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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표' 아내, 답답하고 서러웠다

[리뷰] 민규동 감독의 가족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11.04.25 17:58최종업데이트11.04.2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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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포스터 ⓒ NEW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평의 전원주택 마당. 나이 든 아들이 어머니를 둘러업고 서성댄다.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인네가 한구석에 미소를 머금은 채 쭈그리고 앉아 있다. 그 언저리 어딘가에 나무 판대기로 만들어진 이정표 비슷한 게 시구를 담고 서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단시 <풀꽃> 전문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아우성치며 생명의 환희로 약동하는 봄. 산야에 온갖 꽃과 풀이 피어나고 사람들은 벚꽃놀이 간다. 대부분의 사람은 벚꽃만 본다. 하지만 시인은 작은 풀꽃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것도 자세히, 아주 오래도록. 그리고 거기서 풀꽃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찾아낸다. 새삼스러운 것처럼.

화려함과 소박함. 강력함과 허약함. 부유함과 가난함. 지배와 피지배. 지식과 무지. 권력과 복종. 높음과 낮음. 큰 것과 작은 것. 넓음과 좁음. 빠름과 느림. 당신은 이 가운데 무엇을 고르는가. 예외 없이 전자일 것이다.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양자는 서로 돕고 조화를 이뤄가며 세상만사를 구성한다. 우리가 작고 처연한 것을 여전히 보지 못한다 해도.

아내와 며느리의 이름으로

인희(배종옥)는 오십 대 초반 중년 여성이다. 인희에게는 의사 남편이 있다. 정철(김갑수)이 그의 이름이다. 과거 의료사고를 낸 그는 잘 나가던 병원을 말아먹고 월급쟁이 의사 노릇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사들과 달리 그는 매일 전철로 출퇴근한다. 그이는 언제나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며, 화난 사람처럼 보인다. 매사에 의욕이 없는 그는 항상 피로를 호소한다.

어느 날 인희가 아프다고 한다. 정철은 약국에서 약을 사 먹으라고 한다. 대수롭지도 않은 일 때문에 굳이 병원에 올 거 있느냐고 핀잔을 준다. 의사 남편은 아내 인희에게 무심하다. 아내는 아플 일도 없고, 아파서도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설령 아프더라도 대수롭지 않을 것이며, 약국의 처방 약으로도 충분히 나을 거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인희의 시어머니(김지영)는 치매환자다. 밥을 주면 개똥이라 우긴다. 빨간 공을 찾으라고 하면 노란 공을 빨간 공이라 한다. 며느리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드는 것도 예삿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밥을 보채고, 잘 익은 연시를 며느리에게 마구 던지는 행악질도 서슴지 않는다. 드물게나마 정신이 돌아오기도 하지만 아주 잠시뿐. 인희는 날마다 전쟁을 해야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한마디씩 한다. 왜 궁상맞게 버스 타고 다니느냐. 호텔 수준의 요양원도 많은데 치매 시어머니는 왜 모시고 사느냐. 친정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등졌다. 남동생과 달랑 둘만 남은 인희는 자신을 미워했던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인희가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넘기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엄마의 이름으로

인희는 두 아이 엄마다. 연수(박하선)는 맏딸이다. 연수는 오래전부터 유부남을 사랑하고 있다. 수더분한 아내와 귀여운 사내아이가 딸린 유부남이다. 우리는 그런 사랑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니다. 이유를 알려 하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사랑할 뿐이다. 그래도 관객들은 연수가 안쓰럽고 답답하다.

인희는 연수를 시집보냈으면 한다. 인희가 연수 휴대전화에 찍힌 그 남자를 본다. 잘 생기고 호감 가는 젊은이다. 딸을 만나러 연수 다니는 회사를 찾아갔다가 인희는 그 남자를 본다. 승용차에서 아내와 아이와 작별하는 다정한 그 남자를 본다. 인희는 연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모녀는 어떻게든 서로 이해하고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정수(류덕환)는 인희의 아들이다. 삼수를 하면서도 공부에는 뜻이 없고 애인인 재영에게 온 정신이 팔려 있다. 아버지는 정수를 의대에 보내려고 하지만, 정수는 미대에 가고 싶어 한다. 그러니 공부에 뜻을 둘 수가 없다. 언제부턴가 재영이 생리를 거른다. 그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든다. 아이를 지울 것인가, 낳아서 기를 것인가. 미혼모 문제가 대두한다.

인희가 몹시 아파서 거실을 기어 다녀야 했던 날. 정수 방에서 고통스러운 울음과 신음이 들린다. 힘겹게 정수를 찾아간 인희. 엄마 품에 안긴 정수가 몹시 괴로워한다. 엄마의 중병을 알아차리지 못한 아들이 내뱉는 말은 재영이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인희 얼굴에 쓸쓸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인희는 정수를 어르고 달랜다.    

