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연쇄살인] 평양 골프장에 나타난 <조센> 기자

김갑수 통일추리소설 BK연쇄살인사건 (41회) 사이코패스

등록 2009.11.28 09:20수정 2009.11.2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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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과 안동준이 나서 현장 감식과 사체 검시에 착수했다. 민숙이의 몸에는 교살 흔적이 뚜렷했다. 아이의 목에는 사람 손아귀에 졸린 자국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린것의 바지는 반으로 잘린 채 윗부분이 방석처럼 엉덩이 밑에 깔려 있었고 셔츠는 둘둘 말려서 베개처럼 목을 받치고 있었다. 속옷과 바지 아랫부분과 운동화는 가방에 가지런히 담겨 발 옆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사타구니에 나 있는 상처는 야만적으로 벌어졌던 성폭력을 처참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김인철과 안동준은 현미경으로 사체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결과 족적과 모발과 체모 몇 점씩이 발견되었다. 현장의 북한 수사관들은 치를 떨었다. 그들은 성폭행 당한 여자 어린이의 사체를 처음 보는 듯했다. 온천군 보안소장은 작은 마을이니 동네 사람들의 신발만 조사해도 범인을 쉽게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평양에서 내려간 네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 말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평양의과대학병원에서 실시한 부검 결과 민숙이의 직접 사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판명 났다. 처녀막 파열이 확인되었으나 정액은 검출되지 않았다. 범인은 어린것을 성적 희롱과 학대의 제물로 삼은 것이었다. 범인은 손으로 추행하다가 어린이가 저항하자 목을 눌러 죽인 것이었다. 손· 발가락의 관절에 경직이 나타났고 눈의 각막이 안개처럼 혼탁해진 것으로 보아, 사망 시각은 시신 발견 전날 밤 10시 경으로 추정되었다.

조수경은 사건의 범인이 여자 둘을 죽인 대동강 사건의 범인과 동일인일 것으로 직감했다. 아니, 차라리 동일인이라고 믿고 싶었다. 유천일과 온천군 보안원들은 그 어린것을 왜 살해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엄마와 길이 엇갈린 단 15분 사이에 범인은 어떤 방법으로 어린이를 납치해 간 것일까? 학교에서부터 줄곧 미행하면서 기회를 노렸던 것일까? 우연히 마주쳐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일까? 그리고 사체를 십자가 형태로 눕혀 놓은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모종의 종교적 메시지일까?

일단 범인은 온천군에 연고가 있는 자일 거라고 추정해 볼 수 있었다. 온천군 보안원에서는 인근 마을의 탐문 수사에 착수했다. 조수경은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모발과 체모의 유전자 분석이 나오기를 초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조수경의 직감대로 범인의 유전자는 대동강 사건의 유전자와 일치했다. 그렇다면 그는 여성 살인에 맛을 들인 후 조직에서 이탈하여 살인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의 살인은 이제 소아 성폭행 살인으로 진화한 것이었다.


온천군 보안서에서는 사체 발견 현장 부근과 민숙이네 동네 주변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탐문 수사를 벌였다. 동시에 실종 당시 민숙이의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하여 목격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목격자가 나타났는데, 그는 고등중학교(남한의 중·고등학교) 2학년 학생 영수였다. 영수는 자전거를 끌고 가던 중, 인상이 날카로운 아저씨 하나가 민숙이와 마주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영수의 증언에 따르면 용의자는 나이가 40대 초반, 키는 165~170cm 정도, 어깨가 벌어진 다부진 체격, 황토색 셔츠와 검은 면바지 복장 등으로 인상착의가 정리되었다.

이어 또 다른 목격자가 나타났다. 그는 인근 부대의 군인 박현식이었다. 그는 사건 당일 저녁 7시경 부대 화물 차량을 몰고 실종 장소를 지나가다가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는 영수와 40대 남자를 모두 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수는 박현식의 차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영수와 박현식 두 사람이 말하는 40대 남자의 인상착의가 비슷했다. 보안서에서는 이 40대 남자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두 사람의 진술을 토대로 몽타주를 작성했다. 북한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공개수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한편 보안요원들은 범인이 남긴 족적과 같은 신발을 찾아 온천군 일대의 마을들을 뒤지며 돌아다녔다. 물론 그들의 손에는 용의자의 몽타주 사진도 쥐어져 있었다.

