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연애, 25년의 결혼

페루 중년 부부 25주년 결혼 기념일에 다녀와서

등록 2009.10.05 10:15수정 2009.10.05 10:1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볼리비아에서 돌아와 고향같은 페루 2도시 아레끼빠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수도 리마로 올라가려는데 MSN에서 후안 Torre Blanca(또레 블랑까, 일명 하얀거탑)이 말을 건다.

 

"박우물, 지금 어디? 엉 아레끼빠라구? 그럼 화요일 저녁에 우리 집에 올 수 있어? 왜냐하면 그날이 내 결혼 25주년인데 와서 축하해줘야지."

 

부러라도 그런 경사스런 일이라면 내려올 판인데 마침 와 있는 상태니 그런 청을 거절할 리 없다. 대가족으로 알고 있는데 의미가 남다른 날이라 그런지 꼭 혼자만 오라고 한다. 여행자 처지에서 뭘 더 챙길 것도 없다. 챙기고 싶어도 볼리비아에서 배낭을 통째로 도둑맞아 한국관련 기념품 하나 있을 리 없어 새로 산 기타만 챙겨 티코 택시에 몸을 실었다.

 

8시까지 오라고 해서 부러 30분 전에 도착하였는데 이 집 대소사에 얼굴을 자주 비춘 탓인지 다른 이들이 맞아준다. 1시간을 기다려 얼추 거실이 다 차고 나자 그때서야 부부가 대기하고 있던 안방에서 밖으로 나온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에 이어 바로 두 부부가 우아한 왈츠춤을 선보인다. 이어 엄마는 아들과, 아빠는 장녀와 함께 커플댄스를 추고.

a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주인공 부부> ⓒ 박우물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주인공 부부> ⓒ 박우물

a

<부부가 처음 선보인 우아한 월츠, 그렇게 가시버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춤속에 함축한 듯 진지하게 선보였다> ⓒ 박우물

<부부가 처음 선보인 우아한 월츠, 그렇게 가시버시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춤속에 함축한 듯 진지하게 선보였다> ⓒ 박우물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예언자>의 칼릴 지브란과 메리 헤스겔의 플라토닉 러브에서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표현하는 것은 마음의 아주 일부일지 모르지만 라틴에서 일반인들과는 물론 가족간에 가벼운 스킨십을 통한 일상의 애정 표현은 이 이방인의 눈에는 찬미의 대상이다.

 

병석에서 오늘 내일하며 힘겨이 연명하던 어머니는 건강이 그런대로 회복되었는지 장남 아들의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러 와 의자에 앉아있다. 아들은 한 발걸음도 내딛기 힘든 어머니 팔을 부축해 가벼이 춤추는 동작을 연출한다. 그 노모의 주름지고 검버섯 선 이마에 입맞춤도 잊지 않고. 엄살처럼 지었다는 산울림의 <노모>라는 곡과 김목경,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와 같은 곡들도 묘사치 못할 늙은 어미의 모정은 버겁지만 살가로운 눈빛으로 아들 내외의 일거수 일투족을 쫓아간다.

a

<오늘 장남 결혼 기념일을 위해서 힘겨이 참석한 노모, 아들은 그런 어머니에게 장난스런 몸짓으로 춤을 청하나 진행될 수 없는 춤이었다> ⓒ 박우물

<오늘 장남 결혼 기념일을 위해서 힘겨이 참석한 노모, 아들은 그런 어머니에게 장난스런 몸짓으로 춤을 청하나 진행될 수 없는 춤이었다> ⓒ 박우물

 

영어를 잘 하고 공학을 전공하는 훤칠한 아들은 빔 프로젝트를 조작하여 엄마아빠가 미혼때부터 사진을 슬라이드로 벽 화면에 투사한다. 딸 Rosalena도 170cm는 넘는 걸로 알고 있으니 가족 모두가 몸매에서는 여기 현지인들 같지 않게 드물게 날씬하고 길다.

