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재래식 변기"... 기밀누설, 맞습니다

[남겨진 진실 미완의 화해⑫] 재일동포 관련 간첩조작 사건1

등록 2011.10.09 21:01수정 2011.10.0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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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됐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모두 밝혀지지 않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올해 초부터 진실위 전직 조사관들은 '조사관 백서'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 연재물은 '조서관 백서' 작업의 마무리의 일환으로 준비됐습니다. 공식 보고서의 딱딱함을 벗어나 진실의 조각들을 알기 쉽게 풀어나갈 것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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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관련 신문기사 ⓒ 진실위 조사관 백서 준비모임


우리나라 형법 제98조는 간첩에 대해 "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라 명기되어 있다. 하지만 '간첩'의 명확한 개념에 관해서는 학설과 판례에 일임하고 있다.

헤이그 평화회의 육전법규 관례규정 제29조는 '교전자의 작전 지대 내에 있어서 상대 교전자에게 통보할 의사로서 은밀 또는 허위의 구실하에 행동하여 정보를 수집하려 하는 자가 아니면 간첩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또 미국군법 제82조는 '간첩이라 함은 상대방 교전자에게 통보할 의사로서 은밀하게 또는 허위의 구실 하에 행동하여 군사정보를 수집하거나 또는 수집하려고 한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간첩이라 함은 '적국에 알리기 위하여 은밀하게 또는 위계로서 아군의 편성, 병기 탄약의 소유량, 그 제조방법, 동원 및 작전계획, 기타 아군의 군사상의 기밀에 속하는 사항, 도서, 물건을 탐지 수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교전 중이거나 적대적인 국가와 대립하는 나라, 이를 테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 중인 미국, 중국과 대립하는 대만 등의 나라에서 간첩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그 외 여러 나라에서는 간첩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간첩사건은 해당 국가의 역사성과 특수한 정치적 배경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휴전선을 직접 맞대고 있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남한과 북한 사이의 쌍방 간첩행위는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국가정보원의 과거사위 보고서 자료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96년까지 검거한 간첩은 총 4495명이었다. 이를 유형별로 세분화하면 직파간첩은 3216명, 재일동포 포함 일본 관련 간첩사건(이른바 우회침투사건)은 430명, 3국 우회간첩 85명, 납북어부 97명, 강제송환 5명, 재남 간첩 622명, 기타 40건이다.

간첩 발생의 연도별 추이를 보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각각 1674명, 1686명으로 최고를 기록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681명, 340명으로 격감했고 1990년대(1990~1996)는 114명이었다. 이 연도별 추이를 간첩 유형별로 살펴보면, 검거 간첩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직파간첩과 재남간첩은 1970년대 들면서 격감하는 추세를 보였다. 반대로 이른바 제3국을 통한 우회침투간첩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크게 증가했다.

이 우회간첩사건의 대다수는 일본을 거쳐 침투한 간첩들이었다. 1984년의 경우 전체 33명의 검거 간첩 가운데 23명이 일본 관련 간첩이고, 1986년은 26명 가운데 20명이었다.


시절 하수상하면 재일동포 간첩사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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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열린 '국가보안법 고문·용공조작 피해자 1차 증언대회' 모습. 80년 재일동포 간첩사건의 피해자인 신귀영씨가 나와 증언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일본 관련 간첩사건이 빈발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한일간 경제적·문화적 격차가 컸었다. 당시에는 경제적 도움을 받기 위해 합법적으로 혹은 밀항을 통해 일본에 거주하는 친척을 만나고 돌아오기도 했다. 재일동포도 고향 방문, 기술연수, 투자 등의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일본 방문 간첩들은 주로 유학, 취업이나 경제적 문제로 일시적으로 일본을 방문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일본에 있는 친척으로부터 편지나 인편 연락을 받고 수사기관의 요시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만난 친척이 재일 조총련 관계자이거나, 모국을 방문한 재일동포가 친척이나 친지, 학교 선후배 가운데 조총련 인사가 있을 경우, 간첩사건 대상이 될 개연성이 높았다.

