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울트라 극사실 드라마'에 경배를!

30대 남성 드라마 마니아가 본 <꽃남> 신드롬

등록 2009.02.25 09:38수정 2009.02.2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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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방송된 <꽃보다 남자>의 한 장면. ⓒ KBS


# 장면 하나, 한 문화 웹진의 기획회의 시간.

기자들의 대부분은 30대 중반을 넘어선 여성. "저야 뭐 퇴근하고 들어가면 열렬히 시청하고 있는 아내와 딸 아이 때문에 가끔 보는 거죠"라는 40대 초반의 남자 과장이 포문을 열었지만, 대화는 대부분 구준표(이민호 분)에 매료된 여성들의 애정고백으로 이어진다. 다들 미소를 함박 머금은 표정을 짓고는, 

"우리 준표, 너무 죽이지 않아요?"
"저번주인가 웃통을 벗었던데, 너무 마른 거 같아 살짝 별로더라고."

"그래도 우리 준표인데요. 대만이나 일본 드라마 다 챙겨봤지만, 역시나 F4는 우리나라 애들이 제일 '얼짱'인 거 같아요."
"참, 시청률 30% 넘었다면서요? <꽃보다 남자> 때문에 <에덴의 동쪽>은 물 건너갔다니까. 사실 전 다른 애들은 눈에도 안 들어와요, 우리 준표 말고는."

# 장면 둘, 2월 14일 방영된 MBC <무한도전> '꽃미남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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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방송된 <무한도전> 꽃미남 특집. ⓒ MBC


<무한도전> 멤버들이 F4로 분장했다는 것만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특집. 구준표(이민호)는 박명수가, 윤지후(김현중)은 유재석이, 송우빈(김준)은 정준하가, 소이정(김범)은 노홍철이 연기했고, 금잔디(구혜선)는 전진이, 오민지(이시영)는 정형돈이 분했다.

<꽃보다 남자>의 신드롬에 편승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와 달리 한정된 촬영 시간과 '쪽대본'이라는 포맷을 십분 이용, <아내의 유혹>에서부터 <에덴의 동쪽> <가을동화> <하늘이시여> 등등 자극적인 설정으로 유명한 드라마들을 종횡무진 패러디했다. 촌스러운 컴퓨터그래픽은 물론이요, 한국의 드라마 현실을 대놓고 비꼬며, 블로거들의 호평과 함께 15%(TNS미디어코리아 기준)의 무난한 시청률을 기록했다.


# 장면 셋,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무슨 수난?

지금 당장 인터넷 검색창에 '꽃보다 남자'를 쳐 보시라. 기사 제목은 물론이요, 기사 내용에 <꽃보다 남자> 혹은 '꽃남'을 포함한 '듣보잡' 기사와 보도자료, 칼럼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사 제목과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 가관이다. '구준표式 백화점 쇼핑' 현실서 가능할까'와 같은 경제면 기사는 약과다. '노무현도 한 때 구준표… 거품과 롱런의 갈림길에 선 이민호'와 같은 낚시성 제목에 이르러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무슨 수난인가' 싶다. 한때 검색어 1위에 올랐던 '김소은 지각'과 관련된 기사들은 하루 만에 신인 연기자의 지각과 사과로 마무리되는 촌극을 빚는 데 일조했다.

'김현중 실신', '김범 사고', '이민호 스캔들'이란 비슷비슷한 기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 포털 메인에 떠 있고, 검색어 1위로 등극하며, 각종 마케팅, 프로그램 홍보에 이용되는 도미노 현상. 그러니까 <꽃보다 남자>를 건드리지 않고는 못 버티는 '꽃남' 마케팅 기사의 범람.

어느 30대 남자 드라마 폐인의 고백

<꽃보다 남자>에 대한 글을 청탁받는 순간, 올 것이 왔다 싶었다. 블로그에도 한 번 쓰지 않고 관망하며 버텨왔지만, 이제 순서가 됐구나 싶었다. 먼저 고백하자. 난 <꽃보다 남자>를 본방 사수하는 팬이 아니다. 드문드문 보면서 줄거리를 따라잡는 수준이다. 사실 <꽃보다 남자>는 나이 앞 숫자에 3자가 붙은 남자가 보기에 너무나도 민망한 드라마가 아닌가.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라. 인정옥과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를 사랑하고, <타짜>나 <온에어>와 같은 상업성 짙은 드라마도 챙겨보는 자칭 드라마 마니아다.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와 <위기의 주부들>도 매주 챙겨볼 정도로 아줌마 취향이며, '일드'의 시청률 제조기 기무라 타쿠야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섭렵했으니 한미일 드라마 지형도는 숙지했다고 말할 수준은 된다.