 

여기 사람들은 모든 것에서 가족이 우선인 것 같다. 멀리 떨어진 경우 아니면 웬만해서는 모두가 이런 기념식이나 생일 등에는 모두 모여 가족의 끈끈함을 과시하니 말이다. 이제 사윗감을 물색할 연배인 하얀거탑은 장성한 두 자녀와 함께 서서 축배 제의를 한다.

 

"Salud(건배)!"

a

<빔 프로젝트 사진을 통해 그들의 연애 이력과 지난 결혼생활이 펼쳐진다> ⓒ 박우물

<빔 프로젝트 사진을 통해 그들의 연애 이력과 지난 결혼생활이 펼쳐진다> ⓒ 박우물

a

<그들 부부 사랑의 결과인 장성한 자녀들과 함께 하객들에게 덕담을 건넨다> ⓒ 박우물

<그들 부부 사랑의 결과인 장성한 자녀들과 함께 하객들에게 덕담을 건넨다> ⓒ 박우물

 

후안 또레블랑까(하얀거탑)은 이곳 국립대학 교수협의회 회장이고 엔지니어(기술사)이다. 아마 내 글에서 자주 언급되는 두명의 후안 중 한 명으로 한 명은 내 가족 같은 후안 기자고-아레끼빠에 들르면 항상 이 집에서 머무른다-또 한명은 어찌 인연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하얀거탑이다. Torre Blanca=Tower of White는 이리 해석될 이름이니 하얀거탑이란 애칭도 기실 무리는 아닐 것 같아 그렇게 표기해본다.

 

그리고 후지모리 정당의 지구당위원장이라고 할까, 우리나라와는 여러가지 제도가 다르니 정확한 명칭을 전달할 자신은 없지만 클럽문화로 똘똘 뭉친 라틴에서 영향력 있는 축구클럽에도 가입되어 있고 오지랖 넓게 지역사회에 관여한다. 물론 그러기 때문에 정당활동을 하는지 모르지만 본인은 연구하고 책을 읽는 것이 더 체질에 맞지 투쟁하고 이슈를 만들어내는 것은 별로 자신이 없댄다. 밑의 변호사 동생이 열렬한 후지모리스타란다. 내가 정치쪽 사람들은 한국에서나 예서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계면쩍게 부연하던 사람이다. 활발한 사회활동주의, 즉 사교적이지만 정치쪽에는 그리 소질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본인이 창피하여서 말을 안했는지는 몰라도 후지모리 판결이 몇달 전에 나오고 아레끼빠 광장에서 무죄다, 라고 시위를 벌이다 역으로 더 많은 시민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 도망다닌 장면이 생생히 뉴스에 나왔다고 후안 기자에게 들은 기억도 있다. 

 

나중에 다시 그에게 직접 확인해봤지만 영상을 보는데 그들 부부가 결혼전 11년 동안 연애 했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다. 나를 포함하여 동양인들이 가진 선입견 중에 라티노들은 쉽게 달아오르고 사랑도 그리 쉽게 사그라지는 것으로 오해 아닌 오해를 할 때가 종종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숫자가 나오자 돌연 그네들 부부가 새삼 존경스레 여겨진다. 아니 은근한 부러움이 휘감는다.

 

가만 있자, 나도 진짜 저리 오랜 기간 은근함과 한결같음으로 누군가를 연모하고 나눈 적이 있었던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고 가시버시로 아웅다웅 서로 용해되어 녹아내릴 그런 시간이 있었던가? 서로 다른 반쪽은 저리 살아야 하는데. 서로 다른 영혼은 저리 한데 어우러져 너는 또 하나의 나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갑자기 예전에 한참 회자되던 조안 리의 <스물넷의 사랑 마흔 여덟의 성공>인가 하는 제목의 책이 뜸금없는 앞뒤 숫자로 연상된다. 물론 그 책의 주인공인 벽안의 남자는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일반인들이야 상식을 넘는 나이 차이에 더 관심을 가졌겠지만 그 감동어린 순애보가 11과 25라는 숫자속에서 어른거린다. 

