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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우리는 의심하고 확신하고 싸워야해

[리뷰] 존 패트릭 샌리 각본과 연출의 <다우트>

09.02.13 10:47최종업데이트09.02.1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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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우트>의 이야기는 원래 극본이었다. 한국에도 연극이 공연된 바 있다. 극본을 썼던 존 패트릭 샌리가 직접 각색을 했고, 연출까지 도맡아 연극을 영화로 훌륭하게 둔갑시켰다. ⓒ 미라맥스 필름

영화 <다우트>는 의심에 관한 이야기다. 때는 1964년. 한창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던 때다. 브롱크스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구의 카톨릭 학교에는 알로이시어스란 이름의 꼬장꼬장한 교장 수녀가 군림하고 있다.

 

그녀는 약간의 빈틈에도 어김없이 회초리를 내리치는 엄격한 수녀로,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며 심지어는 스스로 그런 사실을 만족스레 생각하기까지 한다. 성 니콜라스는 알로이시어스의 법칙이 지배한다.

 

그러나 알로이시어스 수녀의 철통 권력을 위협하는 이가 불쑥 나타난다. 바로 새로 부임해 온 플린 신부다. 그는 활력 넘치고 따뜻한 성품이며 아이들을 공포로 다스리기보다 사랑으로 보듬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나이다. 신부라는 지위 때문에 알로이시어스 수녀도 플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슬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당시는 미국 사회에 변화의 폭풍이 거세게 몰아닥칠 때였다. JFK가 암살당한 뒤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흑인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공민권 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여성들이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고 길거리에 히피족이 쏘다녔다. 비틀즈가 자유와 청춘을 노래했다. 그러한 변화의 바람을 타고 완고한 성 니콜라스에도 도널드 밀러라는 흑인 아이의 입학이 허락되었다고 짐작이 된다.

 

그러나 역시 인종차별은 여전한 바, 플린 신부는 특히 도널드와 가깝게 지내는데 또 그런 모습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는 이가 있다. 젊고 순진한 제임스 수녀는 도널드에게서 술 냄새를 맡고서는 플린 신부가 불쌍한 흑인 아이를 성추행하지는 않았는가 의심하여 그 이야기를 슬쩍 흘리고 만다. 그런데 그게 하필 알로이시어스 수녀라. 물증은 아무것도 없지만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죄를 지었다고 확신하며 추방하려 애를 쓴다. 이제부터 영화는 젊은 신부와 늙은 수녀 사이 권력투쟁의 영역으로 발을 들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4년은 미국 사회가 격변하고 있는 때였다. 때문에 가장 완고한 카톨릭 학교에 흑인 학생도 입학할 수 있었다. 도널드 밀러와 그 가족이 취하는 입장 또한 권력 투쟁의 하나다. ⓒ 미라맥스 필름

누구나 영화가 막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번에 알아챌 수가 있다.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보수주의자이며, 플린 신부는 진보주의자다. 그리고 역사는 진보한다. 역사의 파도가 성 니콜라스만 비껴가지는 않을 테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로마에서 벌어졌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카톨릭의 진보적 전환을 말해주는 일대 사건이다. 공의회는 소녀 복사를 처음으로 인정했으며, 개신교를 형제 종교로 받아들이고, 미사를 꼭 라틴어로 봉헌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그러니 늙은 수녀는 역사 앞에서 반드시 패배하게 되어 있다. 게다가 그녀는 미움을 사기 딱 좋은 사람이다. 성질이 워낙에 괴팍한데다가 의심의 근거 또한 없으니 병적 꼰대 취급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그렇게 알로이시어스 수녀의 투쟁은 홀로 외롭다. 플린 신부를 추방하기 위하여 그녀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약자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만 약자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약자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절대 플린 신부를 이길 수가 없다.

 

영화가 끝나도 마음이 답답하고 편치가 않다. 알로이시어스 수녀와 플린 신부 중 어느 누구의 편이 되기가 어렵기에 그렇다. 겉보기에 늙은 수녀의 근거 없는 의심에 시달리는 플린 신부가 대단히 억울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린 신부는 강자다. 그가 신부이고 그녀는 수녀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카톨릭은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위계질서를 가진 집단이다. 알로이시어스 수녀가 그를 추방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에다 규정을 위반하는 고발을 행해야 한다. 플린 신부는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불같이 화를 낸다.

 

왼쪽이 알로이시어스 수녀(메릴 스트립), 오른쪽이 플린 신부(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다. 둘은 겉보기에 보수와 진보의 역할로 보이지만 껍질을 까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 미라맥스 필름

영화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플린 신부가 정말로 성추행을 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모든 걸 걸고 확신에 몸을 던지는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오히려 진보주의자이며, 무고를 호소하며 기득권을 지키려 안달인 플린 신부는 오히려 보수주의자이다. 참으로 헷갈리는 권력 투쟁이다. 보수적 신념을 지키는 수법이 진보적 투쟁이 되며, 진보적 신념을 행하는 수법이 보수적 투쟁이 된다. <다우트>는 일견 분명한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껍질을 까보면 불분명한 정체를 드러낸다. 알고 보니 진보와 보수 간의 투쟁 이야기가 아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제목 그대로 의심에 관한 이야기다.

 

원래는 영화가 아니라 연극이었다. 극본을 썼던 존 패트릭 샌리가 손수 각색하고 연출까지 도맡아 영화로 둔갑시켰다. 거기에 고개를 조아려야 마땅할 명배우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수녀와 신부를 맡아 연기를 한다. 늙은 수녀의 떨리는 주름살과 혈기방장 신부의 이마에 돋는 핏줄은 마치 액션 영화처럼 뻥뻥 터지는 긴장을 부른다. 거기에 에이미 아담스의 제임스 수녀 연기 또한 대단한 경지다. 이들이 연주하는 의심의 교향곡은 복잡하고 피곤하다. 보는이는 필름이 돌아가는 동안 끊임없는 의심에 시달린다. 온통 불분명한 세계와 의심의 폭격은 급기야 보는이를 탈진 지경으로 몰아넣고야 만다.

 

의심은 그 나름대로의 잣대에서 시작하며, 어떤 잣대냐에 따라 세상의 편가르기는 모두 다르다. 도널드의 어머니는 자기 힘이 되어주는 이의 편에 함께 서겠다고 했다. 편가르기가 그렇고 권력 투쟁이 죄다 그렇다. 주변인들은 모두 자기 이득이 되는 편에 따라붙어 '보통의 정의'를 주장하며, 상대방을 의심하고 공격한다. 그러나 보통의 정의란 한갓 뜬구름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잔혹한 의심의 게임을 치르는 와중에서, 가장 꿋꿋했던 신념마저 끝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알로이시어스 수녀가 흘리는 눈물의 이유를 이해하겠다.

2009.02.13 10:47 ⓒ 2009 OhmyNews
다우트 메릴 스트립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에이미 아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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