그러니까 이 글은 한 30대 남성 드라마 마니아가 본 <꽃보다 남자> 현상 되겠다. 누구도 심각하게 보지 않는 이 궁극의 판타지를 내적으로 리뷰 할 생각은 없다. 그저 먼저 살펴본 세 장면에서 엿볼 수 있는 <꽃보다 남자> 현상, 다시 말해 여성 시청자에게 소구하는 원작과 캐스팅의 힘, 막장드라마 열풍, '꽃남' 마케팅 열풍 정도로 갈무리 할 수 있겠다.

언니들이 지지하는 검증된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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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남자> 제작발표회. 왼쪽부터 김준(송우빈), 김준(소이정), 구혜선(금잔디), 이민호(구준표), 김현중(윤지후) ⓒ KBS


<꽃보다 남자>는 아시아에서 한 콘텐츠가 어디까지 무한 소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최상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잘 알려진 대로 원작은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에서 연재되어 5 000만부가 넘게 판매된 '초절정' 베스트셀러다. 일본에서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으로, 또 대만으로 건너가선 <유성화원>이란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그 드라마는 우리나라로 수입된 바 있으며, 지난해 국내 개봉된 일본영화 <꽃보다 남자: 파이널>은 완결판되겠다.

사실 엇비슷한 신데렐라 스토리 MBC <궁>을 만든 제작사 에이트픽쳐스가 드라마화를 결정하면서, 팬들 사이에서 캐스팅을 두고 설왕설래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1990년대에 이미 <오렌지보이>와 같은 출판용 해적판 만화가 인기를 끌면서 <꽃보다 남자>는 꾸준하게 언니들의 사랑을 받아온 터다. 그러니까 지금의 30대 남성이라면 한 번쯤 읽어봄직한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의 순정만화 판본이자, <캔디 캔디>의 90년대 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언니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원작이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니 일단 닥치고 본방을 사수할 주 시청층은 확보했던 셈.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대만판이 국내에서 열풍을 나았던 것은 1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터. <꽃보다 남자>는 꾸준히 일본과 대만을 넘나들며 꽃미남 배우들을 배출해내는 본산지가 되어줬고, 이는 10대부터 30대 여성의 지지를 아우르는 원동력이 되어줬음이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꽃보다 남자>는 남녀주인공의 애정전선이 매회 흐렸다 개었다를 반복하는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다. 어머니와 딸이 함께 시청한다는 댓글이 종종 발견되는 것을 보면, <꽃보다 남자> 신드롬이 역시나 공중파 TV를 장악한 중장년 여성층에게도 어필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구조에, 서민들은 감히 접하지 못하는 볼거리에, <질투> 이래 익숙해진 트렌디 드라마를 섞었으니 공히 세대를 아우를만한 강력한 판타지 아니겠는가.

꽃미남 신드롬과 막장드라마의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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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 30%대인 SBS <아내의 유혹> 포스터 ⓒ SBS

인기의 주원동력인 '꽃미남' 신드롬을 부연할 생각은 없다. 1990년대에도 우리는 차인표와 안재욱 신드롬을 겪은 바 있지 않은가. 더 나아가 <꽃보다 남자>는 이제 <나는 펫>과 같은 리얼리티 재연극을 거쳐, 본격적으로 공히 '연하남'과 '꽃미남'을 가로지르는 문화적 소비가 시청률을 반등시키고 신드롬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명증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꽃보다 남자>의 장점은 이 드라마가 리얼리티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궁극의 판타지라는 점에 있다. 감미로운 OST와 F4의 클로즈업이 한 회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형식은 둘째치더라도, 60억 원대의 제작비의 대부분이 들어갔을 법한 해외 로케와 대한민국 1%의 상류층 계급에 대한 외형적 묘사는 그 자체로 불황에 대한 고민을 날려버릴 충분한 판타지적 볼거리를 제공해 주지 않는가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요즘 대세인 '막장' 드라마와의 결합이다. 캔디형 여주인공의 신데렐라 성공기에 세트별 꽃미남의 등장, 게다가 요즘 대세인 '나쁜 남자'의 개과천선 사랑기가 주를 이루는 이야기는 시대와 국가를 뛰어넘는 원작의 공으로 돌려야 마땅할 것이다.

그 보다 염두에 둘 것은 이 궁극의 판타지(이웃 나라의 전작들과 비교해 좀 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야 반응하는)가 한국적 설정이 가미되면서 좀 더 자극적인 설정이나 표현이 첨가됐다는 데 있다. 엄숙주의에 입각하자면 선정성을 따지고 들어야 마땅할 초반 '왕따'나 성희롱에 관련된 문제제기도 이제 대세 속에 묻히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무한도전>이 패러디한 그대로다. <꽃보다 남자>의 판타지는 종종 발견되는 무리수와 자극적인 설정마저 중화시켜 버린다. 그건 비단 <꽃보다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그간 너무나도 비슷한 '에덴의 꽃보다 남자는 내 운명' 같은 드라마로 정의될 수 있는 극도로 자극적인 화학조미료 드라마에 길들여져 왔던 탓이 더 크지 않을까.

