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나 그냥 죽을랍니다

십여 년에 걸친 시험을 이제 끝내며

등록 2009.11.27 17:25수정 2009.11.2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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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 가운데 하나였던 미당 서정주 문제가 2009년 가을을 기점으로 일단락되었다는 느낌이다. 그동안 줄곧 거부 의사를 밝혀왔던 군수가 '미당문학제' 동참 쪽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하긴 김완주 전북 지사가 새만금 문제를 정리해준 이명박 대통령에게 '무릎 꿇고 큰절을 도민의 이름으로 올린다'는 공식입장을 밝혔을 때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는 했다.


십이 년 전 내가 고창에 처음 내려왔을 때 '미당 시문학관' 건립 문제로 설왕설래가 한창이었다. 현직 군수가 위원장으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었지만 별 성과는 없다는 얘기가 있었다. 농민회를 비롯한 몇몇 사회단체에서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 즈음의 어느 날 선운사 입구에서 수예점을 운영하는 이를 따라서 얼결에 미당 생가를 방문하게 되었다. 나도 수예를 좀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찾아갔던 것인데 주인이 전날 잔치를 했었다고, 좋은 음식이 많이 있는데 선생님께 좀 드리고자 한다고, 그러니 함께 가자고 해서 얼결에 따라나선 길이었다. 선생님이란 미당의 사촌 아우로 역시 시인이었고, 전북일보에서 주필과 사장으로 정년을 마치고 낙향해서 혼자 미당 생가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날 젊은 사람이라면 으레 갖춰야 할 깍듯한 큰절로 노시인과 첫 대면을 했다. 그런데 내가 올린 큰절이 노시인이게는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날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몇 달 뒤의 어느 날 가만히 앉아서 나를 돌아보니 내가 참 이상해져 있었다. 이런저런 협회장이며 지부장, 분회장, 학교장이며 사장님 등등 지역 사회에서 유지라고 할 수 있는 인사들과 술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고, 악수를 하고 있었고, 다음에 또 만나기를 기약하며 형님 혹은 선배님이라 부르고 있는 내가 흡사 하루아침에 유지라도 된 것 같았다. 

술자리에는 가끔 노시인이 동석하기도 했는데, 사실 나로서는 과분한 자리였다. 말이 좋아 고향이지 열두 살에 가출한 이후 거의 찾지도 않다가 패잔병처럼 내려온 고향길이었다. 때문에 학연도 없었고, 인맥이라 할 만한 것은 더더욱 있을 까닭이 없었다. 억지로 어떻게 꿰맞춰 보기로 하자면 서울에 있을 당시 문학판을 조금 기웃거렸다는 데서 오는 동질감이 노시인과의 인연이라면 인연의 전부였다.


그런 터무니없을 정도로 빈약한 인연임에도 불구하고 노시인은 내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 길을 넌지시 제시해주고 있었다. 그 중에 특히 기억나는 것으로는 "어디다 소설 연재라도 한 번 해볼래?"하고 마치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잡듯이 나온 그 한 마디를 던진 것이었다.

들을 때는 황송하다는 듯 애써 수줍은 웃음이나 흘리고 말았지만, 그 한 마디는 상당히 오랜 기간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래, 그것이라도 해볼까. 내일이라도 당장 찾아가서 한 번 더 무릎 꿇고 큰절을 올린 다음 소설 연재 그거 알아봐주시라고 할까.

밤마다 틈날 때마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선뜻 나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뭔가 개운치 못한 느낌이 발길을 잡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미당에 대한 내 개인적인 입장은 그때까지도 유보적이었다. 친일문제는 차치하고 전두환 생일에 바친 헌시를 보면서 분노로 치를 떨기는 했었지만,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거니, 이제 곧 그것을 밝혀 고향 사람들의 부끄러움을 덜어주겠거니 하는 막연한 기대가 없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투병 중이던 미당의 운명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화가 났다. 왜 이렇게 눈을 감아야 하지? 왜 이렇게 끝내고 마는 것이지?

