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열장 속 파란색 MP3를 샀습니다

경력이 있음에도 '신입'으로 원서를 넣어야 하는 지금 우리 모습

등록 2009.01.26 15:29수정 2009.01.2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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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란색은 새 것은 없나요?”
“아, 그 파란색은 진열장에 있던 거 그거뿐인데요.”


MP3를 사러 마트에 갔습니다. 오랫동안 미루고 미루어 오다 설날을 맞이해 특별히 장만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설날을 맞이할 때면 무언가 새롭게 시작해보겠다는 결심. 매년 새롭게 약속을 할 때마다 이 자신과의 약속이 얼마나 갈지 의문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약속마저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너무 미안한 일인지라 무언가는 꼭 하겠다고 약속을 하게 되곤 합니다.

그리고 올해 저는 스스로에게 외국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 결심을 지키기 위해 제일 먼저 하기로 한 일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오랜 시간 정들어 왔던 카세트 대신 MP3를 새로 장만하기로 한 것입니다. 오랜 고민 끝에 마음에 드는 MP3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가격도 성능도 만족할만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 마음에 쏙 들었던 제품이 진열장에 놓여 있던 제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망설이자 직원이 같은 종류이지만 색깔이 다른 MP3 몇 개를 더 보여주었습니다. 주황색, 하얀색, 검은색 등 다양했습니다. 무엇보다 파란색이 아닌 다른 녀석들은 수줍은 새색시처럼 뜯어지지 않은 포장지 안에 곱게 들어 있었기에 더욱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주황색은 꽤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해야겠습니다. 사실 이미 포장지 밖으로 나와 진열되어 있던 파란색이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어쩐지 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점원에게 “주황색 주세요”라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 왼쪽 손에 들려 있던 파란색 MP3가 눈에 띄였습니다. 진열장 안에 있던 것이라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계속 한 쪽 손에 들고 내려놓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 손에 들려 있는 주황색 MP3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둘을 번갈아 보고 있던 어느 순간, 파란색 MP3를 더 오래도록 보게 되었고, 그렇게 오래도록 파란색 MP3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짠해왔습니다.


진열장에서 다른 친구들을 대신해 열심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선보이고 있었던 파란색 MP3.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열장에서 이 파란색 MP3는 얼마나 오랜 시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일을 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면서 이런 저런 평가를 들어왔을까.

분명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친구들이 팔려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새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선택받지 못한다면 이 녀석은 얼마나 슬플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쩐지 88만원 세대라는 소리를 들었던 제 또래 세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느덧 이제 20대 후반에서 30대까지 이른 제 또래 세대들. 이미 다들 먹고 살 자신의 길을 찾았을 나이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가끔 친구들 얘기를 듣다 보면 신입 사원 면접에 응시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분명 그 친구들은 직장 생활을 했을텐데, 어떻게 신입 사원 시험을 볼까라는 의문을 갖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떤 상황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나 정도면 경력도 괜찮고 신입 사원으로 들어가면 회사 입장에서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나보다 더 경력 많은 사람들도 많더라고.”

좋은 직장을 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많은 제 또래 세대들은 많은 곳에서 자신을 보여주고자 열심히 일하고 경력을 쌓아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포장지에서 한 번도 풀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또 다시 처음 사람들 앞에 선보여야 하는 것처럼 신입 사원에 응시한 친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어쩐지 진열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하려 했던 파란색 MP3에게 미안해졌습니다. 이 녀석은 자신이라는 기종이 예쁘고 얼마나 좋은 성능을 갖고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그런데 진열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 노력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다시 포장지 안에 곱게 접힌 채로 나와야만 인정 받을 수 있다면 그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누구나 헌 것보다는 새것을 더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렇지만 때로는 그런 생각 때문에 오랜 시간 제 자리에서 열심히 일해 왔던 마땅히 지켜보아주어야 할 그런 이들조차 다시 새 포장지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게 정말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일까요.

새해가 시작되면 유독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새로운 것들과 함께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번 새해만큼은 진열장에서 오랜 기간 열심히 묵묵히 일해왔던 조금은 낡았을지도 모를 이 파란색 MP3와 함께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열심히 일해온 녀석이니까 저도 이번만큼은 예년보다 더 길게 결심을 지켜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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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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