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병 킬러 H상병, 무릎 꿇고 싹싹 빈 사연

[공모-병영 구타의 추억] 소대장도 묵인하는 군대 폭력

등록 2011.08.02 17:06수정 2011.08.0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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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지워지지 않는 것은 얼굴에 남아 있는 흉터뿐만이 아니었다. 군대 폭력 이야기만 나오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나쁜 기억도 지워지지 않고 내 몸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돌이키기 싫은 일은 자기보호 본능에 따라 자연스럽게 잊혀지기도 한다던데, 이놈의 기억은 잊혀질 만하면 한 번씩 머릿속을 비집고 나온다.

첫 보초 근무를 서는 날 밤, 무척 추웠다. 전방부대의 11월은 한 겨울만큼이나 춥다. 보초 근무 파트너는 군기 반장인 상병주임(상병 중에서 가장 선임) H였다. 165㎝가 될까 말까한 작달만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였지만 눈매가 날카로워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 인상이었다.

'퍽' 소리가 난 다음, 눈에서 불이 일었다. 잠시 정신줄을 놓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에 쓰고 있던 방탄 헬멧이 땅에 떨어져 구르고 있었고 내 몸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무릎이 끊어질 듯 아파, 일어서고 싶어도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등을 보이며 앞서 걷던 그가 몸을 돌려 사나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다가 갑자기 욕을 하며 방탄 헬멧을 휘두른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 피할 틈이 없었다. 그는 내가 정신줄을 다시 잡기도 전에 사납게 발길질을 해댔다. 한참을 정신없이 두들겨 맞은 후에야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우선 왜 그러는지 이유부터 알아야 했다.

"잠깐! 잠깐만요, 왜 그러세요."
"뭐! 이 새끼 봐라? 왜 그러세요? 빠져 가지고……."

공연히 화만 돋궈놓은 꼴이었다. 바람 소리를 내며 소총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피해야 했다. 넘어진 상태에서 몸을 굴려 가까스로 피했다. 그러나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연거푸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그 중 하나가 등에 적중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억" 소리가 흘러 나왔다.

얼굴에 무엇인가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리나케 장갑을 벗고 손으로 훔쳐 보니 피였다. 방탄 헬멧에 맞아 찢어진 게 분명했다. 피를 보자 두려움이 사라졌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오기가 발동했다. 


"잠깐만요, 얼굴에서 피가 흐르고 있어요."
"뭐? 이 새끼 봐라. 또 잠깐만이라고?"
"에이, xx 진짜 피가 나고 있다니까!"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는지 그는 "야, 진짜냐?" 하면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군대  라는 울타리 안에서, 폭력은 형식적으로는 분명 금지사항이었다. 만약 선임병이 후임병을 보초 근무지에서 때렸다는 게 발각되면 엄한 처벌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제발 맞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계단에서 굴러서 다쳤을 뿐이라 둘러 대라'고 통사정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단번에 변할 수 있을까! 이 때 그의 몸 어디에서도 좀 전에 보였던 광기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 따위 녀석에게 내가 잠시나마 주눅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한 번 더 그러면 그땐 참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알았어. 고마워."
"근데 왜 때린 겁니까?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너 고참들한테 찍혔어, 군기 빠졌다고…. 그래서 나하고 함께 보초 세운 거야."

보초근무교대를 한 후, 교대한 사실을 보고 하기 위해 행정실에 들렀다. 일직 근무를 서던 소대장이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한마디 툭 던졌다.

"신병. 얼굴이 왜 이래?"
"네, 계단에서 굴렀습니다."
"조심해야지, 앞으로 계단 잘 보고 다녀."

이게 끝이었다. 이때서야 난 군대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모두가 한 통속이었다. 군대 폭력은 그리 공공연하지도 않은 비밀이었다. 중대장 소대장이 아침저녁으로 떠들던 '폭력근절'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왼쪽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눈 옆 찢어진 상처에는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맞아서 생긴 상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소대장은 계단 잘 보고 다니라는 말을 충고랍시고 던진 것이다.

다음 날부터, 눈에 든 멍이 가시고 찢어진 상처가 아물 때까지 난 의무실에 누워 있었다. 아침, 취침 점호 모두 열외였고 밥도 고참들이 의무실까지 날라다 주었다.