불륜과 치정과 복수가 뒤범벅이 된 전무후무한 초스피드 전개의 드라마 <아내의 유혹>이 대세인 시대. 아무도 드라마의 완성도를 논하지 않는 <꽃보다 남자>는 '막장드라마' 시대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가 아닐까. 이미 익숙하고 완결되어 있는 원작 판타지 세계 속에서 새롭게 찾아내고 키워낸 '꽃미남' 구준표가  살인미소를 작렬하고, 안드로메다급 막말을 날리고, "호랑이도 제 발 저린다더니"와 같은 농담을 던져도 까르르 웃어줄 만반의 준비를 한 '열혈' 시청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꽃남' 기사의 천국, 괜찮은 거니?

대개 드라마에 관한 기사는 몇 가지로 분류 된다. 첫째가 시청률 기사와 그에 대한 분석 리뷰요, 둘째가 출연하는 배우의 인터뷰와 동정, 그리고 높은 시청률 드라마에 대한 신드롬 분석 기사류가 전부다. 이것이 일간지와 인터넷 연예매체, 그리고 블로그스피어에서 종종 목격되는 기사들이다. 물론 우선은 방송국 홍보팀이 뿌린 보도 자료의 늪을 헤어 나와야 할 테지만.

거두절미하고 드라마는 광고가 먹여 살린다. 시청률은 광고를 낳고, 또 그 시청률은 수많은 기사와 패러디를 불러내고, 마케팅의 도구로 사용된다. 심지어 발 빠른(?) 한나라당 의원들과 보좌진들도 <꽃보다 남자>를 패러디하는 현실이다. 방송 10회 만에 시청률 30%의 높은 벽을 돌파한 <꽃보다 남자>가 연성화 된 연예 뉴스를 확대재생산 해내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냐고?

<꽃보다 남자>를 둘러싼 과도한 기사들의 남다른 면은 기사의 팩트 자체가 우리 드라마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데 있다. 다급한 촬영 일정으로 연기자가 과로로 쓰러지거나, 무리한 일정을 버티지 못하고 자동차 사고가 났다거나, 신인 연기자가 광고 출연을 빌미로 촬영 현장에 지각했다는 기사가 양산되는 것을 보면, 인기 드라마의 위태로운 제작 현실을 지상중계하고 있는 것만 같아 안쓰러울 지경이다.

대중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는 드라마와 새로운 스타에 관심과 기사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그래도 수백 건은 조금 심한지 않은가. 클릭한 뒤 욕 나오는 '낚시성' 기사는 제발 삼가 주시라). 그에 반해 영화나 드라마를 위시한 대중문화 관련 전문지가 설자리를 잃고 있는 요즘, <꽃보다 남자>에 대한 날카롭고 재치 있는 분석기사는 턱없이 부족한 것 또한 우리 미디어 환경의 현실로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걸까.

울트라 극사실 드라마에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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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방송된 <꽃보다 남자> 14회 주요 장면 ⓒ KBS


끝으로 <꽃보다 남자>에 대한 짧은 생각 몇 가지. 앞으로 수많은 광고에 등장할 테지만, 출연진의 첫 번째 광고 출연이 10대를 겨냥한 휴대폰 요금 상품이라는 점. 역시나 이 불황에도 지갑을 쉽게 여는 건 10대들이라는 걸까?

또 하나 우리는 이미 국산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황인뢰 감독의 꽤나 창조적이고 외형적인 완성도를 갖춘 드라마 <궁>의 출현을 목도하지 않았는가. 일본에 10여 년이나 뒤처졌으면서도 전혀 창조적이지 않은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현상을 대중문화의 퇴행이라고 읽는 건, 단지 고리타분한 아저씨의 시각일 뿐인 건가.

그렇다면 언젠가는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떼로 등장하는 '꽃보다 여자'도 제작될 날이 오지 않을까(이건 로리타 신드롬이라는 금기에 걸려 불가능 할 거라고?). 그렇다면 일찌감치 그런 허무맹랑한 공상일랑 접고, '미드'를 보는 것이 빠를 일이겠다. 뉴욕 상류층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드라마틱하게 그린 <가십걸>이 이미 케이블에 상륙한 지 오래니까.

그랬거나 말거나 개인적으로 <꽃보다 남자>는 극사실 드라마라 주장할 테다. 날이 갈수록 2:8의 계급 사회가 공고화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까발리고 있으니, 이건 리얼리티를 신경 쓰지 않았다기보다 그 어떤 극사실 드라마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10년 뒤, 20년 뒤 기부금 입학제가 제도화 되면 현실의 신화고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디 있는가. 달콤한 낭만적 판타지를 당의정으로 입한 울트라 극사실 드라마 말이다. 
#꽃보다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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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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