일본을 방문, 자연스럽게 북한과 친숙한 친척 등 재일동포를 만나고 귀국하는 행위나 일본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옹호하는 친척, 친구와 만난 후 한국에 입국하는 행위는 '간첩 지령수수'와 '잠입탈출'로 인식됐다. 실제 재일동포와 관련된 간첩사건은 "부모형제·친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이 회합·통신죄, 의례적으로 주고받은 여비가 금품수수죄, 우연히 대화한 내용이나 전달한 일간신문, 잡지 등이 간첩활동"으로 기소됐다.

한편 이같은 간첩사건 발표는 군사정권이 정치적으로 위기일 때 집중됐다. 이를테면 1975년경 발생한 재일동포 유학생간첩사건은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확산되고,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등 외교적으로 한국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발생했다. 실제 1975년 11월 22일 당시 수사 결과를 발표했던 김기춘 중정 수사국장은 "최근 수년간 대학가에서 벌어졌던 데모가 북괴 간첩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임을 증명한 케이스"라고 언급했다. 1980년대 초중반 역시 전두환 정권이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고 학생운동 등 반독재운동이 점차 확산되는 시기에는 어김없이 간첩사건이 등장했다.


"시골에 재래식 변기"... 첩보활동 맞습니까

수사 정보기관의 입장에서 과거 일본 관련 간첩사건은 '검거' 대상일 뿐 아니라 '공작'의 대상이었다. 1968년 울진삼척지구 공비침투사건 이후 북한으로부터 직접 침투하는 간첩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에 중정과 보안사, 경찰 등 정보기관들은 북한의 대남공작이 해외, 특히 일본을 통한 우회침투공작전술로 전환되었다고 판단하고 1970년대부터 조직 내 대일공작부서를 신설하고 수사근원발굴에 치중했다.

당시 공안당국은 재일동포 모국유학생, 재일동포 국내 연고자, 일본 체류자 등을 대상으로 첩보수집활동과 '수사근원발굴 공작'을 진행했다. 이에 따라 1970년대 중후반 이후 상당수의 모국유학생들과 일본을 왕래했던 국내연고자들이 간첩으로 검거됐다.

당시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일본에서 성장한 재일동포 2, 3세들은 일본 사회의 민족차별에 대한 불만, 조국을 배우고자 하는 각오로 한국으로 유학을 오기도 했다. 7·4공동성명 발표 이후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 모국방문단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했고, 재일동포 2, 3세를 대상으로 모국유학생을 적극 모집, 국내 대학에 편입학시키는 특전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사대상을 발굴한다는 이유로 유학생들 사이에 '망원'을 침투시키고, 재외국민교육원에 입학한 재일동포 유학생 전원을 내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재일동포 유학생들은 심각한 인권침해는 물론 서로를 불신하고,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는 것 자체를 통과의례로 여길 지경이었다. 한국에 오는 유학생들의 경우, 예외없이 민단 단원이나 간부들의 자제들이었다. 조총련 관련자들은 아예 입국이 불허되었고, 민단 소속이지만 한국정부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민주화운동에 동조적인 경우 스스로 모국유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당시 검거된 일본 관련 간첩사건의 증거물은 피의자 자백진술, 정보기관원이 작성한 영사증명서, 기타 '오적시' 등 일본 혹은 한국에서 발간한 민주화, 통일 운동 관련 서적, 잡지 류 따위가 전부였다. 간첩사건에서 피의자를 포섭하고 간첩지령을 내리고 탐지된 기밀을 보고받았다는 재일대남공작원의 신원은 일부를 제외하고 신원불상의 '나카야마', '이시이', '나까무라', '박명미상' 등으로 처리됐다.

범죄 사실은 '고속도로에 비상 활주로가 있다', '시골은 재래식 변기가 있을 정도로 낙후되었다'는 등의 국가기밀을 탐지했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밀입북해 북한 노동당에 가입했다는 범죄사실조차 고문으로 조작되기도 했다. 고문 가혹행위로 강요한 자백진술, 법적 증거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는 영사증명서, 기타 일본내 합법 출판물과 국가기밀로 보기 힘든 발언 내용 등을 간첩죄 구성의 요식에 짜맞추어 증거사실로 만든 것이다.

