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은 비 내릴 때 더 운치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민간정원... "선경이 여기인가 하노라"

등록 2009.07.07 18:52수정 2009.07.07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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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소쇄원 가는 길. 길가에 백일홍이 피기 시작했다. ⓒ 이돈삼


밤사이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칠 줄 모른다. 앞으로도 상당히 많은 비가 더 내릴 것이란 예보다. 그렇다고 주어진 짬을 그냥 보내기엔 아쉽다. 어디로 가볼까? 비 내리는 날 더 멋스러운 곳이 있을 것 같다. 문득 오래 전, 비 내리는 날 처마 밑에서 담배연기를 내뿜던 촌로가 생각이 난다.

차를 타고 시외로 방향을 잡는다. 목적지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민간정원인 소쇄원이다. 빗줄기가 굵다. 도로 곳곳에 빗물이 많이 고였다. 반대편을 지나던 차의 바퀴에서 한 양동이보다도 더 많은 빗물이 튕겨 나와 앞유리를 덮친다. 일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위기감이 엄습한다.


'담양'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촉촉이 내린 비에 나무도 부쩍 더 자란 것 같다. 빗물을 가득 담은 논에는 푸른 모가 생기를 띠며 남실댄다. 도로변에 줄지어 선 백일홍도 분홍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닥을 드러내 왜소해 보였던 광주호도 몸집을 많이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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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가는 길. 가사문학관 뒷산에 걸친 구름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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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들어가는 길. 왼쪽에 대봉대가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소쇄원은 생각했던 대로 한적하다. 주차장도 매표소도 관리하는 사람 빼고는 인적이 드물다. 평일이기도 하지만 비가 많이 내려 나들이가 불편한 탓이리라. 주차장 옆으로 흐르는 냇가의 물살이 거칠다. 금방이라도 모가 자라고 있는 논을 삼켜버릴 듯한 기세다.

소쇄원 들어가는 길은 한없이 고즈넉하다.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곳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대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간다. 다 자란 죽순이 옷가지를 벗어던지고 드러낸 속살이 매끈하게 보인다. 이제 막 땅을 헤집고 나온 죽순도 보인다. 만생종인 모양이다. 늦게 나온 것이지만 때맞춰 내린 비가 키를 쑥-쑥 키워 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니 대봉대가 반긴다. 옛날 찾아오는 손님을 버선발로 맞았다는 곳이다. 초가지붕을 타고 빗물이 쉼 없이 흐른다. 옛 주인이 객을 맞았던 심정으로 그곳에 걸터 앉아본다. 주인은 대숲을 따라 난 오솔길로 들어오는 객에게 달려갔을까? 아니면 가까이 올 때까지 그 자리에서 점잖게 기다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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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의 여인이 제월당 옆에 핀 석류 꽃을 바라보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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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당에서 내려다 본 광풍각. 비 내리는 날 더 아름답게 다가선다. ⓒ 이돈삼


대봉대 앞으로 난 흙담도 예쁘다. 한 움큼의 햇볕도 그냥 보내지 않았을 법한 애양단이다. 비 내리는 날 보는 담장이 운치는 더 있는 것 같다. 계곡 위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다섯 굽이를 이뤄 흐른다는 오곡문도 겉모습은 그대로다. 그러나 문 아래로 흐르는 물살은 거침이 없다. 폭포수에 다름 아니다. 통나무의 홈을 파서 만든 수로에도 빗물이 넘쳐흐른다.


나무를 걸쳐놓은 다리를 조심스레 건너니 제월당이다. 소쇄원 가장 위쪽에 자리한 이곳은 옛 주인이 살며 손님과 담소를 나누던 곳. 계곡 건너편으로 대봉대가 보인다. 손님을 맞을 때 대봉대까지 나가지 않고 이곳에서 그냥 기다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 누가 찾아왔는지 확인은 하면서. 초가 건물과 주변의 폭포, 계곡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주변 풍광과도 잘 어우러져 있다.

제월당 풍경도 풍경이지만 그 아래로 펼쳐지는 광풍각이 더 멋스럽다. 소쇄원에서 가장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이 집의 사랑방이고 중심이다.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 광풍각의 마루에 앉아본다. 왼쪽으로 폭포가 보인다. 너른 마루 앞은 곧장 계곡이다. 계곡의 물을 애양단 밑으로 흐르게 만든 옛 주인의 감각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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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각 처마를 타고 빗물이 흐르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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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에 홈을 파서 낸 수로. 빗물이 넘쳐 흐르고 있다. ⓒ 이돈삼


순간, 정자는 바깥에서 보는 게 아니라 안에서 보는 것이란 말이 떠오른다. 아예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본다. 밑을 들어올린 문 너머로 보이는 초록이 싱그럽다. 만물을 생동하게 만드는 비의 원력에 힘입어 새 가지와 잎을 만들어낸 것들이다. 500년도 넘게 모진 풍상을 다 겪었을 나무에서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도 더 장엄하다. 바람도 쉼 없다. 거목들의 가지와 잎이 흔들거린다. 처마를 타고 흐르는 빗물도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휘둘린다. 귀를 쫑긋 세워보니 대숲소리,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도 들려온다. 최소한의 인공으로 자연과 한데 어우러지게 한 모습에 눈길이 오래도록 머문다.

옛 사람의 속내가 조금은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시끄러운 세상을 등지고 자연으로 돌아간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풍류도 느껴지는 것 같다. 정원의 이름만큼이나 마음결도 깨끗하고 시원해진다. 별서정원이라더니 특급 별장이 따로 없다. 명승(제40호)답게 예상했던 대로 비 내리는 날 더 운치 있는 소쇄원(瀟灑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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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각 뒷편 처마와 어우러진 돌담이 멋스럽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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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앞을 흐르는 계곡. 폭우로 인해 계곡물이 마을앞 도로에까지 넘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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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을 돌아보고 귀가길에 들른 국립 5·18민주묘지. 80년 5월의 그날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 소쇄원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소쇄옹 양산보(1503-1557)가 자연 속에 최소한의 인공을 조화롭게 동화시켜 조성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원림정원이다. 기묘사화 때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를 당해 사약을 받아 죽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소쇄원을 조성해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곳이다. 선비들의 학문과 사상이 묻어나는 곳으로 1520년 초 조성돼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으며, 민간정원문화재 명승 제40호로 지정돼 있다.


덧붙이는 글 소쇄원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소쇄옹 양산보(1503-1557)가 자연 속에 최소한의 인공을 조화롭게 동화시켜 조성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원림정원이다. 기묘사화 때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를 당해 사약을 받아 죽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소쇄원을 조성해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곳이다. 선비들의 학문과 사상이 묻어나는 곳으로 1520년 초 조성돼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으며, 민간정원문화재 명승 제40호로 지정돼 있다.
#소쇄원 #담양 #제월당 #광풍각 #대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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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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