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나를 '쪽발이 깜둥이'라 불렀다"

[인터뷰] 혼혈 미국 입양인 김수자씨, 52년 만에 모국방문

등록 2011.08.25 14:11수정 2011.09.0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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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혼혈자녀 ⓒ 김성수



나는 1남 1녀의 아버지다. 내 아이들은 한국과 영국의 혼혈아다. 내 아이들은 동네의 보통 유치원에 다녔고 초등학교에 다녔다. 아들이 초등학교 다니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아들이 학교 갔다 집에 와서 머리를 검정색으로 염색해 달라고 했다. 아들의 머리카락 색깔은 짙은 갈색이었다.

'왜?' 하고 물었다. 반 아이들이 "넌 미국 사람이야. 한국 사람 아니야"하고 놀린단다. 아빠가 한국 사람이라고 이야기해도 한국 사람은 머리 색깔이 까만데 자기는 머리가 갈색이라서 한국 사람이 아니란다. 아들은 "이 다음에 진짜 한국 사람이 되고 싶어요"하고 말했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 후 딸아이도 동네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딸이 학교에서 울면서 집에 왔다. 이유를 물었다. 아이들 여럿이 "○○는 미국 스파이, 고양이 눈깔에 이티래요"하고 놀린단다. 어떤 아이들은 식사시간에 밥을 딸아이 얼굴에 던졌단다. 그 말을 들을 때 아빠로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 "다르게 생긴 것이 무슨 죄인가?"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김수자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녀가 미국 흑인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계 미국 흑인 혼혈인이다. 그녀가 1958년 한국에서 흑인 혼혈아로 태어났으니 나는 그녀가 혼혈아로서 겪은 어린 시절의 고통을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아니 인간은 언제쯤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이 기사를 쓴다. 다음은 지난 8월 23일 '뿌리의집'에서 미국 입양인 김수자씨와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달라. 그리고 미국으로 입양 간 과정에 대해서도 아는 대로 말해달라.
"홀트 기록에 의하면 나는 1958년 9월 6일 인천에서 태어났다. 그 후 할머니가 나를 키우다가 친엄마가 1959년 5월 25일 고아원에 맡겼고 한 달 후인 7월 31일 홀트에 의해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내가 생후 9개월이 넘어서 일어난 일이기에 나는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아무런 기억이 없다.

홀트 기록에 의하면 내 엄마는 미국 흑인 군인과 동거했다고 되어 있다. 나는 친부모가 나를 포기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내가 고아원에 도착했을 때 설사를 많이 하고 몸이 많이 아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친모는 병든 나를 돌볼 여력이 없으셨던 것 같다." 


- 친모와 형제들에 대한 기록이나 정보는 없나?
"홀트 기록에 의하면 친모 이름은 김복애였고 인천 산곡동이 마지막 주소로 되어 있다. 내 형제에 대한 기록은 없다."

- 혼혈 입양인으로 미국에서 자라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입양인의 가장 힘든 점은 어느 곳에도 소속감을 갖기가 어렵과 확신을 갖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일이 정말 자기가 태어난 날인지도 모르고 자기 이름이 실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인지도 모르고 이런 불확실한 상태는 입양인들의 삶을 정서적으로 아주 힘들게 한다.

내 양부모님이 흑인이라서 나는 흑인 지역에서 자라고 학교를 다녔는데 다른 흑인 아이들로부터 학교와 동네에서 수없이 괴롭힘을 당했다. 또 다른 충격은 한 인간으로서 자기의 출생의 역사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는 상실감이다. 특별히 내 양부모는 내가 어려서부터 내 친부모에 대해서 숨겨왔기 때문에 내 존재의 근원에 대해 나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1987년 나는 내 친모가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그래서 홀트에 친모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다. 나는 홀트에서 당시 답장을 받았는데 친모를 찾으려고 했지만 주소가 존재하지 않아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내가 안 사실은 홀트는 1987년 당시 내 친모를 찾으려고 시도한 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홀트도 내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참 실망했다. 이 세상에 누구를 믿어야 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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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씨 ⓒ 김수자