진실위가 밝힌 일본 관련 간첩조작사건은 당시 공판과정에서부터 조작 의혹이 일었다. 실제 일본 관련 간첩사건이 발생한 1970~1980년대 일본에서는 일본 각지에서 재일동포 정치범 석방구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일본인들까지 서명한 석방요청서명부가 우리나라 재판부에 제출돼 한일간의 외교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고 일본 지식인 사회의 반한 감정이 커지기도 했다.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고? 피해자들 고통 여전

2009년 6월26일 유엔이 정한 '고문피해자지원의날' 대회에 참석한 김양기씨. 그 또한 간첩조작 의혹 사건의 피해자다. ⓒ 민가협


몇 해 전 이용훈 대법원장은 지난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법원과 판사가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운 과거사를 인정하고 사과한 바 있다.

당시 대법원이 사법부 과거사정리 차원에서 검토한 1972~1987년 사이 시국·공안사건 판결 가운데 불법구금과 고문 등 재심사유가 있는 것으로 파악한 사건이 224건이다. 얼핏 보아도 같은 시기 전체 간첩사건에서 20%가 넘는 비율이다. 국정원과 국방부 등 국가기관에서도 과거사진실규명차원에서 간첩사건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발간한 바 있다. 부분적이나마 당시 고문가해, 조작의혹을 받았던 기관에서 직접 조사한 결과이므로 의미가 작다할 수 없다.

진실위가 조사해 '진실규명' 결정한
일본 관련 간첩조작 사건
● 이성희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
● 김우철ㆍ김이철 형제 간첩조작 의혹 사건
● 재일동포 유학생 김동휘 간첩 사건 
● 재일동포 허경조에 대한 인권침해사건 
● 재일동포 강종헌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사건 
● 재일유학생 김정사 간첩조작의혹사건 
● 김추백 등에 대한 간첩조작의혹사건 
● 박순애 간첩조작 의혹사건 
●신귀영 일가 간첩 사건 
● 재일동포 유학생 윤정헌 간첩조작 의혹사건
● 차풍길 간첩조작 의혹 사건 
● 재일동포 유학생 이종수 국가보안법위반사건 
● 곽종대·김해봉 국가보안법 위반 조작 의혹 사건 
● 오주석 간첩조작 의혹 사건  
● 김상순 간첩조작 의혹 사건    
● 재일조총련 관련 최양준 간첩조작 의혹 사건 
● 구명우 국가보안법 위반 조작 의혹 사건 
● 재일동포 김병진 인권침해 사건 
● 재일동포 유지길 인권침해 사건    
● 재일동포 박박(朴博)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 사건
● 이장형 간첩조작 의혹 사건
● 서경윤 간첩조작 의혹 사건
● 조봉수에 대한 인권침해 및 조작의혹 사건
● 재일동포 조일지에 대한 간첩조작 의혹사건
● 고창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 구명서 간첩조작 의혹 사건
● 류한기ㆍ황병구 등의 간첩 조작의혹 사건 
● 김양기 간첩조작 의혹 사건 
● 김철 간첩조작의혹 사건 

그러나 아직까지도 피해자들과 국가 사이의 해원은 요원하다. 국정원 과거사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가 재일동포 간첩조작의혹사건을 일부 조사하기는 했다. 하지만 조사기관 모두가 인정하듯이 아직도 조작간첩의 피해사실의 전체 규모는 완전히 파악되지 않고 있고, 일부 규명된 사건에서도 미진하고 부족한 내용이 많다. 이 공백을 채울 책임은 여전히 국가에게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좁은 나라에서, 그것도 155마일 휴전선을 두고 교전당사국이 반 세기 이상 직접 마주한 상황이라면 쌍방간의 간첩행위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명분으로도 간첩을 조작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자체로 정부가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국가안보의 근간을 농간하는 것이며,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것이고, 공공의 예산과 수사력을 낭비하는 것이며, 피해자의 인권을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침해하는 것이다.

양치기 목동이 세 번째 '늑대'를 외칠 때, 아무도 믿지 않았던 것처럼 허위 조작을 통해 국가안보를 추구하는 것은 스스로 명줄을 누르는 자해행위일 뿐이다. 손자는 사람을 알아보는 뛰어난 지혜가 없거나, 인의(仁義)를 겸비하지 않거나, 명석한 판단력을 갖지 않으면 간자(間者, 간첩)를 쓸 수 없다고 했는데, 간자를 막고 잡는 일도 마찬가지다.
#과거사위 #과거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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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전직 조사관들의 백서 준비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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