몸은 한 없이 편했지만 분노로 인해 가슴은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그 용광로에 있는 쇳물은 가끔씩 범람했다. 밤이고 낮이고 가리자 않고, 심지어 잠자는 시간에도 범람했다. 그럴 때마다 난 식은 땀을 흘리며 둑을 쌓아야 했다. '인내'라는 둑을. 의무실 문을 나설 때, 내 가슴속에는 잘 벼려진 칼이 한 자루 들어 있었다.

이때부터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칼'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무사히 제대를 하는 게 군 생활 최대의 목표가 돼 버렸다.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기는 나만 괴롭힌 게 아니라 졸병으로 분류되는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다.

상병들은 병장들에게 수시로 한따까리(상사가 가하는 얼차려 행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를 당했고, 상병들은 그 분풀이를 일병들에게 했다. '겁대가리' 없는 졸병 녀석 하나가 고참들에게 '개긴다'는 이유였다.

"H병장한테 인규(가명)가 당했대, 첫 근무 나갔다가 된통 당했다는데."
"네, H병장한테요?"

뜻밖이었다. 일어나기 힘든 일 이었다. 병장이 이등병을 건드리는 일은 거의 없다. 병장 입장에서는 시쳇말로 대단히 '쪽 팔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그랬데요?"
"뭐~군기가 빠졌다는 이유겠지. 그 양반 신병 킬러야! 너도 예전에 당했잖아!"
"그랬지요, 그 이후로는 미안했는지 저한테 무척 잘했어요."
"그래? 그 인간 생각해보면 불쌍하긴 해, 완전 동네북이었잖아?"
"그렇게 많이 맞았어요?"
"몰랐어? 그 양반 이마에 있는 상처, 그거 이등병 때 첫 근무 나갔다가 맞아서 생긴 거야. 따지고 보면 H병장 바로 위 고참들이 나쁜 놈들이지. 쪽수도(인원수도) 많잖아. 그 양반이 맘도 약하고 만만하니까 마구 괴롭힌 거야. 병장 달고서도 바로 위 고참들에게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어."

함께 보초 근무를 서던 K병장에게 이 얘기를 듣고서야 난 마음속에 있는 '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도 피해자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H는 농고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군대에 온 그야말로 순박한 농촌 총각이었다.

그도 나처럼 마음속에 칼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칼끝이 향한 방향은 달랐다. 그가 가지고 있는 칼은 자기보다 약한 졸병들, 그것도 아직 인간적인 친분이 쌓이지 않은 갓 전입한 신병에게 향해 있었다. 맘이 약한 탓이었다. 인간적인 친분이 쌓인 다음에는 차마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에 갓 전입한 신병만 노린 것이다.

반면 내 칼끝은 모순덩어리 그 자체인 군대라는 조직을 향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래서 더 힘들었다. 누구도 찌를 수 있었지만 실제로 찌를 대상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화기만 들끓었던 것이다.

모순덩어리 그 자체인 군대라는 조직은 그 엄청난 모순을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내 칼로는 그 갑옷을 뚫을 수 없고, 섣부르게 칼을 들이댔다가는 도리어 나만 다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난 수도 없이 절망했다.

몇 개월 후 H병장은 제대했고 난 이른바 '고참'이란 것이 되어 '내무반장'이라는 완장을 차게 됐다. 장교들은 '구타, 가혹행위'를 근절하라고 말하다가 마지막에는 '요즘 애들 너무 빠졌어'라는 말을 강조하곤 했다.

이게 바로 군대가 안고 있는 모순이다. 절대 때리라고 지시를 내리지는 않겠지만, 두들겨 패서라도 말 잘 듣게 만들라는 이야기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난 졸병들에게 "요즘 애들 왜 이렇게 빠졌어? 좀 잡아"라고 상병들에게 소리 질러야 했다.

군대에서 폭력사고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요즘 애들 너무 빠졌어'라는 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거린다. 그 때마다 난 20년 전 첫 보초 근무를 서기 위해 포상으로 향하는 이등병이 된다. 참 나쁜 기억이다.

덧붙이는 글 | '병영구타의 추억' 공모글


덧붙이는 글 '병영구타의 추억' 공모글
#군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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