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사법부, 35년만에 박정희를 이기다

대법원 긴급조치 1호는 민주주의와 국민 기본권 침해 위헌

등록 2010.12.17 17:03수정 2010.12.1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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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국가를 통털어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악랄한 독재헌법이 있었다. 이른바 '유신헌법'이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폭압적인 분위기에서 개헌을 밀어붙인다.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사람은 곧장 빨갱이로 몰려 반공법, 보안법의 모진 채찍에 시달려야 했던 시대였다. 참담하고 암울했던 시대였다.

유신헌법, 천하에 둘도 없는 '개망나니'였다

유신헌법. 개망나니였다. 입법·사법·행정 3권을 모두 대통령에게 몰아줘 광포한 독재자 박정희의 집권을 연장해 주는 장치였다.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꾸고 국회의원 1/3과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만들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통해 대통령이 아니라 '절대군주'가 되려 했다.

독재의 총칼 때문에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던 시대였지만 그래도 목숨 걸고 민주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독재타도'를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아무도 없는 철창 골방에 가둬 두고 싶어 안달이 난다. 이리하여 궁리해 낸 게 바로 '긴급조치'다.

1974년 1월 8일 오후 5시에 발동된 '긴급조치 1호'는 대략 세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⓵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거나 반대하고 왜곡하는 행위를 일절 금하며 ⓶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는 행위를 불허하며 ⓷이를 위반한 사람은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하고 구속, 수색할 수 있으며 1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유신헌법위해 동원한 악랄한 깡패, '대통령긴급조치'

악랄했던 '긴급조치 1호'의 내용을 제대로 '번역'하면 이런 게 된다. <박정희 개망나니 헌법(유신헌법)을 반대하지 말 것이며, 박정희 정권을 비방(유언비어)하지 말아라. 만일 위반하면 초헌법적(영장 없이 체포,구속,수사)인 독재권력의 총칼로 뭉개버리겠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민주세력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고 천인공노할 '음모'를 꾸민다.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이다. 학생, 종교인, 정치인, 시민 1024명이 북한, 조총련과 연계된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반체제 운동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는다. 180여명이 '인민혁명당과 조총련, 일본공산당, 극좌파'의 사주로 정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하려 했다는 '황당한' 혐의로 구속·기소되고 김지하, 이철씨 등 7명이 사형을 선고 받는다. 이들에게 선고된 형량의 합은 자그마치 1650년이었다.

'긴급조치'와 '유신헌법'의 최고 공신은 바로 사법부

법관 임명권을 쥔 박정희에게 사법부는 그저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해 짖어대는 개일 뿐이었다. '긴급조치'의 일등 공신은 법원과 검찰이었다. '긴급조치' 발동의 근거인 유신헌법 53조("대통령은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고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에 대해 재야 학자들은 '헌법이라도 기본권과 민주정신을 침해하는 건 위헌'이라고 반발했지만, 사법부는 '헌법에 나와 있으니 헌법을 따라야 한다'며 박 정권에 머리 조아리며 충성을 다했다.

이랬던 사법부가 오늘(16일)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이날 긴급조치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수감되었던 오종상씨(70)에 대한 재심 상고심에서 "긴급조치 1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결했다.

1975년 대법원이 '긴급조치는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린 지 35년 만에 드디어 제 정신을 차리고 긴급조치 관련 대법원 판례들을 폐기한 것이다.

'긴급조치'의 종범 사법부, 35년 만에 위헌 판결

독재권력의 충견으로, 유신헌법 체제의 시녀로, 긴급조치의 최대 협력자로 살아온 사법부가 35년 만에 자신의 과오를 국민 앞에 고백한 셈이다. '긴급조치'에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부는 "긴급조치 1호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현행 헌법은 물론 발효 근거를 뒀던 유신헌법에도 위배된다"고 밝혔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번 사법부의 결단은 일단 환영해야 할 일이다. 원래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단을 하는 것이 순리이나, '긴급조치'의 종범(從犯)인 사법부가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위헌 결정을 한 셈이 됐다.

사법부는 2009년 9월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게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바 있어, 이번 '긴급조치 위헌 판결'은 이용훈 대법원장이 꾸준히 진행해온 과거사 정리의 큰 획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사법부 다시는 권력의 '시녀'로 행동해선 안돼, 3권분립 수호자돼야

'긴급조치'는 한때 대한민국을 마구 유린했던 '깡패'요, '불한당'이었다. 2006년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된 589건 중 술 자리 대화나 수업 도중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시민과 학생이 기소된 경우가 282건으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일단 환영한다. 사법부가 늦게나마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긴급조치는 위헌'이라고 선언한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이것으로 짐을 벗었다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된다. 35년 동안 침묵해왔던 사법부의 용렬하고도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국민 앞에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 또 이번 경우를 시금석으로 삼아 다시는 권력의 시녀, 정권의 충견 노릇을 하지 말고 국민을 위해, 이 땅의 민주 발전을 위해 3권 분립의 정신을 굳게 지켜가길 바란다.

현정권 타산지석 삼아 민의 거스르지 말기를

긴급조치 위헌 판결까지 35년 걸렸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딴판인 세상이다. 정보 유통이 전광석화 같고 민의도 높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확신이 국민 정서의 기저에 충만하다. 권력의 잘못이 드러나고 심판 받기까지 순식간에 진행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그렇다면 현정권도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한다. 산천초목을 떨게 했던 독재권력도 결국 국민의 뜻을 꺽지 못했다. 4대강 사업, 예산파행, 불법사찰, 인사편중, 중요정책 일방처리 등 국민의 뜻을 저버리는 일련의 행태에 대해 국민적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민의를 거슬러서는 안된다.
#긴급조치 위헌 #유신헌법 #박정희 독재 #이용훈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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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시사 분야 개인 블로그을 운영하고 있는 중년남자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미래이고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미래를 향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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