라까지 동원하는 갖은 음모와 꼼수를 부리는 정기준을 보면, 그저 사대부의 권익만 찾는 탐욕스러운 기득권층으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정기준은 어린 시절 과거 시험에서 이도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을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는 죄명으로 수십년을 백정 가리온으로 위장한 삶을 살아왔다. 자연스럽게 반촌 노비들과 어울리면서 천민으로 지내왔고, 그 누구보다도 양반들의 횡포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백성들의 애환을 잘 이해할 법도 하다. 아마 그도 막판에는 이도를 무너뜨린 정당성을 얻기 위해 백정으로 살아온 이력을 유난히 강조하여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면서 백성들의 큰 지지를 노릴 것이다.

'도와 의' 지키겠다는 유생, 결국 밀본에 이용만 당한 셈

▲ SBS <뿌리깊은 나무> 17회의 한 장면 정기준의 음모로 반촌 노비가 과거에 급제를 하고, 유생들은 들끓는다. 급기야 한 어린 유생은 정기준의 사주를 받고 과거 급제한 노비를 죽이고 그 자리에서 한글을 반대하는 글을 낭독한 이후 투신 자살한다. ⓒ SBS


하지만 가리온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사이비 '백정'일 뿐. 정기준은 뼛속까지 오직 양반만을 생각하는 사대부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천민으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천민이 양반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를 넘보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정기준이 누구나 며칠이면 금방 배우는 한글의 우수성에 경악한 것도, 이도가 만든 새 글이 있으면 천한 백성도 관직에 올라 사대부 중심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 아니었는가.

30일 <뿌리깊은 나무> 17회에서는 한글의 위력을 자신과 똑같은 양반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수하를 시켜 반촌 노비를 과거에 급제시키는 정기준의 모습이 방송됐다. 이 사실을 안 전국의 사대부들은 '어떻게 노비가 과거에 급제할 수 있냐'며 분노에 뒤끓게 된다.(역사상으로도 천민은 과거 시험 응시 자체가 불가하다.)

급기야 한 어린 유생은 과거에 급제한 노비를 살해한 후 그 자리에서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에 이 어린 유생은 성리학의 '도와 의'를 지키겠다며, 정기준의 사주를 받고 자결했음이 드러났다. 한글이 창제되면 성리학의 신분 질서가 파괴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기 때문에 '이 한 목숨 다 바쳐 성리학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다.

반면 실제 노비 출신인 똘복 강채윤(장혁 분)의 눈에 그 어린 유생은 고작 새 글 때문에 목숨을 버린 '가미카제 특공대'에 불과하다. 그 유생은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은 더 큰 세력의 이익을 위해 희생양이 된 어린 양일 뿐이다.

자신들의 작은 기득권 때문에 더 큰 '꼼수'를 보지 못하는 이들

정기준의 사주를 받고 죽은 어린 유생도 한글이 창제되고 누구나 글을 알게 된다면 특권을 잃을 수 있었다. 그것이 두려워 꾀임에 쉽게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이미 권력을 장악한 이들로 인해 더 큰 기회가 막힌 피해자가 됐다. 권력의 꾀임에 이용당하고, 결국 자신의 뜻은 펴지 못한 채 주저앉을 수 있음을 알지 못했던 탓이다. 

▲ SBS <뿌리깊은 나무>의 한 장면 밀본의 수장 가리온(윤제문 분) ⓒ SBS


하지만 극 중에서 한글이 없이는 기득권에 도전할 수도 없어 보이는 일반 백성들도 그들을 위한 일임을 깨닫지 못한채 한글 창제를 종종 반대했다. 대부분은 기득권층의 교묘한 정보 차단으로 인해 단순히 세종의 본심을 모르기 때문이지만, 과거의 똘복이처럼 '새 글이 있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도 있다. 한글로 인해 모든 백성들이 혜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자기도 언젠가는 기득권층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 그리고 기득권층이 계속 권력을 잡아야 사회가 안정될 수 있다는 투철한 신념하에 모든 것을 가진 자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 말이다.

다행히 기득권자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세종의 진심을 애써 외면하고자하였던 똘복은 뒤늦게나마 세종의 뜻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고 명나라까지 끌어들이는 꼼수를 부리는 정기준과 밀본에 동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유생들이 정기준과 밀본을 지지하는 이유는 밀본이야말로 진정한 성리학 중심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밀본과 정기준은 유감스럽게도 오로지 더 큰 권력을 잡기 위해 사이비 백정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인간 집단에 불과하다.

유학을 공부해 아는 것은 많다고 하나,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혹해 더 큰 뜻를 바라보지 못한 어리석인 사대부로 인해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은 결국 죄 없는 백성들이다. 보다 강건하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조선을 만들기 위해 헌신했던 정도전이 단순히 몇몇 사대부만이 권력을 장악하게 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독재자 이방원에게 맞선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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