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재 넘고 31번 국도 따라... 심봤다

[스물한 살, 내일로 가는 칙칙폭폭 전국일주 6 ] 영월 - 下

등록 2010.07.20 08:29수정 2010.07.3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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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를 둘러본 뒤 다시 나룻배를 타고 뭍으로 나왔다. 단종이 살던 곳을 다 보았으니 이제 그가 죽어서 묻힌 곳을 가얄 터. 장릉까지 족히 이십 분은 걸릴 듯한데 더이상 걸어갈 엄두는 안 난다. 장릉 안에서 또 한참 걸을 것 같아 이번에는 택시를 타기로 한다.

택시가 자주 다니지는 않는 것 같아 관광안내소에 물어보니 콜택시가 있지만 "꼭 불러놓고 나면 빈 택시가 지나가더라"며 잠시 기다려보라 한다. 급할 것 없는 걸음이라 그러기로 한다. 말을 붙인 김에 안내소에 계신 아주머니는 혼자 여행하는 거냐고 물으시며 용기가 대단하다 칭찬을 해 주신다. 물을 좀 얻어 마실랬더니 생수 하나를 통째로 주시며 응원을 보태 주셔서 내심 신이 났다.


그늘에서 시원한 강원도 산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혔다. 좀 기다리니 택시가 금방 와서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출발했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여행을 왔느냐며, 어딜 구경했느냐며 재잘재잘 물으신다. 장릉까지는 한달음. 오 분도 채 안 걸린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릉, 장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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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서 본 신라 왕릉처럼 크진 않지만 왕의 능다운 기품이 있다. 다만 단종의 생애가 자꾸 떠올라서인지 무덤을 뒤덮은 떼처럼 푸르게 서글픈 느낌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 박솔희


조선의 제6대 왕에서 노산군으로, 그리고 서인으로 강봉되어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단종. 권력자의 눈치를 보기는 옛 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마찬가지여서, 후환이 두려워 그의 주검을 돌보는 자조차 없었다. 다만 호장 엄흥도가 "옳은 일을 하여 화를 당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며 동강에 띄워진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지금의 장릉 자리에 몰래 묻었다.

단종은 숙종 때에 와서야 왕으로 복권됐고, 그가 묻힌 자리도 왕릉으로 재정비됐다. 장릉을 비롯해 서울과 개성 등에 자리한 42기의 조선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는데,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한 기의 훼손도 없이 온전히 보존된 것은 세계사적으로 드물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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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가는 길. 입구에 들어서고도 야트막한 산 위로 난 오솔길을 좀 걸어야 능이 나온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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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가는 길에 누군가 쌓아놓은 돌탑. 단종의 돌탑이 망향을 기원하는 것이었다면 이 돌탑의 의미는 무얼까. ⓒ 박솔희


매표원이 일러준 대로 단종역사관을 먼저 보고 능으로 올라간다. 둘러보는 내내 젊은 엄마와 아들을 마주친다. 나중에는 인사까지 나눴다. 사소한 눈맞춤과 말 몇 마디지만 마음이 따뜻해진다. 인사하기. 서로를 반갑게 여기기. 모든 우정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인 것을.


막연히 왕릉이라니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본 신라 왕릉처럼 거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어서 약간 김이 샜다. 하지만 요절한 어린 왕의 무덤으로 적당해 보인다. 다만 뗏장만이 그의 무덤을 푸르고 또 푸르게 뒤덮고 있다.

옛부터 영월 사람들은 장릉에 신기(神氣)가 어렸다고 여기고 단종을 신처럼 모셔 왔다고 한다. 참배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참배객도 많다고. 그토록 영험하다면 여기까지 와서 못할 게 무언가 싶었는데 정식 참배를 하려면 의관도 갖춰야 하고 절차가 복잡해 보이기에 그만두었다. 다만 마음으로. (장릉 입장료 1400원, 영월군민 50% 할인, 관람시간 오전 9시 ~ 오후 6시, 영월 읍내에서 10분 간격으로 버스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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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한식의 단종제 때 사용하는 물을 길어올리는 우물)으로 향하는 신도(神道). 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고분고분 바깥으로 걸었다. ⓒ 박솔희


仙돌? Standing 돌? 어쨌거나 장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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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재 정상에서 서쪽으로 100m 지점에 위치한 '선돌' 아래로는 서강이 흐른다. ⓒ 박솔희


장릉에서 읍내 반대쪽 언덕으로, 청령포에서 장릉의 거리만큼을 더 가면 나오는 선돌. 서 있는 돌이라고 해서 선돌인데, 신선이 노닐 던 곳이라고도 하니 신선 仙 자를 썼다고 우겨도 어색함이 없을 듯하다.

딱딱하게 말해서 선돌은 세로로 길쭉한 돌 두 덩어리가 서 있는 게 전부지만, 그래서 올까말까 조금 고민하기도 했지만 정말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1박 2일>도 왔다 갔다 하고, 꼭 한 번 구경할 만한 곳이다. 소나기재를 넘어 불어오는 청풍과 발밑으로 흐르는 서강. 신선이나 된 양 기쁘다. 청령포랑 비슷하게 생겼다 싶게 서강이 둘러싼 마을과 구름이 드리운 산.

