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값 이천만 원과 K군의 변질, '정의'란 무엇일까?

[서평]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등록 2011.02.11 09:16수정 2011.02.1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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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8월 아산정책연구원과 김영사 주최로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마이클 샌델 교수. ⓒ 김영사


20대 혈기왕성한 K군은 대학시절 본인 스스로 열렬한 진보주의자라 주장했다. 그는 맑스(K. Marx)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존 롤스(John Rawls)가 주창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없앨 복지 개념의 사회정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약자에 편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그의 어린 신념은, 권력을 쥐고 있는 일련의 보수집권자들을 향한 반항심으로 발전하기도 했고 이상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졸업을 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던 커다란 기업에 입사하면서부터 그의 '정의'는 변화한다. 흔히 말하는 '무지의 장막'이 걷히고 자신의 인생이 안정권에 들 것이란 확신이 들자, 그가 대학시절 약자에 편에 선 이유는 불안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보험과도 같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 명의로 된 차와 집이 생기면서, 그는 과거 대학시절에도 자신보다 못한 친구가 차상위계층이라는 이유로 높은 학점을 받거나 장학금을 받는 것을 마뜩찮게 생각했으며,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는 사소한 것이더라도 이념보다 실리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이제 과거나 지금에도 K군에게 정의는 없다. 그는 그렇게 변해버린 자신을 불쾌해하면서도, 자신의 동네가 이번에 뉴타운으로 선정되리라 얘기하는 정치인에게 투표를 하러 나섰다. 씁쓸한 얘기다.

맷값으로 이천만 원, '정의'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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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 김영사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어째서 그렇게 K군이 정의를 져버렸는가에 대한 의문을 넌지시 던진다. 무엇 때문에 K군의 정의는 환경과 배경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야만 했는가.

실제로 '정의'는 인류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탐구되던 주제다.

'올바름'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행동을 규정해야 할 원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널리 사용되는 언어일수록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기에 '정의' 역시 넓은 스펙트럼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수학과 같은 정리된 공리가 아니라, 다양하고 예기치 못한 무수한 경우를 상대해야 하는, 모래 위에 세워진 개념의 성이기 때문이다.


이미 60만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만권을 넘기면 '초대박'이라고까지 이야기되는 출판계에 돌풍을 일으킨 이 <정의란 무엇인가>의 성공은, 사실 다소간 '하버드'라는 이름과 아울러 맷값으로 2천만 원을 지불하는 깡패 같은 재벌들이 나타나는 한국사회에 염증을 느끼던 대중들이 충분히 이끌릴만한 책 제목의 섹시함에 빚진 감이 없지않아 있다. 하지만 그런 겉포장을 치우고 그 내부를 바라보더라도 이 책은 베스트셀러에 값하는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정의'에 대해 말하지 않는 <정의란 무엇인가>

이 책이 하버드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정의'에 대한 개념투쟁의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런 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그러면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경쾌한 대화조의 문체로 어려움 없이 읽히도록 유도해 주기 때문에? 물론 그런 점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다는 아니다.

그러면 베스트셀러에 값하는 이 책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역설적이게도 이 책이 '정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의를 말하는 책이 정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평을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말로 이 책은 정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물론 샌델은 은밀하거나 직접적으로 정의에 대한 자신의 공동체주의를 드러낸다. 그는 정의론의 당대 최고 거두였던 존 롤스를 비판하며 스타덤에 오른 학자다. 정의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가 없을 리 없다. 하지만 샌델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도, 이 책에서 거론된 무수한 정의에 대한 개념들도 실은 정의에 대한 답을 말해줬다고 하기 어렵다.

그것은 거론된 모든 정의가 그 나름의 약점을 가지고 논박의 과정에서 투쟁중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저자인 샌델의 이야기조차 장구한 개념사의 한 자리는 차지할 수 있을지언정, 불변의 정답으로써 자리하긴 어려울 것임을 또 다른 논증을 통해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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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베스트셀러에 값하는 이 책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역설적이게도 이 책은 정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김영사


그래서 정의에 대해 말하면서 정의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 책이 정말로 보여주는 것은 실은 '정의의 어려움'이다. 여러 사상가들이 수많은 고민을 거쳐 그들 나름의 정의개념을 세웠고, 그 개념이 또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논증을 거친 논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의'라는 단일한 단어는 도저히 융합될 수 없어 보이는 상반된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샌델은 이 책을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정의의 어려움을 보여주기에, 이 책은 역설적으로 정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다. 섣부른 정의를 주장하지 않기에, 정의에 대한 다각도의 조명을 가능케 하고 그 위에서 정의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하도록 우리에게 유도해 내기 때문이다.

정의의 어려움만을 보여주면 정의에 대한 우리의 물음 자체를 지워버릴 수 있다고 혹자는 말한다. 이른바 '문화 상대주의'라는 개념이 흔히 우리를 그러한 질곡으로 끌어들이듯, 정의에 대한 논쟁사를 살피며 논평하는 <정의란 무엇인가>는 독자에게 그러한 일종의 무력감만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정의'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본능에 각인된 가치'임을 논증으로 알려준다. 그래서 정의란 개념은 문화 상대주의란 용광로 속에서도 용해될 수 없다. 인간이란 존재는 국경과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어 본능적으로 정의를 갈구하고, 이미 성립된 정의 개념 위에서 우리의 삶을 산다고 이 책은 말한다.

'정의', 그리고 한국사회에서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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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의 '정의'가 위협받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의 또 다른 주제다. ⓒ 김영사



그런 관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라는 개념이 실은 지극히 정치적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보여주듯, 세상에는 불공평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실제로 있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예컨대 4대강을 개발하는 것이 개발의 이름 아래 정의롭고, 무상급식을 하지 않는 것이 효율의 이름 아래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가 무력하게 침묵하고 있다면, 심지어 정의라는 개념의 내용을 그들이 채워버릴 우려조차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정의'라는 개념을, 우리 사회의 투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터득하게 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전투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정의를 고민해야만 한다. 우리가 믿지 않고 동의하지 않은 정의를, 그들이 '우리의 정의'로 가로채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변질된 K군이 다시 나름의 '정의'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리커버 특별판) -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의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와이즈베리, 2014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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