누나와 자신의 이름으로 

인희에게는 남동생 근덕(유준상)이 있다. 택시 운전사로 일하지만, 일보다는 노름과 주색에 빠져 있는 방탕한 인간 망종이다. 천지간에 일점혈육으로 남은 근덕은 툭하면 누나에게 막말을 해대고 돈을 긁어낸다. 게딱지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는 단칸방에 살면서도 근덕은 술과 도박과 여자를 끊지 못한다. 그에게는 조금 모자라지만 순박한 아내 선애(서영희)가 있다.

인희는 선애가 고맙고 불쌍하다. 근덕에게 해코지를 당하면서도 인희는 선애한테 이런저런 핑계로 돈을 쥐여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생 근덕의 곁을 지켜달라는 부탁과 함께. 어릴 적 부모 잃고 힘들게 길러온 근덕의 막무가내 망나니짓을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동생의 갱생을 기대하는 인희. 어려움 속에서도 인희는 근덕의 미래를 위해 준비한다.

오십이 넘도록 인희에게는 자기 자신이 없다. 아침부터 밤까지, 봄에서 겨울까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인희는 자신의 삶을 산 적이 없다. 아주 잠깐 그런 시절이 있긴 한 듯하다. 병원 차려줄 형편이 안 된다는 이유로 시어머니가 그녀를 구박했을 때 꿋꿋하게 버티면서 끝까지 남편을 지켜냈던 시절.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인희는 짧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한다. 모진 통증이 찾아오고, 항암치료도 효과가 없고, 각혈이 이어진다. 아무 준비도 없이 죽음과 대면해야 하는 인희. 모든 것이 너무도 급작스럽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왜 내가 죽어야 하나. 황망하게 들이닥친 죽음의 사신 앞에 인희는 너무나 무력하고 절망적인 상태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폭력의 무한변주와 한국사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낱낱이 보여주는 사회성 짙은 영화다. 영화에서 우리는 요즘 맞닥뜨리는 각종 사회문제와 마주한다. 실직가장 문제(정철), 치매노인 문제(시어머니), 처녀와 유부남의 애정문제(연수), 미혼모 문제(정수와 재영), 도박과 가정폭력 문제(근덕과 선애), 암환자와 호스피스 문제(인희).

인희가 애처롭고 우울해 보이는 것은 모든 문제의 한가운데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가족 모두와 그들이 처한 문제가 인희를 둘러싸고 진행된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인희는 모든 사람과 모든 문제 정중앙에 자리한다. 그래서 인희는 정작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 설령 말한다 해도 가족들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외면한다.

인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의 희생양이다. 아내와 며느리의 이름으로, 엄마와 누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족의 폭력에 희생되는 여인이 인희다. 왜 그녀는 더 일찍 자신의 몸을 추스를 수 없었던 것일까.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이 전문의였는데도 말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마지막 시점까지 인희는 왜 치매 시어머니를 돌봐야 하는가.

인희는 효부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가슴 떨리고 잘 만들어진 대목은 인희가 시어머니 목을 조르는 장면이다. 한국 사회에서 치매 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절절하게 보여주는 장면. 고귀한 인간성과 존엄성, 아름다운 추억마저 망각한 채 개돼지처럼 패대기쳐진 인생의 추악한 양상을 처절하게 드러내는 치매.  

글을 마치면서

인희는 21세기 한국에서 멸종된 천사표 아내, 엄마, 며느리 그리고 누나다. 그런 인희를 찾는 것은 우리 과제가 아니다. 지난 시대의 허상을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차라리 이 시대와 어울리는 새로운 어머니와 아내, 며느리와 누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기 본연의 자태를 확고하게 지켜가는 건강하고 힘있는 여성상을 찾을 일이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우리가 잊고 지내왔던 문제들을 들춰내고, 그것의 생채기를 생짜로 들여다보게 한다. 영화의 미덕이다. 나날이 늘어가는 치매노인들과 대책 없이 죽음과 대면하는 환자들, 미해결로 남아 있는 미혼모문제. 민규동 감독은 관객에게 눈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나직하게 묻고 있었다. 자, 어찌하시렵니까.

관객들이 숨죽이며 눈물을 닦고 있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자세히 오래 보아도 풀꽃 인희는 사랑스럽지도 예쁘지도 않았다. 그냥 답답하고 서러웠다. 죽어서나마 인희는 다정한 남편, 정신 말짱한 시어머니, 총각을 사랑하는 연수, 대학생활에 행복한 정수, 정신 차리고 새 삶을 찾은 근덕과 만나기 바란다. 아아, 저주받을 전근대 한국사회여, 아듀! 

가족 엄마 며느리 누나 치매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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