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흘리며 응원했던 홍명보 승부차기를 어찌 잊으리오

[월드컵 그때 그 순간] 2002년 월드컵 스페인전 응원의 기억

등록 2010.06.17 13:38수정 2010.06.17 15:1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6월. 세상이 월드컵으로 붉게 물들었지만, 축구에 전혀 관심없는 어머니와 야구에만 관심많은 나는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양 월드컵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거리응원도, 트위터의 온갖 월드컵 관련 글도 내게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러다 우연히 거리응원전 화면을 보신 어머니께서 내게 물으셨다.

"저렇게 사람들 많은 데서 응원하면 재미있겠네?"
"재미는 있지요. 뭐, 사람들 많은 데서 보니깐…. 사실 가보면 정말 재미있어요."
"너 꼭 가 본 것처럼 이야기한다?"
"나 가봤잖아요. 고3때 문수구장에."
"아, 그 때 무릎 다 깨먹고 온 날?"

그랬다. 축구와 등돌리고 살았던 내가 딱 한번 거리응원에서 피를 튀기며 응원했던 날, 그 날은 2002년 월드컵 스페인전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을 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해. 난 고3이었고 그 때도 월드컵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주위에서 바람을 넣으면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 사람 심리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울산 문수구장에서 경기가 있을 경우 경기 응원하러 가라고 1, 2학년 수업을 일찍 마쳐주었다. 그건 우리나라 경기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였고, 덕분에 썰렁한 학교는 고3들이 지키고 있었다. 1, 2학년들이 모두 수업을 일찍 마치니 아무리 고3이라도 마음에 바람이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월드컵 개막식은 교실 안에 있는 대형 TV로 보았고, 교실 안 컴퓨터로 어느 팀이 이겼는지 정도는 다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갑자기 문수구장에서 거리응원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문수구장에서? 언제?"
"스페인전 때 한대. 난 그 날 갈건데 같이 안 갈래?"

주위에 있던 친구들은 바로 그 날 거리응원을 보러 가겠다고 했지만, 난 거리응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쳤다고 말씀하시던 부모님께 허락을 받을 길이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거리응원에 가면 정말 재미있다고 하면서 나를 계속 유혹하는(?) 통에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그 날 같이 가겠다고 했다.

스페인전, 응원뿐만 아니라 피도 봤다

그리고 결전의 날. 부모님께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고 적당히 둘러대고 수업이 마치기를 기다렸다. 이미 친구들 중 한 명이 자기 동생을 시켜 전광판이 정말 잘 보이는 자리를 맡아놓았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 빨리 가야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통에 학교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전속력으로 뛰었다.

하지만 시련은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마치 전교생이 다 문수구장에 가는 것처럼 근처 버스정류장은 이미 우리 학교 학생으로 가득했다. 가장 빨리 오는 버스를 무조건 잡아야한다는 생각에 문수구장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을 밀치고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정류장에서 문수구장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한 시간, 버스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꽉 차서 도저히 앉을 수 없었다. 다리는 아파 오고, 차는 밀리고. 아, 뉴스에서만 보던 출근길 교통지옥이 이런 건가 싶었다.

그렇게 달려서 문수구장에 도착하니 버스에서 사람들이 말 그대로 물밀듯이 쏟아졌다. 이 사람들을 앞질러서 이미 맡아놓은 자리로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급한데, 내내 서서 오느라 다리의 힘이 쭉 빠져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또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일이 벌어졌다. 툭 튀어나온 보도블럭에 걸려서 넘어져버린 것. 그냥 조금 다쳤겠지 생각하고 또다시 무조건 뛰었다. 무릎이 쓰라렸지만 그걸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달리지 않으면 앉는 것조차 힘들겠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계속 달려오고 있었다.

다행히 이미 맡아놓은 자리엔 아무도 없었고, 나와 친구들은 그 곳에 앉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넘어진 상처가 어느 정도인가 싶어 무릎을 보는데, 이건 상상 그 이상이었다. 양쪽 무릎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두 다리 모두 긁힌 자국이 여러 군데 나 있었다. 놀라기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소독약부터 발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구급대원이 근처에 있지 않겠느냐고 그러는데, 조금 있으면 피가 멈출 거라 생각해서 그냥 휴지로 상처를 틀어막기만 했다.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었다. 사실 경기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울산대학교 응원단이 응원을 주도했는데, 구호를 외치는 거나 파도타기 하는 거나 지금이랑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주위는 온통 붉은 색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조금이라도 기회가 오면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다 똑같았다. 물론 나는 더 정신이 없었다. 지혈을 해서 피는 어느 정도 멈췄지만, 상처에서 투명한 고름이 나오고 있어서 상처에서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봐야 하고 응원도 해야 하고 상처도 봐야 하고.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그렇게 경기는 진행되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32강전이면 무승부로 끝났겠지만, 8강에선 무승부가 없기 때문에 승부차기를 하게 되었다. 스페인 선수들이 공을 찰 때마다 내 눈은 이운재 선수의 두 손과 공에 집중되었고, 스페인 선수가 승부차기를 성공하면 마치 학교 시험 범위가 갑자기 늘어난 것만큼 안타까워했다. 대신 우리나라 선수들이 공을 찰 때에는 그 반대였다.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홍명보 선수가 찬 공이 스페인 골키퍼의 손을 피해 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항상 똑같은 표정이던 홍명보 선수가 활짝 웃는 순간, 우리도 웃었다. 나 또한 상처를 휴지로 꼭 누른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그렇게 스페인 대표팀을 이겼다.

a

마침내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홍명보 선수가 찬 공이 스페인 골키퍼의 손을 피해 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 김정철


그로부터 8년, 내 무릎에 남은 훈장

거리응원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반창고를 사서 무릎에 붙였다. 거리응원 가서 무릎을 깨고 온 걸 알면 불똥이 배가 돼서 돌아올 것 같았다. 집에 가니 예상대로 부모님은 내가 거리응원을 갔다는 걸 바로 눈치채셨고, 내 무릎을 보시더니 다쳤느냐면서, 무릎에 붙어있던 반창고를 떼라고 하셨다. 그 뒤, 상처를 보신 부모님께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셨고, 난 상처가 나을 때까지 매일 소독약과 연고를 무릎에 바르게 되었다. 그나마 이긴 경기라 다행이지, 진 경기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더이상 약을 바르지 않아도 될 만큼 상처는 많이 아물었다. 하지만, 그 날의 흉터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치 훈장처럼 내 무릎에 남아있다. 덕분에 무릎 위로 올라가는 치마나 바지는 입을 수가 없지만, 그래도, 그 날은 내가 본 축구 경기 중에서 가장 재미있던 날이었다.

그나저나, 내 피가 묻은 문수구장 보도블럭은 아직 있으려나?
#월드컵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모임서 눈총 받던 우리 부부, 요즘엔 '인싸' 됐습니다
  2. 2 카페 문 닫는 이상순, 언론도 외면한 제주도 '연세'의 실체
  3. 3 생생하게 부활한 노무현의 진면모...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
  4. 4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던 동네... 충격적인 현재
  5. 5 윤 대통령 한 마디에 허망하게 끝나버린 '2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