내가 생각하기에 미당은 그렇게 눈을 감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반드시 찍어야 할, 찍어주어야 할 마침표가 있었다. 민망해서 긴 말을 못 한다면 아주 간단하게 한 마디 "내가 잘못 생각했던가봐" 정도는 인간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예의로라도 해주어야 했다. 같은 고향을 둔 사람으로서, 최소한 그 정도는 해주어야 후배들이 그나마 타 지역에 갔을 때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중앙일보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쁘게 봐줘" 이 한 마디만 남기고 있었다. 이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일 뿐이고,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조롱이요 모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 농민회 기관지 지면을 빌리는 등으로 그동안의 관망 자세를 풀고 비판에 나선 내 행위는 결과적으로 그동안 나를 '이쁘게' 봐주고 술까지 사준 '형님'과 '선배님'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어서 내심 괴롭기도 했지만, 어려운 숙제 하나를 해결했다는 홀가분한 느낌도 있었다. 그렇게 노시인은 물론이고 그분을 흠모하는 '형님' '선배님'들과 나는 처음부터 몰랐던 것처럼 소원해져 갔다.

그리고 이삼 년이 흘러, 중앙일보에서 '미당문학상'을 제정한 것을 계기로 고창에서는 미당관련 축제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농민회와 태평양전쟁 유족회 측의 강력한 반대로 일단 무산된 미당관련 축제는 이듬해 '백만송이 국화축제'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탄생했다. 그리고 내게도 다시 나를 '이쁘게' 봐주고 술을 사주던 '형님' '선배님'들로부터 간간이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잊을 만하면 어쩐다는 말처럼, 그야말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전화를 걸어와서 어떻게 사느냐, 고생이 많다, 어찌 그렇게 살려고 하느냐, 편하고 영광스런 길도 얼마든지 있다, 나와라, 나와서 의논도 하고 그러자, 하는 내용의 전화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걸려와서 나를 흔들었다.

내게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런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힘이 너무 없으니까 힘을 나눠주고자 하는 친절이었다. 힘을 나누고자 하는 '형님' '선배님'들의 객관적인 진실이 무엇인지는 내가 분석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럴 만한 능력도 없다. 어쨌든 내게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니라 외로움인 것 같았다. 외로움을 통해서 보다 깊어져야 한다는 절박한 어떤 것이 내 안에 있었다. 누구에게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욕구 때문에 통화가 끝나면 이내 잊어버리곤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어서 가끔 흔들리고도 있었다.

사람의 심리란 참 이상한 것이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라 해도 누군가 아이디어를 제공하면 거기에 관심이 간다. 그러면서도 선뜻 나서지는 못한다. 그렇게 시간이, 세월이 갔다. 그리고 금년 2월, 어머니에게는 죄송한 말이 되겠지만 전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어머니와 동거를 시작하게 되면서 미래도 역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홀로'일 때는 최악의 경우 산딸기라도 따먹으면 되지 하는 느긋함이 있었고, 수중에 가용 가능한 현금이 달랑 백원짜리 하나만 남아 있을 때도 나를 구속시키는 돈이 없어졌으니 나는 보다 자유로워졌다 하는 객기 같은 위로가 있었지만, 어머니와 함께 하는 삶은 그게 아니었다. 최소한의 예비비 정도는 있어야지 않겠는가 하는 초조감으로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지, 중얼거리는 시간이 잦아지고 있었다.

고민 끝에 내게 전화를 해주던 분을 찾아갔다.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정권이 바뀌었다. 세상이 변했다. 글로벌 시대 아니냐. 군수도 이제 곧 확실한 입장표명을 할 것이다. 아이템만 좋으면 사업비는 얼마든지 따낼 수 있다. 아이템이 없어도 괜찮다. 하다못해 청원경찰이라도, 꽃밭 가꾸기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내 발로 찾아가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만 있을 뿐 그럽시다, 같이 한 번 사업을 벌여봅시다, 하는 말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뭐랄까.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글은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리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자 하는 사형선고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이 글을 계기로 고향에서의 나는 지금보다 한층 더 외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밟아버린다'는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의 입을 통해 내 귀에 들려올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어쩌면 '밟아 버리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나설지도 모르는 '형님' '선배님'들께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나 그냥 죽어 버릴랍니다. 삶의 방식은 좌우 두 개가 아니라 아주 여럿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치기 시작했거든요. 죽기로 하고 나서면 잘사는 방법이 보일 수도 있다는 말은 정말 큰 진리인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나를 시험에 들지않게 하소서 응모글


덧붙이는 글 나를 시험에 들지않게 하소서 응모글
#사즉생 #미당 #친일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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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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