공개수사가 시작되자 주민들로부터 의심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다. 보안서에서는 그 중 다섯 명을 용의선상에 올렸다.

1.임인석(47세): 술을 먹고 부녀자를 희롱하거나 괴롭히는 일이 자주 있는 자. 본인의 부인(否認)과는 달리 주위에서는 그를 정신이상자로 간주함.
2.최창진(41세): 방직공장의 기대공(機臺工)인데 직장을 자주 이탈하여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목격됨. 몽타주와 많이 닮았음.
3.여종진(39세): 고분 관리원을 하다가 건강이 안 좋아 놀고 있는 자로 노모와 둘이 실종 장소 부근에 살고 있음. 사건 당일 실종 장소 부근을 배회하는 것이 목격됨.
4.조성률(33세): 콤바인 운전수로서 사건 며칠 전 민숙이를 차에 태워 준 사실이 있음. 사건 당일에도 실종 장소 부근에 장시간 콤바인을 주차시켜 놓았음.
5.박현식(27세): 유일하게 피해자를 목격한 자로 그의 진술대로라면 실종 장소에서 자전거를 끌고 가던 영수가 보았어야 할 터인데, 영수는 그의 차를 못 보았다고 진술했음.

보안원은 용의자 5명에 대한 주변 수사를 벌이고 직접 신문을 했으나 박현식을 제외하고는 범행 시간대에 알리바이가 성립되었다. 그들에게서는 현장에서 발견한 족적과 같은 신발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 시간에 실종 장소에 있었던 박현식만이 용의선상에 남아 집중적인 수사를 받게 되었다. 범인을 목격했다고 자발적으로 신고한 그가 오히려 의심을 사고 조사를 받게 되었으니 그의 불만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범인은 이 5명 가운데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범행을 저지른 것인지, 범인은 외지에서 온 사람인지 등 근거 없는 추정과 의혹만이 수사진과 마을 사람 사이에 번지고 있었다. 이와는 별도로 현장에서 발견된 다른 증거물인 섬유와 볼펜 등에 대한 성분 분석과 출처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고, 호구 조사 방식의 탐문 수사 등이 계속 진행되었지만 범인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조수경과 김인철은 북한 보안원의 수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오전에 평양 인민보안성에 출근했다가 오후에는 호텔로 와 시간을 보냈다. 김인철은 내일이면 북한 소련파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니 모레부터 함께 스터디에 들어가자고 말하며 김일성대학으로 갔다.

조수경은 골프연습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사건의 스트레스 때문에 목과 어깨가 온통 결리고 있었다. 그녀는 준비 운동이나 어프로치도 하지 않고 곧장 4번 아이언을 집어 들었다. 공은 똑바로 떠서 나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치는 공마다 슬라이스가 걸려 오른쪽으로 휘었다.

오늘 따라 강바람도 전혀 불지 않았다. 그녀의 전신은 이내 땀에 젖어들었다. 손가락에도 물집이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공을 날렸다. 타석 뒤에서 누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샷에만 열중했다.

그녀가 땀을 닦으려고 타석의 의자에 앉았을 때였다. 아까부터 그녀를 보고 있던 사람이 조수경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뜻밖에도 조센일보의 선준혁이었다. 선준혁은 빙글빙글 웃으며 조수경의 옆에 와 섰다.

"조 수사관님, 안녕하십니까?"

조수경은 일부러 모르는 체하며 물었다.

"누구시더라?"

선준혁은 여전히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남에서 온 선준혁입니다."

"난 또 누구시라고. 여기 보안원인 줄 알았네."

조수경은 다시 타석으로 들어가 드라이버 채를 집어 들었다. 플샷으로 공을 날린 조수경은 선준혁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건가요?"
"비행기로 왔습니다."

조수경은 썰렁한 유머는 낮은 지능지수와 경박함의 척도라고 말하곤 하던 용 부장을 떠올렸다. 그녀가 듣기로 평양 교외에 있는 태성골프장에서 KLPGA 대회가 열린다고 했다. <조센일보>에서 스포츠 기자 대신 선준혁을 보낸 데에는 분명히 의도가 있을 터였다. 그는 아직껏 남한에서 보도되지 않고 있었던 남북합동수사 상황을 캐러 온 것이었다.
#민숙이 #유전자 #소아성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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