 

여기 라틴에 처음 도착하여 가정집에서는 거이 유일하게 보았던 고풍스런 피아노는 조율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그래도 딸은 아버지를 위하여 어울리는 곡을 고심하여 선택하였는지 앤디 윌리암스의 <My Way>를 연주곡으로 선정하였다. 이어 잘 못하지만 기타까지 들고 나와 부부 둘이서 만든 작품들인-자녀들-오누이는 영화 <Love Story> 주제 멜로디를 협연한다.

a

<엄마 아빠를 위해 두 자녀가 피아노와 기타를 동원하여 축가를 연주하고 있다> ⓒ 박우물

<엄마 아빠를 위해 두 자녀가 피아노와 기타를 동원하여 축가를 연주하고 있다> ⓒ 박우물

 

이어 그냥 받을 수만 있을소냐 싶게 주인공이 직접 기타를 들었다. 전에 공대교수들 기술사 모임에도 초대를 받아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특이하게 내 시선을 잡았던 것은 아르헨티나 밀랑고처럼 여기에서는 기타를 동원하거나 아니면 그냥 육성으로 돌아가면서 몇 편의 시를 암송해가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일이 생각났다. 하얀거탑은 기타의 베이스 런닝이나 아르페지오를 적절히 활용하여 중저음을 활용하여 사랑의 연시를 그의 평생반려자와 자녀들에게 헌시하였다.

 

그도 아마 이 순간을 위해 무던히 연습하였나 보다. 약간은 끊어질 듯 막연한 여운들을 목소리로 덮어간다. 문자로 접했다면 좀 더 이해가 빨랐겠지만 아직도 발성기관을 통해 나오는 언어들은 내 수준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지만 그 숙연함과 진지함에 이미 가슴이 먼저 해독했나보다.

a

<직접 기타를 들고 연주하며 연시를 낭송하는 후안 교수> ⓒ 박우물

<직접 기타를 들고 연주하며 연시를 낭송하는 후안 교수> ⓒ 박우물

 

9시반경이니 이제 식사를 하여야 하는데 남들에게는 접시를 죄다 돌리면서 나보고 이제 노래를 들려달랜다. 아레끼빠에서 만든 여행용 사각기타가 깨져서 마침 볼리비아에서 여행자용으로 산 비파형 기타를 처음 선보이다. 트윈폴리오가 불렀던 <더욱 더 사랑해> 원곡을 에스빠뇰, 영어, 한국어로 불러주자 식사 중인데도 박수는 에누리가 없다. 이어 로스판쵸스의 곡<내게 사랑을 가져다 줄 이는 누굴까?>를 요청하여서 옆의 하얀거탑이 또 다른 가족과 같이 듀엣을 하였다.

 

하얀거탑의 6남매 모두는 교수, 기술사, 변호사, 회계사로 나름대로 이 사회에서는 좋은 직업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어서 페루를 대표하는 락커 Gian Marco의 곡<Hoy=Today, 글로리아 에스떼빤에게 준 곡으로 페루 꾸스코와 마추피추를 노래한 유명한 곡>을 불렀다.

 

이제 슬슬 배가 고파오는데 내가 뒷전으로 빼는 눈치이자 <아리랑>을 요청한다. 항상 한국의 El Condor Pasa라고 기회있을 때마다 선보였으니 이들에게 각인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고도 끝나지 않고 피아노까지 요청, 한국에서야 내놓기 어려운 수준이지만 예서는 워낙 피아노가 귀하다 보니 그런 재주도 먹혀 <사랑의 기쁨>이란 곡을 비교적 더 정상적인 피아노 고음부를 활용하여 선보였다.

 

페루에서 태어나 유럽과 미국에서 살아온 중후한 풍의 교수는 노래가 끝나자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아리랑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온다. 일단 남들 G코드로 부르는 것을 <아리랑>의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는 의미를 극대화 하기 위해 무리가 되던 안되던 항상 4음이나 높여 C코드로 불러왔던터라 그 교수에게도 깊이 인상을 주었나보다. 그렇게 영어와 에스빠뇰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한일관계사를 스페인침략에 맞선 잉카 <뚜빡 아마르>처럼 대입하면서 설명하자 얼추 먹히는 성 싶다.