나는 흑인과 백인, 둘 다로부터 '미운오리새끼'였다

- 혼협 입양아로서 미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해 달라. 특별히 기억에 남고 잊히지 않는 일이 있으면.
"내 어린 시절은 아주 힘들었다. 나는 거의 매일 학교와 동네에서 다른 아이들로 부터 놀림을 받았고 왕따를 당했다. 그 아이들은 항상 나를 '쪽발이 깜둥이(black jap)', '빨래판 얼굴(flat face)', '빨래판 머리 쪽발이(flat head jap)' 등으로 불렀다. 또 나를 틈만 나면 때리고 놀려댔다. 내가 동네에서 유일한 혼혈 흑인아이라서 나는 흑인과 백인 둘 다로부터 '미운오리새끼'처럼 항상 놀림을 받았던 것 같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내가 13살 때 성폭력을 당한 것이고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내가 겪은 고통과 상처를 극복하는 데는 정말 오랜 세월이 걸렸다. 내가 다니던 학교나 내가 살던 동네에 나와 같은 외모를 가진 아이들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내 외로움과 아픔은 특별히 더 컸던 것 같다."

- 미국 양부모는 어떤 분들이었나? 친부모와 수자씨 입양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나?
"양부모님은 나를 아주 사랑하셨지만 내가 친부모를 찾기를 원치 않으셨다. 양부모님은 내 친부모가 한국전쟁 중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항상 양부모님의 말을 믿고 자랐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다. 한국전쟁은 1950년에서 1953년까지 일어났고 나는 1958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내 친부모님이 한국전쟁 중에 사망할 수가 없다는 것을. 물론 내 양부모님은 내가 진실을 말면 상처를 받을까봐 내게 친부모님에 대한 사실을 숨기신 것으로 생각한다."

- 반세기 만에 한국에 처음 오면서 당신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오는 목적은 진실에 대해 아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좀 더 설명해 달라.
"1987년 나는 처음으로 친모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아마 한국에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당시 나는 친모와 한국에 대한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찼다. 나는 당시 나를 포기한 친모를 감정적으로 용서할 수 없었고 나를 거부한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달리 감정적으로 그런 가슴 아픈 과거를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고 왜 친모가 나를 포기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한때 나는 내가 한국과 미국 두 나라에서 다 버림 받은 것 같다는 심한 절망감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좀 더 포용성과 열린 마음으로 내 모국 한국의 문화, 역사, 언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정신적으로 고아와 마찬가지라는 심정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앙을 갖게 되면서 이러한 정신적 어려움을 조금씩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나는 내 아픈 과거를 직면하고자 이번에 용기를 내서 한국에 왔다. 나는 내가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의식적으로 주입시키고자 노력한다. 나는 또 나의 용기 있는 친모를 만날 준비가 되어있다. 친모는 분명히 내가 미국에서 사는 것이 더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고 날 사랑해서 그런 결정을 내리셨다고 느낀다. 나는 친모가 지금 내가 과거의 아픔을 잘 극복하고 잘 있다는 것을 아시면 좋겠다.

나는 친모도 괜찮으시길 희망한다. 나는 친모가 나를 낳아주신 것에 대해서 그래서 이 삶을 주신 것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친모를 너무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다. 그것은 내 생애의 최고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친모가 나를 피하더라고 그 심정을 이해한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친모를 찾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혹시 아나, 내가 친모를 만날 수 있을지."

