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해요, 차마 풍년은 못 빌겠어요"

정월대보름 맞아 달집을 태우며

등록 2010.03.02 14:18수정 2010.03.0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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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면 달맞이축제에서 활활 타오르는 달집 ⓒ 박미경

동면 달맞이축제에서 활활 타오르는 달집 ⓒ 박미경

"얘들아, 이따가 달집태우는데 갈거니까 컴퓨터 그만하고 준비해."

"뭐 달집? 그럼 불깡통도 돌리겠네, 아싸!"

 

정월대보름 행사장에 가자는 말에 컴퓨터에 매달려 있던 아이들이 반색을 한다. 행사장에 가면 이런저런 먹거리도 먹을 수 있고 널뛰기며 제기차기 등의 놀이도 할 수 있는 데다 특히 이번에는 불깡통을 신나게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막상 가려고 하니 하늘에서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정월대보름행사라는 것이 달집을 태우고 불깡통을 돌리는 일이 주된 행사인데 비가 오니 난감할 수밖에.

 

하지만 길게는 한 달여 가까인 준비한 행사일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길을 나섰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빗줄기는 더 굵어졌고 어둠도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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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위해 열심히 불깡통을 돌려주는 아빠. ⓒ 박미경

아이를 위해 열심히 불깡통을 돌려주는 아빠. ⓒ 박미경

우선 시댁인근 마을에서 올해로 두 번째 열리는 동면달맞이행사장을 찾았다. 다행히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달집이 타오르고 있었다. 논에서 행사를 하는지라 온통 바닥이 질퍽질퍽 거린다. 움직거리기 편하라고 바닥에 짚풀을 잔뜩 깔아놓았지만 푹푹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이들과 함께 달집 옆으로 들어서니 마음씨 착한 동면번영회장님께서 왜 이리 늦게 왔냐며 반기시더니 달집 사진을 찍으라며 일부러 기름을 달집에 부어주셨다. 기름을 둘러쓴 달집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활활 솟아오르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달집 주위에 떨어진 작은 불파편들이 후두둑 쏟아지는 것이 마치 불비가 내리는 듯하다.

 

동면달맞이행사의 백미는 청년회원들과 부녀회원들이 함께 준비해 대접하는 푸짐한 먹거리다. 지난해에는 번영회를 중심으로 행사가 진행됐지만 올해는 동면을 대표하는 지역축제로 만들고 싶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기획되고 준비됐다.

 

젊은 청년들이 마을 어르신들에게 음식도 대접하고 함께 달을 맞이하는 흥겨운 한마당잔치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르신들이 많이들 오셨다. 청년회원들이 챙겨주는 찰밥 몇 덩이를 받아들고 화순전대병원 인근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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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전남대병원 공터에 마련된 정월대보름한마당축제에서 타오르는 달집 ⓒ 박미경

화순전남대병원 공터에 마련된 정월대보름한마당축제에서 타오르는 달집 ⓒ 박미경

화순전대병원 인근 공터에서는 화순민주청년들이 여는 정월대보름한마당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다. 이곳 역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갔는데 역시나 달집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거센 빗줄기도 풍년과 한해의 안녕을 기원하며 타오르는 달집의 열기를 막아내지는 못하나보다 싶다. 동면에서와 달리 이곳에는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많다. 불깡통을 만들기 위해 피워놓은 모닥불 주위에는 아빠들이 아이 손에 들려 줄 불깡통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에고, 이럴줄 알았으면 아이 아빠도 함께 오는 것인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늦었다. 불깡통을 돌려보고 싶다며 모닥불 주위를 서성거리는 아이들을 위해 모닥불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불기가 남아 있는 나뭇가지들을 찾으니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래도 주섬주섬 챙겨 깡통안에 담아주니 강혁이와 혜준이가 신이나서 돌린다. 올해 9살이 되는 남혁이는 불깡통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머뭇머뭇 거린다.

 

평상시에는 억새들이 우거져 있던 공터라 그런지 발이 푹푹 빠지고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기는 하지만 아이들은 마냥 신나는 눈치다. 어느새 우산도 저만치 던져두고 어차피 진흙묻은 신발을 빨아야 한다며 대놓고 질퍽거리며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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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깡통을 돌리는 혜준이와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 박미경

불깡통을 돌리는 혜준이와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 박미경

한바탕 불깡통을 돌리고 난 아이들의 출출한 배를 달래주기위해 민주청년회에서 마련한 먹거리장터를 찾았다. 사실 이런저런 축제에서 먹거리장터를 찾다보면 내가 지불하는 액수에 비해 초라한 내용의 음식 때문에 실망하는 일이 많아 망설여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웬걸, 큼지막한 파전이며 대파와 무 등을 넣고 푹푹 우려낸 국물로 만든 어묵, 회원들이 손수 만들었다는 김밥 등 모든 먹거리가 단돈 천원이란다. 세 아이들에게 컵라면 하나씩 먹이고 뜨끈뜨끈한 오뎅에 파전, 김밥까지 먹어도 1만원이 채 안 된다. 덤으로 김이 모락모락나는 백설기까지 한덩이 안겨준다. 횡재한 기분이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난 후에도 달집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타오르는 달집을 바라보며 올해도 풍년이기를 기원해야겠지만 웬일인지 풍년들게 해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갈수록 치솟는 비료값과 농자재값, 유류값, 그에 비해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이지만 자식처럼 기른 농산물을 차마 버릴 수 없어 할 수 없이 내다 판다는 농민들의 걱정을 귀동냥으로 들은 터라 차마 그랬다.

 

간간이 각종 언론 등을 통해 성공한 억대 농업인들의 사례가 보도되기는 하지만 극히 소수일뿐, 대부분의 농민들은 농업만을 생계수단으로 삼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사실을 익히 아는 터라 더욱 그랬다.

 

그래서 풍년이 들든 흉년이 들든 농민들은 제값 받고 농산물을 걱정없이 팔고, 농산물을 사먹는 이들은 너무 비싸지 않는 가격에 좋은 농산물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한해가 되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축축한 정월대보름의 봄비가 수확기 농민들의 눈물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sbs유포터, 다음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3.02 14:18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sbs유포터, 다음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화순 #달맞이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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