 

우리나라 뽕짝만큼이나 대중화된 <꿈비야>는 물론 <살사> 리듬등 다양한 라틴 리듬에 맞춰 하객들은 춤을 춘다. 중학교때 <Go Go> <Disco> 이후 한국사회에서 춤을 춰 볼만한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게 무려 30여년의 공백기간이 있지만 안되면 안되는대로 스탭을 밟아본다. 그래, 나도 이제는 이곳 문화에 스스럼없이 융화될 때도 되었을 법 하지 않은가.

저렇게 주말이면 온 밤을 마셔가며 춤을 추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오늘은 평일이니 그나마 자정께 사그라져간다.

 

모두가 가고 새벽 2시께 다른 동료교수의 차에 동승해 머무르는 동안 유숙하는 후안 기자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거실에서 몇 안 남았을 때 덕담을 건네주고 한마디 하는 거 잊지 않았다. 자리가 거의 파할 때쯤 깜박 잊고 있었는데 이 집의 또 다른 일원인 건강한 수캐가 거실로 뛰어든다. 덩치는 주인을 닮아 커다란 녀석이 반가움으로 흔드는 꼬리 힘은 또 얼마나 센지 그 쉼없이 방정을 떠는 꼬리 부분으로 연신 타격하면서 왜 내 가족일에 나를 뺐느냐는 식이다.

a

<이제 3살에 접어드는 애견이 나중에 뛰어들어 한바탕 휘젖고 다니다> ⓒ 박우물

<이제 3살에 접어드는 애견이 나중에 뛰어들어 한바탕 휘젖고 다니다> ⓒ 박우물

"알아요? 난 당신의 연애이력이 부럽고 이렇게 잘 살아가는 모습이 부럽다는 거. 앞으로도 더 멋지게 사랑하며 살아가길 바라요."

 

"10월 15일에 다시 올 수 있어? 내 생일인데."

 

라틴에 머무르는 동안 그와 그러고 보니 가정 대소사부터 공식적인 회합자리에 무던히도 많이 같이 하였나 보다. 생일날에 내가 리마에서 15시간이나 걸리는 아레끼빠에 내려와 있을지는 미지수라 노력해보겠다고 응대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많아질 수록 그와 그의 가족과 나누는 시간도 더 쌓일 전망이다. 행복한 가정과 접촉이 많이 되면 나또한 그들처럼 전염되어갈 것 아닐런지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면서.

 

한국에서는 추석 소식으로 들떠 있다. 막히네 어쩌네 해도 이렇게 연중행사를 통해 가족이 한데 모여 분가한 후 자칫 소원해지기 쉬운 단절의 벽을 철거하고 핏줄의 소중함을 확인하는 자리 아닌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모이고 오가는 이들 모두에게 어디서나 이맘때 둥그런 보름달마냥 원만하게 어우러지는 인생 여정이길 안데스 버스안에서 슬쩍 커튼을 젖히며 하늘의 달에게 무심결 자가주문한다.

 

11년의 연애기간 충분한 교감과 서로 맞춰감이 있었기에 그들 부부는 지금의 25년 기념식을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꾸밈없이 내세울 수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곱게 곱게 해로해가길. 그 둘이 초반 선보인 월츠처럼 우아하고 화합하면서 꼭 둘이 서야만 어울리는 춤곡처럼 말이다.

a

<그들 부부의 25주년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케잌> ⓒ 박우물

<그들 부부의 25주년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케잌> ⓒ 박우물

 

문화의 레일

관계의 레일

Rail Art 박우물 http://cafe.daum.net/latine

덧붙이는 글 | 사이트 개인 블로그와 카페

2009.10.05 10:15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사이트 개인 블로그와 카페
#페루 중년부부 #25주년 결혼기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렇게 어렵게 출제할 거면 영어 절대평가 왜 하나
  2. 2 동네 뒷산 올랐다가 "심봤다" 외친 사연
  3. 3 궁지 몰린 윤 대통령, 개인 위해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나
  4. 4 '파묘' 최민식 말이 현실로... 백두대간이 위험하다
  5. 5 [단독] '키맨' 임기훈 포착, 채상병 잠든 현충원서 'VIP 격노' 물었더니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