- 1986년 병원에서 첫 아들을 낳았을 때 친모가 아직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 당시 상황을 좀 다 자세히 설명해달라.
"당시 내가 입원해 있던 산부인과의 한 간호사가 출산 후 나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 왔다. 나는 동양계 그 간호사에게 하와이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간호사는 한국에서 왔다고 답했다. 그래서 간호사에게 나도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자 간호사는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는데요?'라고 말하며 부모님 중에 한 분이 한국분이냐고 물었고, 또 한국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 간호사가 나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해서 나는 좀 놀랐다. 나는 한국말을 할 줄 모르고 나의 친모가 한국전쟁 중에 돌아가셔서 만나본 적이 없고 그래서 미국 흑인 부모님이 나를 입양했다고 말했다. 그때 그 간호사의 얼굴 표정이 호기심 많던 눈빛에서 나를 동정하는 듯 한 눈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간호사는 내 침대 옆 의자에 가까이 앉으며 내 눈을 뚜렷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은 왜 당신이 입양이 되었는지 그 진실을 모르는 것 같군요'라고 말을 시작했다.

그 후 한 시간여 가량 그 간호사는 내게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전쟁, 전쟁고아 등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여러 면을 이야기해주며 내 친모가 나를 직접 양육하지 못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나는 내 양부모님이 내 친부모님에 대해 해주신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내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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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씨의 입양 관련 서류 사본 ⓒ 김수자


고국을 배우러 52년 만에 한국에..."그동안 어머니 찾았으면"

- 지난 8월 17일 인제대학교의 초청으로 입양간 후 처음으로 한국에 왔는데 이번 한국방문의 목적이 무엇인가?
"나는 인제대 해외입양인 공부프로그램에 등록했다. 나는 9월부터 인제대에서 한국의 문화, 언어, 유산에 대해 배우고 다른 입양인들을 만날 기회를 가질 것이다. 나는 연말까지 한국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친모를 찾았으면 좋겠다."

- 1959년 한국을 떠났고 올해 8월에 한국에 처음 왔으니까 52년 만의 모국방문이다. 이번 방문에 대한 감회가 있을 것 같다.
"나는 내가 태어난 나라인 한국에 오는 꿈을 오랫동안 여러 번 꾸었기 때문에 지금도 내가 한국에 온 것이 꿈만 같이 느껴진다. 나는 이번 방문을 통해서 나의 슬픔이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기회가 되기를 염원한다. 과거 한국과 미국에서 다 버려지고 외면받던 혼혈 입양인 아이가 이제 비로소 두 사회에서 다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서 기쁘다. 그동안의 내 고통스러웠던 삶이 오늘을 위해 준비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나는 지금 한국에 와서 너무 행복하고 왜 좀 더 빨리 못 왔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든다. 1980년대 나는 결혼했고 3자녀를 키우느라 한국에 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돈도 없었기 때문에 친모를 찾거나 한국방문은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또한 당시 내 양부모님도 생존해 계셨기 때문에 내가 친모를 찾고 싶어하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친모를 찾을 수 있고 제발 친모가 어느 곳에라도 꼭 살아계셨으면 좋겠다. 나는 친모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에 요즘 조금은 흥분되어 있다."

- 한국정부에 대해 해외입양정책과 관련하여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나는 한국의 해외입양정책을 아직 잘 모르고 지금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한 가지 요청 사항이 있다. 한국정부에서 해외입양정책을 만드는 분들이 정책을 만들 때 꼭 해외입양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어주셨으면 한다. 나는 해외입양 정책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동 위주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아동이 '순수' 한국아이이건 혼혈아동이건 상관없이 아이들이 사랑스런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친모와 자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또한 입양을 갔더라도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기록이나 친부모의 기록을 볼 수 있게 되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양부모가 아무리 좋고 훌륭한 분이라도 입양인은 친부모를 찾고 싶어한다는 심정을 이해해주면 좋겠다. 친부모에 대해 알고,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이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가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입양 관련해서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입양이 적은 사회일수록 좋은 사회라는 확신이다. 언젠가는 입양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가 사는 사회가 완전한 사회가 아니라서 입양이 필요한 아이들은 아쉽게도 항상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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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인터뷰 중인 김수자씨 ⓒ 김성수


#해외입양 #혼혈 #다문화 #김수자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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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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