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찬,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첫 도화선을 긋다

<연재-한말 전북의 항일의병사3> 병오창의와 임병찬 장군

등록 2011.11.24 08:58수정 2011.11.2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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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장군 초상화 ⓒ 김상기


한말 유림의 태두였던 최익현은 "임병찬의 기우는 헌양하고, 목소리는 우레와 같으며, 눈빛은 번개와 같은 호랑이 눈이요. 눈썹이 천창을 떨치고, 위의는 출중하며, 언어는 항상 중용을 지키니 사람들이 우르렀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의병장 임병찬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또한 전북지역 한말 의병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그의 업적이 과소평가되면서 의병운동 자체에 대한 평가마저 소홀히 다뤄지는 측면이 있음을 이번 기획취재를 통해 알게 됐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동학운동과 얽힌 실타래 때문일 것이다.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3대 우두머리 중 한 명인 김개남 장군이 바로 임병찬의 밀고로 붙잡힌 것이다. 당연히 동학에서는 임병찬을 멀리하게 됐고, 동학이 대세인 정읍에서 임병찬의 의병은 제대로 된 평가조차 못 받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당시 임병찬은 그 공으로 조정에서 내린 무남영자령관과 임실군수라는 벼슬을 연이어 거부했다. 또한 최근에는 임병찬의 밀고가 나머지 동학도들을 구하기 위한 고육지계란 주장까지 나오면서 임병찬과 동학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임병찬 창의유적지가 있는 정읍시 산내면에서 '산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카페를 운영하며 지독한 지역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김현기(41)씨는 "동학과의 관계를 매듭짓지 않고서는 장군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지적한다.

1851년 2월 5일 생인 임병찬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4살에 아버지 밑에서 천자문과 추구(推句)를 배웠고, 5살 때에는 훈장 송영숙의 사숙에서 사자소학과 오언당서 등을 배웠다. 6살에는 집에 사숙을 차리고 조용성을 초빙해 배웠는데, 그는 하루에 자치통감을 30줄씩 외우고, 5언을 능히 지을 수 있었으며, 7살 때에는 통감을 하루에 200여 줄씩 배우고, 다음날에는 이를 모두 외우니 고을에서는 신동이라고 칭찬하였다. 8살 때에 고을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그의 재예를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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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 ⓒ 김상기


1906년 6월 4일(음, 윤 4월 13일) 최익현은 정읍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마치고, 창의의 뜻을 밝힌다. 창의는 최익현을 맹주로 하고 임병찬이 주동한 것으로, 을사늑약 후 우리 전북에 있어서는 최초로 일어난 집단적 항일 무장투쟁이라는 데서 그 의의는 자뭇 크다할 것이다.


창의군은 곧바로 태인, 정읍을 거치며 사람들을 모았고, 6월 7일에는 순창읍에 들어서 지휘본부를 객사에 설치했다. 여기서 대오를 정비해보니 총수가 8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만큼 일제에 대한 반발이 심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6월 20일 순창에 나타난 군인은 일본군이 아니고, 우리의 진위대였다. 이때 최익현은 "만약 왜병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결전할 일이나, 진위대 병사라면 우리가 어찌 동족끼리 싸울 수 있겠느냐. 이는 동족상쟁으로 우리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며 해산명령을 내린다.

이때 의병들은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최익현의 간곡한 만류로 어쩔 수 없이 해산하고 말았다. 결국 임병찬을 비롯한 12명만이 최종적으로 남아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순창의 12의사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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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피체지라는 설명문이 길가에 덩그러니 서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 김상기


현재 순창군 구림면 화암마을 입구에는 '최익현 선생 피체지'가 남아 있다. 일반에 퍼져있는 자료들이 병오창의군이 체포된 곳을 순창객사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 최종 적전지는 화암리 일대다. 하지만 도로변 한 귀퉁이에 작은 설명문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을 뿐, 이곳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구국을 외치며 의연히 창의했던 선연들의 의기를 너무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아 안타까움마저 일었다. 이곳을 최익현 선생 피체지라는 표현보다는 순창 12의사가 최후까지 항전하던 곳으로 인식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들의 결연한 모습을 피체지라는 이름으로 더럽혀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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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에 세워진 병오창의기적비. ⓒ 김상기


붙잡힌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로 유배됐고, 그해 11월 17일 최익현은 차가운 일본 땅에서 숨을 거두지만, 임병찬은 후에 한국의 황태자, 곧 후일의 순종이 재혼하는 재빙 가례가 있어, 모든 죄수에게 감형 또는 석방의 은전을 내리어 석방된다.

이로써 1906년 2월부터 최익현과 임병찬이 모의해 실행에 옮겼던 병오창의는 최익현의 순절과 임병찬의 석방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당시 참여했던 800여 명의 우국지사는 좌절하지 않고, 그 뒤에 각기 자기 고을에서 의병을 모아 왜의 군경과 유격전을 벌였는데 그 전과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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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장군이 의병들을 훈련시킨 종성마을에서 나고 자란 김영환씨가 임병찬 장군이 훈련하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 김상기


고국에 돌아온 임병찬은 노심초사 하던 중, 1914년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대한독립의군부 조직을 서둘렀다. 그러나 이 조직공작은 한 동지의 실수로 왜경에게 탄로 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어 임병찬은 일본 총독 데라우치를 대리한 경무총장 타치바나와의 면담에서 한국독립을 역설한 후, 총독과 일본 내각 총리대신 오오쿠마에 각각 두 차례씩 한국독립을 주장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것이 결국 화근이 돼 임병찬은 일제가 만든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거문도에 유배된다. 이곳에서 2년간에 걸쳐 일제의 온갖 탄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항거하다 1916년 끝내는 비분절사했다. 임병찬 선생은 그의 생애를 오직 항일구국의 투쟁에 바쳤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북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병오창의 #임병찬 #최익현 #무성서원 #종성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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