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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누이는 왜 열사가 되었나

[YH 김경숙 그리고 우리들] 열린 시사회

09.09.14 10:34최종업데이트09.09.1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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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더미 속에서 찾아낸 이야기들
 
2008년부터 작업한 영화 <YH 김경숙 그리고 우리들>이 완성되어 시사회를 연다. <YH 김경숙 그리고 우리들>은 김경숙 열사 30주기를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장희선, 김진상 두 사람의 감독이 공동연출한 작품으로 한국여성노동자회,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제작했다. 60분의 상영시간 동안 영화는 먼지 속에 덮인 기억들을 더듬어 오늘에 되살려 낸다. 그 먼지더미 속에는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것들이 숨어 있다.
 
1979년 그날. 
그녀가 떠난 지 30년. 우리에게 이름 석 자보다 열사라는 호칭으로 더 기억되는 김경숙. 1979년 8월 9일. 김경숙은 YH무역 노동조합 파업의 와중에 동료들과 함께 신민당사 점거에 들어갔다. 하루아침에 굳게 문 닫아버린 공장 앞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려 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리고 8월 11일 새벽, 독재정권의 폭력진압에 끌려 나오던 22살 꽃다운 김경숙은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이 사건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마침내 유신독재를 끝내는 단초가 되었다.

 

 
 
유신체제의 폭력 앞에서 하나의 명작, YH
 
시인 고은 선생은 YH사건을 "유신체제의 폭력 앞에서 하나의 명작"이라고 표현했다. 일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하던 그녀들이 노동자의 위치를 인식하고, 자발적으로 노동조합을 만들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가며, 주장하기까지의 과정은 YH사건이 끼친 영향들만큼이나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 안에 김경숙이 있었다. 어린 가장으로 초등학교 6학년부터 영세한 공장에서 일했던 그녀에게 YH는 꿈을 꿀 수 있는 곳이었다. YH엔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노동조합이 있었고,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야학이 있었고, 고향조차 못 가는 가난을 위로해 주는 벗들이 있었다.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단결을 외치던 김경숙. 30년이 지난 일이지만 한 올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30년 후.
 
파업 노동자로 KTX에 탄 승무원들
 
[YH 김경숙 그리고 우리들] 열린 시사회

일시 : 2009. 9. 21(월) 오후 5시

장소 :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아트홀

주최 : 한국여성노동자회,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

*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대학 졸업 후,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지상의 스튜어디스'가 된 오미선. 자신이 이렇게 노동운동을 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던 그녀는 현재 KTX승무원노조 지부장이다. KTX승무원들의 투쟁은 3년이 넘어가면서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투쟁 자체에 익숙해져서 투쟁이 생활이 되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처음에도 그렇고 지금도 노동운동가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YH 선배들을 보면, 자신의 30년 후를 떠올린다. 과연 30년 후에 어떻게 되어 있을까를 궁금해 하기도 한다.
 
영화는 투쟁의 정당성이나 당위성에 대해 웅변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그때를 기억하고 지금을 이야기할 뿐이다. 왜 일어설 수밖에 없었고, 왜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 열사로, 투사로 기억되는 호칭 속에 가린 그 여린 속내를 이야기한다. 열사나 투사가 되고자 원했던 사람은 없다. 그것은 평범한 모든 이의 일상 속에 내재된 비밀일 뿐이다.
2009.09.14 10:34 ⓒ 2009 OhmyNews
YH 김경숙 KTX승무원 시사회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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