감정은 그 끝에 가면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아주 슬프면 오히려 웃음이 나고 지극한 기쁨이 눈물을 뽑아내기도 한다. 선돌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너무나 아름답고 기쁜 것이어서 차라리 눈물이 난다. 찬바람이 불어와 눈가가 시렸다.

소나기재 넘고 31번 국도 따라... 비밀장소를 발견하는 걷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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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320미터 소나기재 정상. 높진 않지만 고개 위라서 확실히 바람이 시원하다. ⓒ 박솔희


어차피 선돌에서는 택시도 없고 하니 이번에는 걷기로 한다. 소나기재 정상에서 영월 읍내로 내려가는 길. 아스팔트 깔린 도로를 걷는 건 싫어하는데 여긴 뭔가 '걸음직'하다. 차로도 잘 다녀본 적 없는 고갯길, 완만한 경사를 따라 걸으면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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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재를 넘어 영월읍내로 들어가는 31번 국도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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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고장 영월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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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예쁜 꽃밭에 서 있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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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던 바이커. 그도 나처럼 가까이 관찰하는 재미를 느끼고 있겠지.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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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에 있던 작은 무덤. 장릉을 보고 온 뒤라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달까. ⓒ 박솔희


차를 타고 고갯길을 내달렸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꽃과 바람, 자전거를 탄 여행자, 생소한 표지판들과 스스로의 그림자까지 모두 신선했다. 보물찾기하는 기분이다. 차로 씽씽 지나쳐 버리면 그뿐일 이 국도변에 이렇게 꽃을 심고 장승을 세워 가꾼 이는 누구일까. 그 섬세한 마음이 참 곱다.

도로변에는 여느 산골짝에서든 다 볼 수 있는 무덤이 몇 기 있다. 왕의 무덤은 능이지만 보통 사람들의 무덤은 묘라고 한다. 일 년에 서너 번이나 사람의 손길이 닿을까 말까 하는, 그나마도 몇 세대가 지나면 잊혀지고 말 이 작은 묘. 산 날보다 수백 배의 세월이 간 뒤에도 날마다 백성들의 참배와 문안을 받는 장릉. 그런데 왜 나에게는 아직도 단종만이 유독 서글프게 느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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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엄흥도. 엄흥도 기념관에 있는 동상 ⓒ 박솔희


얼마나 왔을까. 유유자적 하늘과 바람과 햇살을 즐기며 걷다보니 못 들어본 건물이 나타났다. 들어가보니 단종이 승하했을 때 그의 시신을 수습했던 충신 엄흥도의 기념관이다. 영월 읍내를 중심으로 그린 도보용 지도에는 나오지 않고 영월 전체와 다른 지역 일부까지 표시한 도로 지도에는 작게 표시돼 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된 기분에 우쭐해진다. 이런 게 도보여행의 묘미로구나.

엄흥도 기념관을 지나니 또 지도에 없는 보물이 등장한다. 물무리골 생태학습원. 나중에 알고 보니 장릉 바로 뒤편에 있는 것이다. 벌써 장릉까지 다 내려왔구나. 울창한 숲 사이로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고 식물이 자라는 곳에 그림이 그려진 표지판을 함께 세워 두어 확실히 공부에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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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에 그림이 있으니 함께 자라난 여러 식물 가운데 어떤 것이 대극인지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 박솔희


장릉 입구까지 내려왔지만 장릉은 이미 닫은 뒤라서 택시가 없었다. 읍내로 가는 버스가 10분마다 다닌다고는 하는데 어차피 읍내를 지나서 역까지 가야 하는데다 여기저기 기웃대다 보니 기차 시간이 빠듯해져서 일단 계속 걸었다. 여기서 내 영월 여행의 마지막 선물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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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노루조각공원. 이름 그대로 노루를 조각해 꾸며놓은 작은 공원이었다. 지역민들에게 훌륭한 쉼터가 되어줄 거였다. ⓒ 박솔희


소요비용
내일로티켓 54700원
왕눈이도넛츠 1000원
사진박물관, 청령포, 장릉 4400원
사진 인화 2000원
청령포-장릉 택시비 3500원
산채비빔밥 6000원
장릉-선돌 택시비 3800원
노루공원-영월역 택시비 3000원
오렌지주스 1000원
* 합계(내일로티켓 제외) = 24700원
역시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노루조각공원. 산책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부러 이 공원을 보러 영월에 올 리는 없겠지만 기왕 온 김에 보게 되니 덤을 얻은 기분이다.

드디어 택시가 한 대 지나가서 냉큼 잡아세웠다. 출발시간을 5분 남기고 기차역에 간신히 도착했다. 택시를 못 잡았다면 골치 아팠을 일이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듬뿍 받아 헤벌어진 입매를 하고서 제천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길었던 여름해가 천천히 기울어진다.

덧붙이는 글 | 더 많은 정보와 사진은 기자의 블로그에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더 많은 정보와 사진은 기자의 블로그에 있습니다.
#영월 #단종 #장릉 #선돌 #31번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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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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